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7 14

십계명 ‘너머’(막 10:17-22) / 정용섭목사

창조절 7주, 2024년 10월 13일  영생에 관한 질문 어떤 사람이 예수께 와서 무릎을 꿇고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한 선생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사람은 자기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를 말하지 않고 처음부터 다짜고짜 질문했습니다. 무례해 보입니다. 실제로는 인사를 했으나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그런 내용은 필요 없으니까 생략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로 바리새인들처럼 꼬투리를 잡으려고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오늘 본문에 나온 이 사람처럼 정말 진리를 알고 싶어서 질문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질문한 ‘영생’(eternal life)은 신약성경의 핵심 주제입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보도하는 요 3장은 이 영생에 관해서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 “..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시편135:5-7) / 이금환목사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께서는 위대하시며 우리 주는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시도다 여호와께서 그가 기뻐하시는 모든 일을 천지와 바다와 모든 깊은 데서 다 행하셨도다. 안개를 땅 끝에서 일으키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그 곳간에서 내시는도다"(시편135:5-7) 여호와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하시며, 참으로 모든 산들보다 위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에서도, 바다에서도, 아주 깊은데서도 다 행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안개를 일으키시며, 번개를 만드시며, 바람을 내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위대하시고, 위대하시며, 하나님은 참으로 놀랍고 놀라우시며, 하나님은 참으로 세상의 누구와도,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종교개혁 494주년(23) / 정용섭목사

이같은 일에는 율법을 그 자체의 한계 안에 머물도록 조절하시는 지혜롭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요청된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되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자신들이 의로워질 수 있다고 상상하도록 가르치면, 나는 능동적인 의와 수동적인 의를 혼동하는 것이 되고 율법의 한계를 넘어 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합당한 구별을 할 줄 모르고 부족한 변증을 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옛 사람 너머로 가면 율법 너머로 가게 된다. 왜냐하면 육체, 옛 사람, 율법, 공로는 모두 한데 묶여 있기 때문이다. 같은 모양으로, 영적인 사람 혹은 새 사람은 약속과 은혜에 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충분히 뉘우치고 율법에 의하여 압박을 받고 죄에 의하여 공포에 떨고 위로에 목말라하는 사람을 보..

종교개혁 494주년(22) / 정용섭목사

그러므로 고통 받고 있는 양심은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은총의 약속, 즉 이 믿음의 의, 이 수동적 의, 또는 기독교적 의 밖에서는 절망과 영원한 사망에서 고침을 받을 수 없다.  기독교적 의는 확신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능동적 의를 찾아 헤매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하고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설사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고 수행한다 해도 그것을 기초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이를 신뢰하거나 그 앞에 설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능동적 의, 내 모든 의, 또는 율법의 의 너머에 나 자신을 둔다. 그리고 은혜와 자비의 의, 그리고 죄 사함의 피동적 의만을 붙든다.”  다시 말하면 이 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도 아니며, 우리가 수행하는 의도 아니며, 밖으로부터 받는, 예..

종교개혁 494주년(21) / 정용섭목사

그러나 양심이 공포에 떨고 죽음으로 두려워할 때에는 우리 자신의 공적, 가치, 그리고 율법 외에 아무 것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곧 인간의 약함이요 비극이다.  율법이 우리의 죄를 보여줄 때 즉시 우리의 과거 생활이 우리 마음에 떠오른다. 그럴 때 죄인은 그 마음에 큰 괴로움을 안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나는 얼마나 저주스럽게 살았는가? 내가 좀더 오래 살 수만 있다면 내 생활을 고칠 수 있을 텐데!”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은 능동적 의, 즉 자기 의를 쳐다보는 일은 그만 두지 못한다. 수동적 의, 즉 기독교적 의에 그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단순히 능동적 의에 머문다. 이 악은 우리 속에 매우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불행한 습관을 매우 온전하게 습득하고 있다.  사탄은 우리의 약..

종교개혁 494주년(20) / 정용섭목사

이것들 위에, 참으로 이 모든 것들 위에, 믿음의 의, 혹은 기독교적인 의가 있다. 이 의(義)는 다른 모든 의로부터 철저히, 그리고 주의 깊게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외냐하면 위에 말한 의들은 이 의에 반대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황제의 법들, 교황의 법들, 그리고 계명들에게서 나온 것들이기 때문이며, 우리의 행위로 구성된 것들이며, 스콜라주의자들이 가르치듯이 ‘순전히 자연적 재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이며, 은사로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공로에 의한 의도 하나님의 선물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공로 없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인정하시는 이 가장 놀라운 의, 곧 믿음의 의는 정치적인 의도 아니며 의식적인 의도 ..

종교개혁 494주년(19) / 정용섭목사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바울이 이 서신에서 당면 과제로 삼고 있는 논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논점은 이런 것이다. 즉 바울은 신앙, 은총, 죄사함, 또는 기독교적 의에 관한 교리를 세우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로 기독교적 의와 다른 모든 종류의 의에 관한 온전한 지식을 가지게 하고, 그 다른 점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의들이 있다. 먼저 정치적인 의(義)가 있다. 이것은 세상의 황제들, 군주들, 철학자들, 그리고 법관들이 생각하는 의이다. 또 의식(儀式)적인 의가 있다. 인간의 전통, 예를 들면 교황의 전통들이나 그 밖의 전통들이 가르치는 의이다. 부모나 교사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이 의를 가르칠지 모른다. 그들은 거기에 죄의 대가를 치르는 일, 하나님의 분노를 진정시키는 일, 은혜..

하나님의 비밀을 위한 ‘매임’(골로새서 4:2-4) / 원용일목사

하나님의 비밀을 위한 ‘매임’(골로새서 4:2-4)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매임”의 상태를 경험합니다. 골로새서를 쓸 때 바울은 감옥에 갇히는 매임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관심은 매임에서 놓이는 석방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비밀”에 있었습니다. 이 비밀은 골로새서 여러 곳에서 이미 바울이 강조해 온 복음의 핵심입니다. 비밀은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 비밀을 밝히는 전도의 문..

우리가 찾는 나라 (이사야서 16장) / 김영봉목사

해설:이사야는 15장에서 시작한 모압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계속 이어간다. 개역개정에서 “너희는”(1절)이라고 번역했는데 새번역은 “모압 백성아”라고 의역한다. 멸망의 위기를 당한 모압(2절)이 살 길은 유다의 그늘 아래에 들어가는 것 밖에 없다. 다윗 시대에 유다의 속국이 되어 보호 받았던 것처럼, 그들은 유다에게 자신들을 받아 주고 보호해 달라고 간청해야 한다(3-4절). 그 때가 되면 “다윗 가문에서 왕이 나와 신실과 사랑으로 그 백성을 다스릴 것”(5절)이기 떄문이다.  하지만 유다는 모압의 교만을 강하게 칠책하며 원조를 거부한다(6절). 6절의 표현은 그들의 교만이 극대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길하레셋의 건포도빵”(7절)과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원”(8절)은 모압의 자랑이었다. ..

비천한 자가 소망이다.(왕하 25:8-30) / 신동식목사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19년에 부하 느부라사단이 예루살렘을 초토화 시킵니다. 예루살렘의 권력자들이 죽음을 당하고 그들의 재산이 모두 몰수됩니다. 살아남은 자들과 바벨론에 항복한 자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잡아 갑니다. 한때 호가호위하던 이들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합니다.성전 제사를 위하여 준비되었던 기구들도 모두 바벨론으로 가져갑니다. 성전을 지켰던 이들은 모두 잡아가서 바벨론 왕 앞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오직 예루살렘에 남은 사람들은 비천한 자들입니다. 평범한 이들이 예루살렘에 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은 위대합니다. 이들이 남아서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까지 과수원을 지킵니다(12절). 비천한 자들이 이스라엘의 소망입니다. 남은 자가 다시 일으킵니다.느부갓네살이 그달리야를 이스라엘을 관리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