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로마서강해

롬6:15-19 [로이드존스-로마서 강해]

새벽지기1 2016. 3. 18. 07:21

6장 15~19절 :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오. 그럴 수 없느니라. 16-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19-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1. 생명으로 설명된 소유권(15~16)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이 우리의 성화를 보증합니다. 그러므로 성화를 하나의 분리되고 부수적인 체험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칭의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의미하며, 그것이 우리 죄에서의 구원과 최종적인 영화를 보증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롬8:30에서 그는 그것을 이렇게 진술하는데, “의롭다 하신 자를 또한 영화롭게 하시고, 그것은 이미 일어난 것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①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 알지 못하느냐”는 말에서 “드리다”란 말의 의미는 “선물하다”, “넘겨주다”라는 뜻입니다. 다음 용어는 “종들”이라는 단어인데, 종으로 섬기는 데는 자원의 요소가 있으나 노예제도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번역은 잘 된 번역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사도가 사용하고 쓴 어휘는 종이 아니라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② 사도는 여기에서 죄의 반대로 순종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사망의 반대는 생명임에도 그는 의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순종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은 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이며, 순종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영위케 하였던 의의 생활로 인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③ 우리가 자신을 어떤 권세에 대한 노예로 드린다면 우리가 그 세력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노예 소유주의 권세가 지닌 특징은 그것이 전체적이고 독재적인 권세라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을 그러한 세력에 넘겨준다면 나는 그 세력의 노예에 불과하며, 더 이상 자유인이 아닙니다.


④ 세상은 두 전제주의적 세력만이 존재하는데, 죄는 마귀에게 속하여 그 결과 사망에 이르게 하고, 순종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의 속성인 의를 산출합니다.


⑤ 우리는 어느 세력이든 서로 충돌되고 배제됨으로 한 세력의 노예로서만 존재하게 됩니다.


⑥ 우리는 결국 우리가 행하는 바에 따라 우리의 주인이 누구이며, 우리의 지위가 무엇인가를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은혜 아래 있으니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⑦ 본성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거듭나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본성을 가지고 있으며, 새로운 본성은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순종과 의와 거룩한 삶에서 스스로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죄를 계속 짓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2. 믿음과 순종(17)


이 구절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려주는 신약성경의 가장 분명한 정의들 가운데 하나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본 바와 같이 우리를 소유하고 싶어하고 삶을 지배하고 싶어하는 두 세력이 있는데 두 세력의 모두에 속해 있을 수 없고 한 세력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방식에 의해서 누구의 노예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전의 어떠한 조건과 관계없이 모두 완전히 새로운 지위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도는 성경 가운데서 발견되는 것 가운데 가장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정의를 하나 던져주고 있습니다.


① 그리스도인은 큰 변화를 이룩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죄 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이었으며 아무도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❶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어떤 큰 변화를 가져와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인격 전체에 영향을 주는 변화입니다.

❷ 마음과 의지와 의지 전체가 감동되는 변화입니다.

❸ 이 변화는 너무 커서 소유권의 완전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죄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의와 순종과 하나님 편에 속한 모든 것의 종이 되는 신분의 변화가 있게 되었습니다.


②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는데, 우리는 이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언제나 노예입니다.

그들이 죄의 종으로 태어났고, 두 번째 출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됩니다.

❶ 인류는 자신을 스스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나 도덕적인 품행의 결과로도 구원을 창출해 낼 수 없습니다.

❷ 우리는 죄와 허물로 인해 절망적이고, 죽어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다시 살리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늘 보좌에 앉히셨습니다.(6,7절)

우리를 인도하여 이 새 틀에 부은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❸ 그래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고 오직 하나님께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철저하고 절대적인 노예였으며 사단의 노예요, 움직일 수도 없고, 강하게 무장된 그것을 이겨낼 수도 없지만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그 일을 하심으로서 우리를 건져내어 이 새 틀에 넣어 새롭게 출생시키신 것입니다.

나는 그 틀에서 나올 것이며 그리스도를 닮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나를 그의 틀에 넣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나를 지어가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그것이 변화가 일어나는 방식이며 그것이 이루어져 나가는 방식입니다.


③ 우리에게 일어난 큰 변화를 증거하는 방식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 이 “교훈의 본”과 이 틀에 들어간 결과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❶ 그것은 마음과 의지와 의지가 함께 동반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순종입니다.

❷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순종합니다.

❸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순종에 강조점을 두지 않는 믿음은 어느 것이든지 쓸모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으로 순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순종을 머뭇거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를 찬양하기 위하여 살아갑니다.

❹ 구원 받은 사람은 이 깊은 변화를 겪은 사람으로서 “회개할 것”과 “죄를 떠나 임박할 진노를 피할 것”과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순종할 것”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는 단순히 그의 의지로만 그렇게 하지 않고 온 마음이 그것에 속해 있습니다.

❺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원한 노예요, 행복한 노예입니다.

따라서 그의 최상의 욕망은 하나님과 우리 죄 때문에 세상에 오셨던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찬양하며 사는 것입니다.


3. 새 생명의 원리(18)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생명의 씨앗을 넣으시는데, 그것은 의의 씨앗입니다. 그것이 우리 속에서 일하시는데, 그로인하여 우리가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 점 없고 흠 없게 되기까지 그 과정은 계속되어 나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 일을 행하십니다.


4. 영적 분별력(19)


사도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권면과 요청을 말해 나가기 위해서 예화와 유추를 사용해 왔던 방식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16절에서 이런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노예제도로부터 하나의 예화를 빌려 계속 사용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는 말씀의 의미는 평범한 사람의 생활에서 취한 친숙한 예화를 사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노예제도에 대한 예화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들을 알아봅시다.


① 주제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❶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말하고 노예제도라는 친숙한 사실에서 예화를 든 것은 너희가 모두 노예제도에 대하여 친숙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❷ 강조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말씀을 분명하게 하고,

❸ 그 뜻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② 알기 어려운 것을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되는(벧후3:15,16) 것을 막고 진리를 안전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그들을 보호하여 지키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방편으로든지 죄가 그들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데, 은혜 아래 있으니 어떠한 행동을 해도 된다는 식의 말을 함으로서 죄를 짓는 길에서 보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③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라는 말씀의 또 다른 의미는 예화의 한계를 말해 줍니다.

❶ 예화를 사용함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하는 성도들을 돕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❷ 그렇기 때문에 예화는 진리에 도달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어지는 것이지 그것이 진리가 될 수는 없으므로 완벽하지 않습니다.

❸ 예화는 너무 심하게 표현되지 않아야 할 것은 그로 인하여 진리를 왜곡된 자리에 놓게 될 우려가 있으며, 낮은 자리에 놓게 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④ 사도 바울이 예화를 사용한 이유는 그들의 육신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말씀은 그들이 진리를 이해하는데 이지와 지력이 약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❶ 육신은 죄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부패되고 통제 받는 사람의 모든 기능을 의미합니다.

❷ 그러므로 사람이 부족한 것은 영적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이 타락하고 죄가 들어온 순간에 사람은 영적 판단력과 이해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❸ 영적 통찰력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집니다.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세상의 어떤 지혜자라도 하나님의 진리에 도달 할 수 없는 미련한 자에 불과합니다.

❹ 음악, 예술, 과학, 정치학 그와 같은 모든 것들은 한 영역에 속해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영적 분별을 더해 주지는 못합니다.

영적 분별력은 오직 성령에 의해서 소개될 수 있는 영역에 속해 있으며, 그 영역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의 결과로 안내를 받아야 합니다.


5. 하나님의 합당한 요구들(19)

우리가 알았듯이 사도는 여기서 예화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이 의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노예인 것을 보여주기를 계속합니다.

“너희가 전에 죄의 세계에 너희의 지체들을 드린 것같이 이제는 같은 지체를 의의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요점은 그리스도인이 될 때 새로운 지체나 새로운 기능들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① 사람이 회심 전에 가진 재능과 힘과 성향의 문제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천성적인 능력들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과 여전히 같습니다.

❶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새 사람들 일지라도 모두 같아 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성질과 기능을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단지 달라질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을 새로운 방향으로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❷ 그러므로 성도들의 개성이 묵살되어서는 안 됩니다.

❸ 기독교가 만드는 차이란, 그의 능력과 기능과 성질들을 전보다 더 좋고 더 부지런한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전에 비교적 느렸던 사람은 이제 조금 덜 느려질 것입니다.

그는 결코 재빠른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 개인들에게 주셨던 기능과 능력과 지체들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계십니다.

❹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개성을 제멋대로 굴게 해서는 안 되며, 또한 우리의 개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 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가 그것을 옛 생명에 적용하였던 것과 같이 새 생명에도 적용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❺ 그것은 마치 군대에 입대하는 사람이 자신의 모든 능력과 기능과 성질들을 그의 지휘자와 그의 나라를 섬기기 위하여 바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② 두 번째 원리로는 그것이 하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인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옛 생명에서 너희는 너희 지체들을 사용함으로 능동적으로 죄를 지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옛 생명에서 능동적이었던 것같이 새 생명에서도 능동적이 되어라.

너희는 죄 짓는데 수동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저절로 행해졌던 것이 아니라 너희가 그것을 좋아하고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너희는 너희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그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

저희 자신이 이런 일을 해야 한다.

너희는 너희의 기능과 지체와 너희의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무엇을 행하며 우리의 기능들을 사용함으로서 하나의 결과를 내라는 명령이고 권면이며 무르심이라는 것입니다.


③ 이것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어날지 모르는 것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것을 기초한 명령입니다.


④ 네 번째 원리로는 신약의 성화 방식과 방법은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지위와 위치를 깨닫게 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너희다워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으므로 “너희다워라”는 것입니다.


⑤ 사도 바울은 이 요구가 전적으로 이치에 맞는 일이니 우리 앞에 놓인 마땅한 이치에 따라 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과 이루신 모든 일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면 우리의 삶의 방식은 그 이치에 맞는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노예로 순종하는 것은 우리가 전에 죄에 대하여 순종하였던 것보다 훨씬 더 켜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처 :skdmltkfkdwnsla님의 플래닛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 하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