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로운 대목의 서론적 강해(12~2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의 생명 속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구원이 용서의 문제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전체 지위와 입장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다루어지는 주제는 ❶ 원죄의 교리이며 ❷ 창세기 1~3장의 역사성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❸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언약과 계약을 통해서 사람을 다루신다고 가르치는 ‘언약신학’의 차원에서도 가장 중요한 대목입니다.
2. 우리와 아담의 단계(12)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문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때 하나의 문제가 저절로 떠오르게 되는데, 만일 우리 모두가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고 한다면 정확히 말해서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며, 우리는 아담과 어떤 관계에 있으며, 그 안에서 죄를 지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본문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며, 죄는 모든 사람에게 미친 죽음의 원인”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① 히브리서 7장 9~10절에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칠 때에 레위는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담이 죄를 지을 때에 아담의 허리, 즉 아담의 행동에 따라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②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자연적인” 머리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전체 인류의 총수이며 대표로 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나는 너와 언약을 맺음으로 네가 누릴 모든 복락은 너의 자손들에게 미칠 것이고, 네게 임할지 모르는 어떤 심판도 너의 자손들에게 임할 것이다. 네가 행동할 때 단 너 혼자만 행동하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너를 인류의 총수와 대표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므로 네가 하는 것은 네 자손들 모두를 통째로 끌어갈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우리의 연대적 머리요 대표라는 것입니다.[예 : 십계명 가운데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아버지의 죄를 자손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한다.”는 말씀, 기타 성경 가운데서 자주 발견됨]
③ 모든 사람들과 아담의 관계는
❶ 우리는 아담 안에서의 우리의 타락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하여 말하며,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 즉 오실자의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❷ 아담은 인류와 인간성의 머리라고 하는 양편에 다 해당됩니다.
❸ 아담과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있으므로 각자는 언약적 머리입니다.
3.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15)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아담의 허리에 있었습니다.
아담은 우리 모두의 조상이요, 시조로서 모든 민족이 그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아담과의 관계는 육신적인 계통과 육신적인 전승에 기초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육신적인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다시 나지 않고서는 육신적인 혈통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할 수 없습니다.
① 본문에서 “범죄”란 낱말과 “은사”란 낱말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❶ “범죄”는 아담의 범죄이며, 그가 저지른 불순종함으로서 인류가 타락하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❷ 그런 행위의 결과는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함으로서, 범죄와 죄책은 사망을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말은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왔고 사망은 언제나 죄에 대한 심판의 일부분으로서 주어집니다.
❸ 그러므로 사망은 우리가 번 일종의 노임과 같습니다.
❹ “그러나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에서 은사는 “범죄”와 완벽한 대조를 강조하여 값없는 선물로서 우리의 삯과 관계없이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② 그리고 “더욱(더욱더: much more)”이란 말은 모든 것에 더하여 라는 의미입니다.
“더욱”이란 말이 의미하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아담과 우리의 연관은 필연적으로 모두 죽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❶ 이 말은 사망과 생명 사이의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사망은 확실하게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생명만큼 능력이 있지는 못합니다.
❷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불멸의 생명으로 존재하는 영생, 즉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계시는 한 분이 계시는데, 그것이 사망보다 “더욱더” 크다는 것입니다. 만일 사망이 확실하다면 생명은 “더욱더” 확실하여 우리는 더 이상 사망 아래 있지 않는다는 생명의 능력을 체험적으로 “더욱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❸ 그리고 또 다른 의미로서 만일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가져왔다면 그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와 긍휼은 “더욱더”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더 기뻐하는 것입니다.
❹ 구원의 축복이 아담의 타락의 결과로 잃은 것보다 “더욱더” 많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❺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멸망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에게 오히려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죽게까지 하셔서,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더” 크다는 말입니다.
❻ 사망은 끝이며 종말이라서 열매를 내지 못하며, 아무것도 상상해 낼 수 없습니다.
❼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생명으로 인도하여 넘치게 되고 발전하고 번성하고 계속 증가하는 바로 생명의 본질입니다. 그 씨는 충일된 생명으로 이 은혜가 항상 흘러넘칩니다.
③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되었으며, 무죄 상태에 있었고 그는 죄를 짓지 않았으며 그의 본성은 죄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거기엔 그 상태에 부정적인 것이 있는데,
❶ 그것은 범죄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❷ 그리고 그에게 없는 것이 또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④ 그런 면에서 우리는 아담의 신분보다 더 나은 신분으로 옮겨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중의 일원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담에게 부족했던 타락의 가능성이 제거되고 아담이 가지지 못했던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게 되었으니 분명 아담의 신분보다 더 나은 신분으로 옮겨 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한 범죄와 많은 범죄(16~17)
① 이제 본문이 지적하는 “한 범죄”와 “많은 범죄”에 대하여 살펴보면, 한쪽에서는 아담의 한 범죄가 정죄에 이르렀고 다른 쪽에서는 “많은 범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행동에 의해 장악됩니다.
심판은 한 죄의 결과인 아담의 한 죄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진 유죄 선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우리가 다른 쪽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그러므로 한편에선 아담의 불순종이 우리에게 심판을 가져오게 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② 다음에 살펴볼 것은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였나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망은 모든 사람을 이기고 모든 육체를 장악한 정복자로서 왔습니다.
그래서 전 인류는 아담 한사람의 죄의 결과로 사망의 폭군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일생이 매여 종노릇하게 되어, 그들은 언제나 죽음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내세와 죽은 다음과 무덤의 소망을 전혀 가질 수 없으므로 죽음에 대한 공포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영광 안에 있는 생명에 관해 알지 못하며 이 세상의 생명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장 가공할 일은 죽음입니다.
③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할 것이라.”는 말씀은 “사망이 왕 노릇하는 것”의 반대입니다.
이 사실은 참으로 엄청난 차이입니다.
우리 주님의 역사의 결과로 “생명 안에서의 왕 노릇”함으로서 사망이 더 이상 우리 위에 왕 노릇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정복된 죽음 위에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것입니다.
5. 아담의 죄와 그리스도인의 확신(18~19)
로마서 5~6장의 대 주제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한 원리는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개별적으로 우리를 다루시기도 하지만 우리를 연대적으로 또한 한 총체의 한 부분들로 취급하시기도 한다는 겁니다.
아담이 한 일이 그의 백성들을 위해 확실한 결과를 가져왔듯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도 그의 백성들을 위해서 확실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백성으로 속해 있으며 아담이 우리의 연대적 머리였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백성의 연대적인 머리요 대표라는 개념을 붙잡아야 합니다.
바울의 논증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인류를 이러한 연대적인 방식으로 취급하셨다는 것입니다.
①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스런 사람으로 여겨진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인으로 인정되어 죄인의 신분인 옛 신분과 인연은 끊어지고,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된 것입니다.
② 우리는 이제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는 생명과 영생의 세계와 그 영토에 속한 사람입니다.
③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요, 이제 내가 죄지을 때 다시 율법을 거역하여 죄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라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죄수의 행위가 아니라 자녀의 잘못된 행위인 것입니다.
④ 그러므로 우리가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에 관련된 것으로서 진노의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징계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신분입니다.
⑤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실패하고 실수하는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자신을 죄인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6. 율법의 기능(20~21)
사도 바울은 아무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못 박아 두었으며,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했으며, 이제 거기서 더 나아가 12절로 시작하는 문단에서는 율법이 우리를 정죄조차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유대인들이 율법이 의롭게도 하지 못하고 정죄조차 하지 않는다면, 율법은 어떤 효력을 가지고 있으며 율법이 주어진 목적이 무엇이냐고 반문해 올 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답변 하고 있습니다.
그 의문이 떠오른 것은 바울이 13~14절에서 사실상 이 점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악하여 율법이 모세를 통하여 공표되기 전에도 “죄가 세상에 있었으며”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사망이 왕 노릇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류가 맨 처음 정죄함을 받은 것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님이 분명한데, 정죄란 이미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① “가입했다(따라 들어왔다)”는 그 말은 율법은 첨가적인 것으로 하나의 특별한 기능을 위해서 때가 차매 들어온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와 구원의 근본적인 것처럼 근본적이지 않고 그저 들어온 일이요, 첨가되어 따라 들어온 것입니다.
② 율법은 구원의 방도로써 의도된 것이 결코 아니며, 의롭게 되는 것도 불가능하고, 생명을 주는 일에도 불가능합니다. 율법은 범죄를 더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세 가지 방식으로 죄를 증가시킬 목적으로 주어졌습니다.
❶ 율법은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법전화 시켜 죄를 규정하고 죄의 진정한 본질을 깊이대로 이해하고 알도록 도와주며, 무지와 어둠을 재는 척도가 됩니다.
❷ 죄에 대한 자각을 증가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나 지적 정보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그릇됨을 알게 합니다.
❸ 그로 인해 후회하게 합니다. 죄는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반역한 행동입니다.
③ 율법은 언제나 우리를 하나님의 면전으로 데려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경배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거나 그를 위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으며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 의해 모욕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은 자기만족에 빠져있는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지 않았다고 하거나 성자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가 없었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은 없습니다.
④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주어졌으며 우리를 구원할 목적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절망감을 느끼기까지 죄 가운데 있는 우리 자신을 알게 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7. 흘러넘치는 은혜(20~21)
우리는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를 더하게 하려함이라.”는 첫째 진술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거기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합니다.
① 여기서 “넘쳤다.”는 말씀은 “흘러 넘쳤다”는 개념을 전달해 주며, 이 말은 사실 “삼켰다.”는 말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가 죄의 효력을 없애버리는 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삼켜 버리고 훨씬 위로 초월하여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는 훨씬 넉넉하여 죄의 효력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고도 남습니다.
② 21절은 어떻게 해서 “죄가 더 심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하는 것이 진리인가 하는 것을 설명해 줌과 동시에 그것은 로마서 처음부터 이 지점까지의 모든 내용에 대한 결정적인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목적은 죄가 더해짐에 따라 은혜는 더욱더 넘쳐 그 죄를 삼켜버린다는 것입니다.
죄가 어떻든지 또는 죄가 과거에 인류에게 행한 일이 어떻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행한 일은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③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같은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자연법칙”이라 부르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연 안에서 놓으신 법으로서 존재하며, 이 법칙은 너무나도 정확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발명하여 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와 같은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전체적인 목적을 향해 유도되어지며, 그 몸의 일원들이 됩니다.
이 위대한 목표는 그의 무한한 은혜 안에 있으며 우리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리 자신을 개체로 보지 않고 목적과 계획안에서 은혜의 왕 노릇을 보아야 합니다.
④ 은혜는 단지 우리를 돕거나 보조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성취되어집니다.
그것만이 유효적인 우리의 구원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은혜의 힘이란 찾는 것과 살리는 것과 중생시키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지하는 힘”입니다.
은혜의 제지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심하기 전까지도 그들 가운데 나타나는데 그들이 구원이 불가할 정도로까지 자신들을 내버려 두지 못하도록 합니다.
또한 성령을 훼방하도록 절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제하는 은혜의 능력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도 필요합니다.
그가 유혹에 둘러싸여 있게 될 때 또 그 마음 가운데서부터 나오는 시험 등에서 필요합니다.
⑤ 그리고 우리의 불멸의 영혼을 상하게 하고 위태롭게 할 것들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 그 은혜의 능력에 대해 감사합시다.
⑥ 또한 성도를 성화하는데 역사하시는 은혜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육체 안에 거하고 있는 죄에 대항하여 나타나는 은혜의 능력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귀의 세력을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또한 우리를 깨끗이 할 수 있는데 그 능력만이 우리의 정결을 지킬 수 있습니다.
⑦ 죄는 언제나 빼앗아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건강, 행복,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것들을 빼앗아 갑니다. 그러나 은혜는 나누어 주는데 특징이 있습니다.
미약하고 보잘 것 없이 주는 것이란 도무지 찾아 볼 수 없이 국왕답게 흘러넘치도록 주시는데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받지 못하고 있거나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면 그것은 우리의 수치입니다.
⑧ 그리고 은혜의 왕 노릇은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서 우리에게 지시하신 어떤 특정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행할 수가 있습니다.
은혜의 보호하심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잘 할 수가 있는데, 그것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피곤하고, 안 되고, 슬픔과 절망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⑨ 은혜의 승리로 인하여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시고, 영광스러운 완성 가운데서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이렇듯 은혜의 통치는 우리를 점도 티도 흠도 없이 될 최종적인 완성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백성들인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실 것과 우리가 그와 함께 있음으로 인하여 그것이 영광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를 확실히 인도해 가실 영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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