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황혼
황혼은 “해가 뉘엿뉘엿하여 어두워질 무렵”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세력이나 나이 따위가 한창인 때를 지나 쇠퇴하여 종말에 가까운 때”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생의 황혼을 말하고, 권력의 황혼을 말합니다. 이런 표현을 하나님을 향하여 도발적으로 쓴 사람이 독일이 철학자 니체가 있습니다. 그는 “우상의 황혼”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은 죽었다. 신을 살해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니체의 생각에서 당대의 기독교는 황혼에 들어섰다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포스트모던 시대를 열었습니다. 신을 살해한 이들의 후예들은 전통적 기준을 완전히 해체하여 무질서가 질서인양 혼돈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60-70년대를 풍미하였던 록그룹 비틀즈의 리더인 존 레논의 노래는 이러한 생각을 잘 보여줍니다.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 봐요, 해 보면 쉬워요. 발 아래엔 지옥이 없어요, 머리 위엔 하늘뿐이죠. 모든 사람이 오늘을 위해 사는 걸 상상해 봐요.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 봐요, 그리 어렵지 않아요. 서로 죽이고 죽일 이유도 없죠, 종교도 없어요. 평화롭게 함께 사는 모든 사람을 상상하세요. 제가 몽상가라고 말하시겠죠, 하지만 저 혼자가 아닙니다. 언젠가 함께 하세요, 세상은 하나가 될 거에요. [이매진]
이러한 생각은 서구의 포스트모던 시대를 열광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이 지식인의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90년대에 얼굴을 보이기 시작하였던 이들이 이제 완전한 모습으로 이곳저곳을 밟고 다니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에 들어와 있다는 할 수 있습니다. 서구에서 치열하게 투쟁하였던 사상이 우리의 삶에 친근하게 다가왔습니다. 이제 무신론적 생각은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었습니다. 신을 살해하였던 이들의 생각이 실체화된 모습을 현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아주 세련되게 그리고 인내심을 갖고 우리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잠식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치밀하고 설득력 있게 다가옴으로 인하여 알아차릴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나씩 포스트모더니즘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이러는 사이에 교회는 몸뚱이를 키우는데 혈안이 되었지 교회를 지탱하는 초석을 견고하게 하는 일에는 치열하지 못하였습니다. 시대의 사상을 변증하고 싸울 수 있는 기반이 금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대하여지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기초석이 금이 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교회는 점점 비대하여 졌습니다. 그리고 그 비대함을 지키기 위하여 부끄러운 일을 자행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 내가 세운 교회 내가 물려주겠다는데 누가 잔소리냐고 말하는 무식한 말들이 자연스럽게 통용되었습니다. 또한 교회의 도덕적이고 성적인 타락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이득에 의하여 결정하였습니다. 거룩함을 생명으로 삼아야 하는 교회 직분자들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누구와도 손을 잡는 비열한 모습들이 연출되었습니다. 더 이상 교회의 거룩함을 보기가 힘들어 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교회는 비대한 몸을 지탱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초석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결국 초석이 무너지자 교회는 세상의 미혹에 하나 둘 씩 넘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교회가 세상으로 넘어가자 광장에서 외치는 소리들이 동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점점 교회는 성경의 가르침 안에서 하나가 되지 못하고 사분오열되었습니다. 더구나 광장에 동원된 성도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볼 수 있었습니다. 광장에서 교회의 활기 발랄한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광장은 젊음이 아니라 황혼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다음 세대를 위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에서 일부 의연함을 느낄 수는 있었지만 거기 까지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각종 지표를 통하여 볼 때 참으로 위기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전쟁을 경험하였던 세대가 사라지고 통일의 세대가 도래한다면 한국 교회는 가차 없이 매를 맞을 것입니다. 그 매는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부끄러움입니다. 지금도 부끄러움의 모습을 산별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동시 다발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국 교회도 시대의 사상에 의하여 급속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한 부류는 너무나 낭만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너무 호들갑 떤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유 만만합니다. 동성애와 차별 금지법에 대한 제3차 국가인권정책 기본계획에 대해서도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경은 절대적 기준이 아닙니다. 성경 역시 시대의 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것에 대하여 느슨한 해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만큼 시대의 모습에 대하여 낭만적입니다. 별일 없을 것이라는 넉넉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서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나무나 낙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 진행형인 현실에 대한 판단이 우리의 현실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한국교회의 현실에 대하여 매우 투쟁적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정치적 결사 단체인 태극기 단체와 연관이 매우 높습니다. 이들로부터 받는 정보로 두려움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가 곧 사회주의화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교회는 힘들 것이라는 두려움입니다. 특별히 차별금지법에 의하면 동성애를 거부하는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고 교회가 어려움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순교적 각오로 대정부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가 정권퇴진 운동을 하기에 는 너무나 멀리 나간 것 같습니다.
이들은 서구 교회의 현실을 실시간적으로 받으면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염려에 가득차 있습니다. 실제로 동성애자들의 요구를 듣지 않았던 이들이 감옥에 가는 소식을 듣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하여 낭만적인 그룹은 어떠한 댓글도 없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하지만 투쟁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서 아쉬움을 볼 수 있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집중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이들의 집회에서 종종 미국 국기와 이스라엘 국기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성경을 참으로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보이는 힘 즉 군사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심판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주권을 강대국에 맡겼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정말로 지금의 상황이 위기라고 생각한다면 금식을 선포하고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무릎을 꿇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이끄는 이들 가운데 누구도 목숨을 건 금식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 위기는 아닌 것 같아 보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혼돈의 양극화를 달리고 있을 때 교회는 점점 황혼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미 교회는 내적으로 젊은 세대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 세상으로부터 불신 받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신뢰도는 20%가 안 됩니다. 교회로부터 도피한 그리스도인들이 백만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40대 이하의 젊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들은 자녀들을 교회에 보내지 않습니다. 그 결과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앞으로 교회는 성령의 특별한 간섭하심이 없는 한 짙은 황혼기를 맞이할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표입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20년 뒤의 교회는 텅텅 빌 수 있습니다.
교회의 황혼기는 빈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고 지역교회들이 잘 준비해야 합니다. 시대의 흐름을 인식하고 성경의 가르침에 더욱 집중하여야 합니다.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외에 어떤 우상도 섬기지 않습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은 다 온전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외에는 온전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시대의 사상을 알되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능력 있고 인기 있는 사람을 좋아할 수 있으나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우리가 섬기고 따를 분은 오직 삼위 하나님뿐입니다.
교회의 황혼기를 살 것인지, 교회의 새벽을 깨울 것인지? 우리는 기로에 서 있습니다. 온갖 소리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성경이 말하는 소리에 전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성경이어야 합니다. 성경이 가는대로 가고 성경이 멈추는데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아니라 성경의 소리가 우리를 이끌어 가야 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옛적 길을 강조한 것을 다시금 되새김질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황혼이라는 말하는 시대에 새벽을 깨우는 준비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