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우리가 찾는 나라 (이사야서 16장)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10. 17. 06:00

해설:

이사야는 15장에서 시작한 모압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계속 이어간다. 개역개정에서 “너희는”(1절)이라고 번역했는데 새번역은 “모압 백성아”라고 의역한다. 멸망의 위기를 당한 모압(2절)이 살 길은 유다의 그늘 아래에 들어가는 것 밖에 없다. 다윗 시대에 유다의 속국이 되어 보호 받았던 것처럼, 그들은 유다에게 자신들을 받아 주고 보호해 달라고 간청해야 한다(3-4절). 그 때가 되면 “다윗 가문에서 왕이 나와 신실과 사랑으로 그 백성을 다스릴 것”(5절)이기 떄문이다. 

 

하지만 유다는 모압의 교만을 강하게 칠책하며 원조를 거부한다(6절). 6절의 표현은 그들의 교만이 극대치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길하레셋의 건포도빵”(7절)과 “헤스본의 밭과 십마의 포도원”(8절)은 모압의 자랑이었다. 이제 포도원은 폐허가 되고, 포도나무는 말라 비틀어지고, 포도원에서 흘러나오던 노랫소리가 그칠 것이다(9-10절). 여기서 “포도원”은 모압 전체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었다. 이제 모압의 교만이 꺾일 것이라는 뜻이다.

 

이 지점에서 이사야는 또 다시 심한 고통을 느낀다. 모압이 당할 재앙을 상상하니 그의 “심장이 수금 줄이 튀듯 떨리고” “창자가 뒤틀리는”(11절) 아파왔다. 그 때를 당하면 그들이 산당에 가서 치성을 드려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기 떄문이다(12절). 

 

이사야가 이 예언을 받았으나 수년이 지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13절), 그는 여러 해 후에 수년 모압에 대한 예언을 다시 받는다. 그 때 하나님은, 삼년 안에 그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알려 주신다. 다만, 완전히 멸절되는 것이 아니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하게 될 것이다(14절). 

 

묵상:

모압에 대한 심판 예언 중에 유다의 미래에 대한 짤막한 예언이 나옵니다(4-5절). 모압이 유다의 통치 하에 들어가려는 이유는 유다의 군사력이나 경제력 때문이 아닙니다. 당시의 유다 역시 심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유다가 희망이 될 수 이는 이유는 장차 “다윗의 가문에서 왕이 나와 신실과 사랑으로 그 백성을 다스릴 것”(5절)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되면 그 땅에서 “폭력이 사라지고, 파괴가 그치고, 압제자들이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출 것”(4절)이며, “옳은 일이면 지체하지 않고 하고,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 줄 것”(5절)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유다의 속국이 되어 보호 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실과 사랑이 다스리는 나라, 폭력이 사라지고, 파괴가 그치고, 압제자들이 없는 나라, 공의와 정의가 자리잡은 나라로 피하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유다는 그런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런 나라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런 나라에 살려면, 자신이 선 땅에 신실과 사랑, 정의와 공의, 진실과 자비가 넘쳐 흐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 때문에 그 이상향의 나라는 항상 저 멀리 존재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그 나라에 가까워지도록 서로 힘을 합하여 노력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 이상향의 나라는 결국 오고야 맙니다. “다윗의 가문에서 나올 왕”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성을 치유해 주셔서 이상향의 나라를 경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오실 때 모든 것이 새롭게 되어 완전한 평화와 정의와 사랑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빌론의 멸망에 대해 예언하면서 “그 때가 다가오고 있다. 그 날은 절대로 연기되지 않는다”(13:22)고 하셨는데, 새 하늘 새 땅이 임하는 그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날은 절대로 연기되지 않습니다. 그 날을 소망하고 기다리며 오늘 이 땅에 그 나라와 닮은 세상을 이루기 위해 힘쓰는 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소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