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박형호의 포토에세이 182

실안의 바다

삼천포 서편에 실안마을이 있다. 마을 앞바다는 작은 섬들이 놓여있고 섬들 사이에는 죽방렴과 등대가 소담스럽게 앉아 있는 곳이다. 계획된 것은 아닐진대 그 구도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어떤 그림에서 이런 자연스럽고 멋스럼을 발견 할 수 있을까? 지금은 개발이 되어 마을 옆으로 4차선 도로가 지나가고 인근에 큰 다리가 놓여 관광지로 변해버렸지만 예전에는 그야말로 순수한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죽방렴에서 갓 건져온 물고기로 회를 떠서 허름한 집 마루에 앉아 먹고가는 시골 횟집의 정겨움도 있었고 방금 건져온 미역을 말리는 자연스러운 일상도 있었다. 그러한 순수한 예전의 모습은 많이 없어졌지만 바다의 정취는 예전 그대로의 느낌이 많이 난다. 죽방렴에서 물고기를 건져올리는 모습도 간혹 볼 수 있고 섬들의 형태도 ..

비가 내린다. 선천적 성격인지 후천적 심성인지는 잘 모르지만 언제부턴가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하고 있었다. 촉촉이 땅이라도 젖게 되면 우산 하나 받쳐 들고 이 동네 저 동네를 헤매어 걷기도 하고, 고요한 절 숲을 서성거려 보기도 한다. 비 냄새.... 뭐라고 단정지을 수 없지만 낙엽 부스러기나 젖은 땅의 독특한 냄새는 사람의 마음을 끌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짙으면서도 표현하기 힘든 특유의 냄새, 진한 커피의 향과 다른 듯 다르지 않는 냄새, 그 냄새에 잔뜩 취한 기분은 딱히 뭐라고 결정지어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냥 싸늘한 가을날 혀에 감기는 신선한 예가체프 한잔의 느낌이라 하자. 그렇게 비의 느낌들은 나를 부르고 길을 따라 나서게 한다. 물기를 가득 담은 공기는 안개라는 포장지로 세상의 풍경을 무채색..

물건리의 아침

물건리의 아침 바람이 분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이지만 오늘만큼은 매섭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봄이 오고 있는 걸까? 올려다본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하고 언제 이런 별들을 보았던 것인지 그 기억이 아득하다. 해무가 많은 남해바다이나 오늘은 보기 드물게 쾌청하다. 방파제 꼬리를 길게 드리우고 외로움을 달래듯 마주 보는 등대의 불빛이 빨갛게 파랗게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한다. 그 얘기가 궁금한 듯 하늘의 별빛도 귀 기울이며 한참을 내려다보다 동편 하늘이 밝아오자 슬그머니 꽁무니를 내뺀다. 멀리 작은 섬 뒤편으로 붉은 기운이 심상치 않다고 느끼는 순간 태양이 쑤욱하고 머리를 내민다. 갑자기 눈앞이 하얘지며 앞이 보이지 않는다. 붉은 태양이라 표현하기에 너무 맑아 눈을 뜰 수 없다. 경쾌한 셔터 ..

납매

납매 일월의 차가운 겨울밤을 사랑으로 안고 태어났습니다. 작은 꽃잎에 얇은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왔답니다. 엄동설한에 어떻게 하려는지 궁리는 하였을까요? 이 추위에 벌도 나비도 보이지 않는데 암술, 수술 알콩달콩 신방은 어떻게 꾸밀는지 걱정입니다. 그렇지만 꽃에서 나는 향기는 차가운 공기와 어우러져 참 신선하고 맑게 다가옵니다. 눈이 내려 꽃잎 위에 눈을 한가득 뒤집어 쓰기도 매서운 한파에 꽃이 얼기도 합니다. 그래도 무슨 상관이냐는 듯 계속 꽃을 피워냅니다. 사람은 추우면 춥다, 더우면 덥다 호들갑 떨며 가만있지 못합니다. 그러려니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꽃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잠시 듭니다. 납매! 추운 겨울날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도 묵묵히 그저 ..

안개

안개 이런 맛에 새벽을 나서나 보다. 자는 둥 마는 둥 아파트 베란다를 똥 마른 강아지 마냥 왔다 갔다 하며 내려다본다. 짙게 깔린 창밖의 안개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오늘은 이 안개가 어떤 그림을 만들어 낼까? 잠을 잘 수 없어 기어이 카메라를 챙겨 나선다. 눈앞은 온통 희뿌연 안개로 뒤덮여 운전하기가 쉽지 않다. 자동차의 전조등 불빛에 비치는 안개의 너울춤을 뚫고 도착한 곳은 우포...... 길가의 나뭇가지가 안개에 휩싸여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안개가 전신을 휘감고 지나갈 때면 신선의 세계인 듯 착각에 빠진다. 징검다리를 건너 풀 숲에 들어서면 태고의 신비라는 말이 꼭 들어맞다는 느낌이다. 발을 디디기가 망설여진다. 눈앞에 펼쳐진 신비스러운 자연이 더럽혀질까 한참 동안 발을 뗄 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