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슈

광화문 종교 / 최주훈 목사 (중앙루터교회)

새벽지기1 2023. 5. 13. 21:37

우리는 지금 언어 문화 국경을 넘나드는, 말 그대로 ‘지구 동네’ 시대를 살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노아의 홍수 대신 정보의 홍수를 걱정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실이 달리려고 신발 끈을 매는 순간 거짓은 지구를 반 바퀴를 달려간다. 이것이 우리 현실이다.

정보량이 급증하고 세상이 빨라질수록 기계 대신 얼굴을 맞대고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사람, 신뢰할 만한 공간이 더 절실해진다. 신뢰할 사람과 신뢰할 공동체, 안전한 환경과 접촉하지 않으면 우리는 각자 입맛에 맞는 선전 선동과 이야기에 매몰되고 폐쇄적 자아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토요일만 되면 서울 광화문에서 들리는 군중의 함성이 하늘을 채운다. 여기 모이는 까닭이 슬프다. 이 시대 대한민국엔 기댈 공간, 기댈 사람이 너무 없어서 거기 가야만 함께 울고 웃고, 함께 외칠 이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슴 아프지만 사실이다.

우리 시대 광화문은 종교가 돼버렸다.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그곳에 모여 한목소리로 노래하고 한목소리로 기원하고 한목소리로 희망을 외친다. 그들은 가족처럼 손을 잡고 같은 방향으로 행진하고 같은 시간에 해산한다. 그러고는 다음 토요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에 따르면 “종교의 고유한 기능은 사회의 복잡성을 해소하는 데 있다”고 하던데, 그렇게 보면 광화문은 언젠가부터 일정한 제의(祭儀) 형식을 갖춘 종교가 돼버렸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사회의 모순과 역설을 해결하려고 소리를 모은다.

광화문의 모임을 두고 종교냐 아니냐, 진짜다 가짜다 할 필요가 없다. 개인적으로 광화문의 종교는 우리나라 사회의 현실이기에 부정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종교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해서 복잡한 대한민국 사회 문제를 해결하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고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라도 나타난다. 그것이 일시적인 종교 현상이 아니라면 얼마 안 가 일정한 제의 형식을 갖추고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드러난다. 물론 모든 종교가 사회에 유익한 건 아니다. 종교가 소통을 막고 광적인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종교는 사회악으로 치닫는다.

종교가 강조하는 많은 주제가 있겠지만 단연코 중심이 되는 보편적 주제는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를 지낸 로완 윌리엄스의 말대로 “서로를 올바르게 대하는 것, 서로를 알기 위해 충분한 시간과 공을 들이는 것, 타인을 향한 상냥한 호기심으로 존중하며 대하는 것”에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 그런 장소, 그런 모임을 소망하며 간절히 종교를 찾는다.

복음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도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이 인간을 올바르게 대하는 방식, 하나님이 인간을 더 잘 알기 위해 충분한 시간과 공을 들이는 것, 상냥한 호기심으로 인간을 대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완벽히 드러난 것을 바울은 ‘복음’이라 불렀고 그 복음이 “십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다”고 고백한다. 복음이란 이렇게 하나님이 인간을 알기 위해 충분히 시간과 정성을 들인 하늘의 사랑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지 않다.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하지 않고 선전 선동만 무성한 곳이라면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광화문 종교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제발 그런 데 가서 예수 이름을 들먹이며 찬송가 좀 부르지 말라. 사이비는 다른 게 아니다. 사람과 진실엔 관심이라곤 한 푼어치도 없고 다짜고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고 선동하는 인간이 사이비고 좀도둑이다. 거기서 당장 뛰쳐나와야 한다. 그래야 산다.


[출처]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