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모두를 죽게 하는 길, 모두를 살리는 길 (이사야서 14장)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10. 16. 06:23

해설:

14장에는 네 개의 독립적인 예언들이 묶여 있는데, 시대적 배경이 각각 다르다. 다른 곳에서도 그렇지만, 여기서도 전기 예언과 후기 예언이 뒤섞여 있다. 

 

1-2절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다.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 당한 후에 제국의 여러 지역으로 흩뿌려졌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회복된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을 다스릴 정도로 강해질 것이다. 

 

3절부터 23절까지는 “아침의 아들, 새벽별”(12절)이라고 불렸던 어떤 왕의 죽음에 대한 예언이다. 학자들은 이 왕이 누구인지에 대해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이 왕의 행태에 대한 묘사를 보면 앗시리아의 산헤립 왕, 사르곤 왕 혹은 바빌로니아의 느브갓네살 왕을 생각하게 된다. 

 

이 왕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예언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모든 권력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바빌론을 진노의 몽둥이로 사용하여 여러 민족들을 심판하신 후에 바빌론을 심판하신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손을 펼치시자 영원할 것 같던 절대권력은 한 순간에 땅에 떨어지고 만다. 그 왕의 폭정에 눌려 있던 사람들은 그의 갑작스러운 몰락에 놀라고 또한 기뻐한다. 그 왕은 죽어서 음부의 세계로 떨어질 것이며, 그곳에서 그처럼 절대 권력을 누리다가 떨어진 수 많은 권력자들과 함께 참담한 운명을 당하게 될 것이다.

 

24절부터 27절까지는 앗시리아에 대한 심판의 예언이다. 이사야가 이 예언을 전할 때 바빌론은 강국으로 부상하지 않았고 앗시리아가 호령할 때다. 무서운 기세로 주변 민족들을 점령해 가던 앗시리아도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오면 역사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예언이다. 

 

28절부터 32절까지는 불레셋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이 예언은 아하스 왕이 죽던 해(주전 712년 경)에 받은 예언이다. “너를 치던 몽둥이”(29절)는 불레셋을 위협했던 아하스 왕을 가리킨다. 아하스 왕이 죽고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르자 불레셋은 사절단을 보내어 화친을 청했다. 하지만 아하스가 “뱀”이었다면 히스기야는 “독사”가 될 것이다. 불레셋은 팔레스타인과 이집트를 잇는 통로에 있었기에 열강들의 갈등에 자주 말려 들어갔다.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다와 동맹하려 했으나 히스기야는 그 제안을 거절한다.

 

묵상: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하면, 권력이 커지면 인간은 자신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해도 된다고 착각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 분석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년 전에 어느 유명인이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이 유명해지면 아무 일이든 해도 돼요. 심지어 지나가는 여성의 치부를 만져도 상관 없어요.”

 

영국의 사상가 액튼 경은 “권력은 타락하는 경향이 있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타락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의 죄성의 뿌리는 “권력에의 의지”이기 떄문입니다. “아침의 아들, 새벽별”(12절)이라고 불렸던 그 왕이 늘 장담하던 말, 즉 “내가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겠다. 하나님의 별들보다 더 높은 곳에 나의 보좌를 두고, 저 멀리 북쪽 끝에 있는 산 위에, 신들이 모여 있는 그 산 위에 자리잡고 앉겠다. 내가 저 구름 위에 올라가서, 가장 높으신 분과 같아지겠다”(13-14절)는 말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권력에의 의지에서 나옵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교만”이며,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짓게 되는 “일곱 가지 큰 죄” 중에서 교만을 첫번째로 꼽았습니다. 

 

이것은 권력자나 갑부나 유명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권력에의 의지가 있기 때문에 권력을 추구하고 작은 권력이라도 손에 쥐면 그 권력을 부리고 싶어합니다. 권력은 자신의 존재감을 가장 강하게 확인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부리는 것만큼 짜릿한 쾌감을 안겨 주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곁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 받고 그 자신도 쾌락 속에서 스스로를 나락으로 밀어 넣습니다. 권력욕을 따라 사는 것은 모두를 죽게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모두를 살리는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분은 몸소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낮아지고 약해져서 섬기는 길입니다. 권력에의 의지를 내려 놓고 섬김에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결국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십자가는 온 세상을 살리는 능력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믿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빌 2:5)을 품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 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