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6 16

하루하루가 신비입니다.

하루하루가 신비입니다. 살아있음이 신비이고 구속의 은혜도 신비입니다. 들숨과 날숨이 신비이고 세월을 느낌도 신비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다함없는 은혜입니다. 돌아보니 저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해석되기에 그 은혜를 사모하게 됩니다. 이러한 은혜를 함께  누리며 나눌 수 있음은 하나님께서 저의 믿음의  여정 가운데 베푸신 은총입니다. 믿음의 여정을 돌아보니 하나님께서 놀라운 섭리 가운데 저에게 생명을 주셨고 때가 되어 구속의 은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또한 믿음의 여정 가운데 믿음의 멘토과 믿음의 동역자 그리고 믿음의 도반들을  허락하심이 어찌 그리 감사한지요! 또한 믿음의 변곡점을 구할 때 장충교회로 인도하시고 좋은 목사님의 지도를 받게 하시고, 귀한 지체들을 만나게 하시고, 믿음의 훈련을 ..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삼상9:1-17) / 리민수목사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삼상9:1-17) 본문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택정하신 사울이 사무엘을 만날 수 있도록 아비의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나서게 섭리하신데 이어, 또 다시 섭리하시는 장면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사무엘을 찾아오기 전날에 이미 그가 찾아오리라는 것과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블레렛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는 것을 알린다(15-16절).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우실 뿐만 아니라, 그 계획의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 일일이 간섭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신10:20) / 이금환목사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신명기10:20)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은 굉장히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경 전체를 요약해 주는 것 같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제시하는 말씀과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라!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라!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하라! 왜 우리는 그렇게 해야할까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신명기10:17) 우리가 경외하고, 우리가 섬기고, 우리가 의지하..

카테고리 없음 2024.10.16

종교개혁 494주년(18) / 정용섭목사

당분간 마틴 루터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겠소. 내용은 (김선회 역, 루터신학대학교 출판부)에 있는 것이오. 오늘은 그 책의 ‘강의를 시작하며’ 대목이고, 내일부터는 ‘갈라디아에 보낸 바울 서신의 논점’ 대목이오. 이 책은 2권으로 되어 있는데, 한 권이 670 여 쪽이나 되는 방대한 내용이오. 루터는 1531년과 1535년에 갈라디아서를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강의했소. 물론 그 이전에도 갈라디아서를 몇 번에 걸쳐서 강의한 바도 있소. 루터의 생생한 강의를 느껴보기 바라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갈라디아에 보낸 바울의 서신을 강의하기로 작정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은 이미 여러분에게 잘 알려져 있으므로 새로운 내용이나 알려지지 않은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자주 ..

종교개혁 494주년(17) / 정용섭목사

로마가톨릭교회는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이지만 신학생 배출도 교구 차원에서 처리하오. 신학교를 키우기 위해서 신학생을 많이 뽑지도 않고 자격이 없는 학생들을 뽑지도 않소. 자신들의 수급 상황에 걸맞게 뽑아서 철저하게 훈련을 시키오. 수준 미달 신학생 문제는 개신교회에서 큰 문제요. 지방 신학교는 정원이 미달되는 경우가 꽤나 되오. 정원을 채우기 위해서 학력 수준이 턱없이 떨어지거나 신앙적인 준비가 안 된 학생들도 받아들이고 있소.  요즘은 고령자 선발이라는 제도가 있는 것 같소. 나이가 많이 든 분들이 수능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제도요. 지적 능력을 반드시 수능점수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기준은 되오. 인격이나 신앙도 마찬가지요. 어떤 신학생들은 공부에 아예 관심이 없소. 갈 대학이 없어서, 또는 ..

종교개혁 494주년(16) / 정용섭목사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신학교 문제를 좀더 말하겠소. 한국교회 문제는 신학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지금 신학교가 너무 많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소. 수요가 없는 상태에서 공급만 늘어났소. 앞으로 교인 수는 더 줄어들 텐데, 신학생 배출은 더 늘어나게 되어 있소. 어떻게 해야 하오? 일단 신학생 숫자를 줄여야 하오. 반쯤을 줄여도 괜찮소. 줄이지 못하는 이유가 매우 인간적이고, 세속적이오. 재정 축소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첫째 이유요. 이게 얼마나 코미디 같은 주장이겠소. 소위 하나님의 전문적인 일꾼을 키워야 하는 신학교 문제를 재정 수급의 차원에서 다루다니 말이오.  겉으로는 앞으로 통일 이후 북한 지역에 필요한 목사를 미리 양성하는 것이라는 말도 하긴 하오. 그것은 핑계요. 신학생 ..

종교개혁 494주년(15) / 정용섭목사

신학적 성경공부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소. 신학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지 평신도는 은혜를 받기만 하면 된다고 말이오. 큰 착각이오. 목사가 되려면 물론 신학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오. 모든 신학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의 신학교에 신학이 사실상 없소. 신학적 사유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오. 신학교를 졸업해도 평신도와 다를 게 없소. 단지 성경의 정보를 좀더 안다는 것 말고는 없소. 신학 능력보다는 은혜가 많아야 한다는 선입견이 한국교회 전체를 압도하고 있어서 이런 불행한 일이 벌어지오.  신학교를 졸업해도 종말론이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역사관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오. 종말론과 헤겔의 역사철학을 비교해서 설명할 줄 모르오. 마르크스의 역사관이 종말론의 세속화라는 맥락을 파악하..

종교개혁 494주년(14) / 정용섭목사

루터는 원래 종교개혁을 의도한 게 아니었소. 그는 성당의 사제요, 신학교 교수였소. 미사를 집전하고 신학생들을 가르쳤을 뿐이오.  그의 눈에 로마가톨릭의 문제점이 뜨이게 된 동기는 성경연구였소.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니까 로마가톨릭의 오류가 무엇인지 눈에 들어온 것이오.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가장 바른 길은 성경에 대한 바른 공부요. 성경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아는 공부 말이오. 그것은 신학적 사유가 아니면 안 되오. 성경은 어떤 점에서 닫힌 책이오.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신학적인 훈련이 필요하오. 예컨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사건에 대한 보도를 읽는다고 생각해보시오. 다른 건 접어두고, 창조 사건이 무(無)로부터의 창조라는 사실을 본문만 읽어서는 눈에 들..

모압에 대한 심판 (이사야서 15장) / 김영봉목사

해설:15장과 16장은 모압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다. 모압은 지금의 요르단 지역에 있었던 국가로서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대치했다. 창세기 19장 30-38절에 의하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한 후, 롯의 큰 딸이 아버지와 동침하여 얻은 아들의 이름이 모압이고, 그의 자손들이 퍼져서 모압 민족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모압 땅을 거쳐 가야 했는데, 모압 왕은 여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의 진로를 방해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국가로 자라가는 과정에서도 모압은 여러 차례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모압은 다윗 왕에 의해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었다가 여호람 치하에서 유다가 쇠락하자 독립했다. 그 이후로 모압은 주변 나라들과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곤 했다.  “알”..

모두를 죽게 하는 길, 모두를 살리는 길 (이사야서 14장) / 김영봉목사

해설:14장에는 네 개의 독립적인 예언들이 묶여 있는데, 시대적 배경이 각각 다르다. 다른 곳에서도 그렇지만, 여기서도 전기 예언과 후기 예언이 뒤섞여 있다.  1-2절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다.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 당한 후에 제국의 여러 지역으로 흩뿌려졌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회복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을 다스릴 정도로 강해질 것이다.  3절부터 23절까지는 “아침의 아들, 새벽별”(12절)이라고 불렸던 어떤 왕의 죽음에 대한 예언이다. 학자들은 이 왕이 누구인지에 대해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 왕의 행태에 대한 묘사를 보면 앗시리아의 산헤립 왕, 사르곤 왕 혹은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