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로마서강해

롬4:9-17 [로이드존스-로마서 강해]

새벽지기1 2016. 3. 9. 06:25

4장 9~17절 : 13-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 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17-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 오직 믿음(9~17)

사도 바울은 이미 1절과 5절에서 유대인들이 행위가 구원의 일익을 담당해야 한다는 반론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이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과 시편 32편이 역시 이 교리를 어떻게 뒷받침하고 있는가를 계속 증명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대목에서 바울은 두 가지의 더 심각한 반대를 대처하고 있는데, 첫 번째 반대는 9~12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행위가 그렇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필수적인 것이긴 하다는 주장을 논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13~16절까지로서, 거기서 그는 똑같은 방식으로 유대인들처럼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이 아브라함을 받는 데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은 할례받기 전까지만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실 동안에도 해당된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참으로 완강하며 교활한 불신앙의 특징은 그들의 주장이 꺾이게 되면 또 다른 주장이 즉시 고개를 쳐든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언제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구원에 합당한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공격하며, 인간 측에서 아무런 할 일이 없다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며, 자신에게 어떠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주장합니다.

그리고 구원이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라는 교리를 듣고 분개합니다.

① 구약적 지식이 없이는 신약의 논증, 특히 바울 서신의 논증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② 그래서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할례를 받았을 때가 아니라, 무할례 가운데서 라는 것은 이 논증의 가장 핵심적인 사안입니다.

  ❶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는 14년 전에 받았던 칭의에 대한 보증, 즉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라”(요6:27; 엡1:13~14)는 뜻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의가 전가 된 것이 진짜임을 보증하는 표로서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것입니다.(11절)

  ❷ 아브라함 이전에도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표적인 사람들은 아벨과 에녹, 노아와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시는 방법을 뚜렷하고 노골적으로 확증시킨 최초의 경우는 아브라함에게서 이었습니다.

전에는 그것이 법률적인 방식으로서는 선언되지 않았습니다.

③ 12절에서 바울 사도는 아브라함이 역시 할례에 속한 자들 중에서 믿는 사람들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과 같이 무할례자들 중에서도 동일한 신앙을 가진 믿음의 동행자들의 조상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④ 13절의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의 역사 가운데 있었던 진술입니다.

  ❶ “약속”이란 의미는 창15:7에 확실히 나타나 있는데, 그것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곳은 창22:16~18로써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하신 말씀으로 사도바울이 18절에서 말한 약속이 이 약속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❷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포착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이 약속이 율법이 모세에게 주어지기 430년 전이라는 것입니다.(갈3:17 참조)

  ❸ 그리고 “후손”이라는 말은 갈3:16에 우리를 위해 이 말에 대한 정의를 내려놓았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또한 이 말씀에서 창17:7,8과 같은 구절에 대한 참된 의미와 이해를 얻게 됩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너의 우거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일경으로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말씀 또한 긍국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으로서, 그리스도는 “후손”이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써만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후손”이란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⑤ 우리가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를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하고, 그럼으로써 약속에 따라 상속인이 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팔레스틴 땅에만 국한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것은 엡2:12,13과 엡3:5,6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2. 전능자의 은혜로 보증된 구원(13~17)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바울의 세 번째 논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의 신앙에 대항하여 반대하며,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율법에 대한 구약의 교훈을 묵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그들의 반응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 특별한 문제점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맺어진 약속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① 13절에 그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맺어진 것은 율법의 중개를 통해서가 아니고 믿음의 의를 통해서라는 명확한 진술이 있는데, 그 역사는 아브라함의 사적을 다룬 창세기의 여러 장들 가운데서 발견됩니다.

  ❶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했을 때 어떤 의미로든 율법을 염두에 두고 언약을 맺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순전히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며, 그것은 순전한 은혜이며 순수한 약속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❷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행하고 행치 않아야 할 것에 관한 특별한 조건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적으로 언약의 문제로 다루었습니다.

  ❸ 언약이 하나님의 의해 아브라함에게 맺어진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율법은 430년 후에야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② 사도 바울은 14,15절에서 율법 자체의 본질에 근거하여 또 다른 주장을 합니다.

  ❶ 만일 그 약속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맺어진 것이라면, 믿음이 발붙일 틈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어떤 일은 명하고 다른 일은 금함으로서, 항상 우리의 행위와 행동과 품행과 소행 등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을 내세우는 순간 우리는 행위로 되돌아가는 것이며, 믿음은 전혀 소용없는 것이 됩니다.

  ❷ 만일 율법을 내세우면 “그 언약 역시 쓸모없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율법을 지키는 조건으로 언약을 맺으셨다면 그것은 즉각적이고 자동적으로 그 언약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❸ 율법은 언제나 진노를 이루는 것이며, 진노는 축복의 약속과 정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진노는 심판을 의미하며, 약속은 기업과 생명과 기쁨과 영광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언약이 율법의 중보를 통해서 맺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하고 우리들 모두를 할 말이 없게 만들고 절망하게 하며, 우리 모두를 정죄합니다.

그러므로 언약이 율법의 중보를 통해서였다면 단 한 사람도 유익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③ 언약은 율법의 중보를 통해서 오지 않았음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13~15절에서 표현했으며, 사도 바울은 이제 16,17절에서는 긍정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들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함이니라.”

  ❶ 행위와 은혜는 서로 반대되는 말로서 서로 혼합시킬 수 없으며, 만일 행위를 은혜의 체제 속으로 끌어넣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행위가 아니며, 그것은 별개의 것으로 결코 이 둘이 함께 취급될 수 없습니다.

  ❷ 율법 아래 에서는 언제나 행위와 공로의 문제로서 그것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게 되지만, 은혜는 전적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서 어떤 공로도 요구도 달라고 소리하는 것도 전혀 없습니다.

  ❸ 믿음의 길만이 전적으로 은혜로 이끌어 주며, 그러므로 모든 영광이 하나님과 주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증합니다. 구원에 있어서 영광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므로, 만일 믿음 외에 어떤 것을 끌어 들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깎아 내리는 것이 됩니다.

  ❹ 구원이 믿음으로 되어야 하는 이유는 믿음이 은혜가 역사하는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께서 홀로 영광을 받으시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④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완전하였을 때 실수하였고 타락하였는데, 아담은 죄로부터 자유로웠으며,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을 어떤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산 안에서 조차, 그의 성품 안에 죄가 없는 조건에서 조차 타락하였다면, 죄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이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속해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⑤ 전능하신 분외에는 성도의 견인을 보충할 자가 없으며, 그분 외에는 우리를 궁극적인 구원과 영화에 이르게 할 자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교활한 죄인이라도 소망이 있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계획하시고 목회하신 바를 결단코 이루십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것이며,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가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 약속은 모든 후손에게 확실한 것입니다.

출처 :skdmltkfkdwnsla님의 플래닛입니다. 원문보기 글쓴이 : 하영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