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세리와 죄인들 (2) (막 2:15)

새벽지기1 2022. 7. 28. 06:28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막 2:15)

예수님 주변에 세리와 죄인들이 늘 함께 했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그들을 모범생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오늘 우리는 복음과 설교의 근본이 무엇인지에 대한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설교는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마음을 열라는 초청이지 그들을 쓸 만한 인간으로 개조하려는 훈계가 아닙니다. 초청과 훈계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초청은 초청의 주체에 중심이 놓여 있다면 훈계는 훈계의 객체에 중심이 놓여 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 나라가 관건이라면 후자는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사람의 삶과 역사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지만 주체는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초청과 훈계를 구분하지 못할 때 설교는 그 의도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잔소리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컨대 “탕자의 비유”를 봅시다. 빌리 그레함 목사 같은 사람들에게서 흔하게 볼 수 있듯이 많은 설교자들이 탕자의 변화된 삶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청중들이 자신들의 잘못된 삶을 회개하라고 다그칩니다. 도박, 마약, 술, 담배를 끊으라고 설교합니다. 이런 설교는 잔소리이고, 더 심하게 말하면 코미디입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의 핵심이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는 탕자가 회개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용납하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설교자들이 끊임없이 청중들을 모범생으로 만들기 위해서 닦달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기보다는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래와 같은 본회퍼의 진술은 우리가 새겨들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의 입술을 통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망설임과 고민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영적인 잔소리꾼, 지겨운 수다쟁이가 되지 아니하고 주의 모든 규례를 선포할 수 있기 위해서는 많은 영적 체험과 수행, 그리고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과 확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의 입술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께 봉사할 수 있으려면 우리의 마음이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들고 있어야 한다.”(본회퍼의 시편명상, 153쪽)


노파심으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그리스도교 신앙과 설교에 윤리적인 가르침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정의와 평화, 그리고 정직한 삶을 가르쳤고, 신약의 서신들도 역시 그런 주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을 보더라도 그리스도교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만 고도의 윤리적 감수성을 유지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은 아무리 선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아니라 그런 윤리적 삶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그것들은 규범으로서가 아니라 복음의 범주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존재와 통치의 신비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의 신비에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묻지 않고 생명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초청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종교학적인 개념으로 말한다면, 루돌프 오토가 말하는 ‘거룩한 두려움’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판단과 생각이 모두 무의미해지는 가장 궁극적인 존재의 세계로 돌입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세계를 미리 맛본 사람들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초청을 설명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그대로 받아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런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살았다는 건 그가 이런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 안에서 사람들을 대했다는 의미입니다. “실존이 본질에 우선한다.”는 실존주의 철학의 명제를 여기에 대입한다면 복음을 따르는 변화된 삶(본질)보다는 하나님의 통치(존재)이 우선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안에 들어있는 가장 궁극적인 성격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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