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30)

새벽지기1 2016. 5. 11. 15:04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것은 복음 사역을 통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가게 하는 것과 더불어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가는 공동체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
교회가 복음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매개하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는 것과 떨어질 수 없다.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비추어 볼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공동체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총체적 삶의 공동체이고, 영원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며,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교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사회적 공동체이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종말론적 공동체다. 여기서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교회가 믿음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서 그의 다스림을 계속 받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의 다스림을 받아가기로 헌신한 사람들의 공동체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통해 그의 몸인 교회를 다스린다.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함이다. 따라서 교회가 존재하고 활동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가치관과 삶의 원리를 추구하고 실천하기 위함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가는 공동체가 될 때 세상에 대해 하나님 나라의 표징(sign)이 될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공동체가 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 점에서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세상과 떨어질 수 없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한 것은 그들을 통해 온 인류에 대한 자신의 뜻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을 위해(for many) 이 땅에  왔고, 사람들을 죄악에서 구원하였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기보다 이 세상을 `위해' 존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만일 교회가 그 자체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에 머물고 만다면 그것은 교회의 바른 모습과 거리가 멀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본질적으로 관계된다. 하나님이 그의 영원한 아들 안에서 사람들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한 것은 그들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가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실제(reality)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다. 따라서 하나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의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요구된다.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서 교회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와 연결된다. 판넨베르크나 몰트만은 이 새로운 창조는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종말론적 실제라고 주장한다. 하나님 나라는 오직 인류 역사의 끝에 실현된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표징으로 갖는 특성은 미래에 실현될 하나님 나라의 특성에 달려 있다.

 

판벤베르크나 몰트만은 인류 역사 끝에 실현될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사람들의 미래에 제한되지 않고 모든 인류가 함께 이르게 될 미래다. 하나님 나라는 또한 인류가 정치적으로 이르게 될 마지막 상태다. 그곳에는 모든 정치 질서의 목표가 되는 보편적 평화와 정의가 있다. 이러한 이해는 구약 성경이 인간 사회에 정의를 실현하는 하나님 나라를 기대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모든 인류가 미래에 이르게 될 정치적 미래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정부나 정치 혁명을 통해서는 성취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것은 정치적 사회적 질서에서 어떤 일정한 형태를 갖지 않는다. 이 질서는 언제나 권력이 남용되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외적인 평화만 강요할 뿐이다. 비록 기독교적 기초 위에 세워질지라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류 역사의 끝에 하나님만이 세우신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