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산상수훈

새로봄:산상수훈(16)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새벽지기1 2020. 6. 15. 11:03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걱정도 팔자

'걱정도 팔자'라는 말은 생각할수록 절묘하다. 우리 사는 꼴이 꼭 그러하다. 우리는 모든 일을 걱정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처럼 산다. 느긋하고 한가로워 보이는 사람을 보면 어디 한 군데쯤 풀린 사람처럼 취급하며 혀를 차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주위 사람의 낙천적 인생관조차 재빨리 자기의 걱정거리로 삼는 타고난(?) 걱정꾼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행복한가?

희랍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몸은 본래의 질료인 흙으로 돌아가고 혼은 본래의 주인인 신에게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살아있는 동안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염려'란다. 그런데 사람에 대한 '염려'의 지배권을 확인해준 것은 '시간'이다. 태어남과 성장, 노쇠와 소멸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는, 특히 자기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염려를 벗기 어렵다. 그림 형제가 편찬한 <그림동화>에 나오는 '찔레꽃 공주'는 물레 바늘에 찔려 백 년 동안의 잠 속에 빠져든다. 공주의 잠은 온 성에 퍼져 모두가 깊은 잠에 빠진다. 파수병은 창을 든 채, 말 탄 병사는 말을 탄 채, 고양이는 쥐를 잡다 말고, 아궁이의 불까지도 타고 있던 모양 그대로 멈춘다. 깊은 잠 속에 빠져든 그 성은 시간이 소거된 공간이다. 그곳에는 당연히 '염려'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렇게도 열심히 걱정하는 것일까? 걱정거리가 많으니까. 정답인 듯 보이지만 정답은 아니다. 오히려 정답의 근사치는 우리가 걱정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우리 마음은 이리저리 찢겨 있다(分心). 여백이 없다. 자기 삶의 근거를 바깥에서 찾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외부의 반응에 민감하다. 단쇠처럼 들뜬 마음은 작은 충격에도 매우 취약하다. 물을 머금지 못하는 박토처럼 작은 시련 앞에서도 좌절감을 맛본다. 자기를 지키려니 외부를 향해 벌컥 화를 잘 낸다(忿心). 하지만 마음이 하나로 통합된 이들은 웬만한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삶의 근거를 안에서 찾는다. 누가 칭찬을 한다고 해서 망자존대(妄自尊大) 하는 일도 없고, 누가 비난을 한다고 해서 살맛을 잃고 얼굴이 파리 해지 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근심이 있다면 오직 자기답게 살지 못하는 것뿐이다.


영혼의 지붕을 덮은 쇠 항아리

예수는 걱정이라는 '먹구름'을, '지붕 덮은 쇠 항아리'(신동엽)를 하늘로 알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 걱정의 먹구름을 걷어내라고, 그 쇠 항아리를 깨뜨리라고 말한다. '티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이 여기 있는데 왜 그 모양으로 사냐고 질책한다. 하지만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걱정을 벗기 어렵다. 항상 뭔가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하나를 택한다는 것은 다른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선택에는 늘 고뇌가 뒤따른다. 이게 참 미묘하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버리고 나면 갑자기 그게 더 아름다워 보인다. 자칫하면 사람은 죽을 때까지 '건너편 언덕'(對岸)만 동경하다가 자기가 발을 딛고 선 땅의 아름다움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죽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공간으로서의 건너편 언덕뿐만 아니라, 시간의 건너편 언덕인 내일 혹은 미래도 '오늘'을 창조적으로 살지 못하도록 우리 영혼에 족쇄를 채우지 않던가.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이 말은 걱정 그 자체를 그만두라는 말이라기보다는, 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오늘을 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라는 말씀이 아닌가 싶다. 인생이란 '오늘'이 모여서 이룬 흔적이자 실체이다. 세심하게 점을 찍어 형체를 만들어내는 점묘법 화가들처럼 우리는 오늘이라는 점 하나를 정성스럽게 찍어야 한다. 정성스럽다는 말은 자기를 온전히 그 속에 담는다는 말이고, 시간을 들인다는 말과 통한다. 정성껏 먹고, 정성껏 만나고, 정성껏 공부하고, 정성껏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거룩의 길이 아닐까. 우리가 어떤 일을 건성으로 한다면 아름답고 거룩한 삶은 기대하기 어렵다. 야구 선수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공을 놓치는 것은 그의 마음이 현재에 충실하지 못한 채, 다음 순간으로 지레 미끄러져 들어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실수를 범한 야구선수를 책망할 입장이 못된다. 우리의 살림살이가 그러한 시간 속의 미끄러짐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짐

걱정하면 할수록 걱정이 줄어들고, 근심하면 할수록 생의 무게가 가벼워진다면, 그래서 티없이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면 예수는 어쩌면 열심히 걱정하라고 우리를 격려하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걱정은 하면 할수록 커진다. 근심의 무게도 마찬가지이다. 옛사람들이 보았다던 어처구니 도깨비는 마음이 만든 허상이 아니던가? 막상 부딪쳐보면 별 것도 아닌 고통도 미지의 문설주 뒤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는 막강한 것으로 보인다. 이게 다 마음이 지어내는 일이다. 세상에서 자기 마음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개는 변덕스러운 마음의 부림을 당한다. 마음의 부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허무에 빠지거나 냉소주의나 비관주의에 빠진다.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사 22:13)는 케세라세라 식의 인생관을 가지고 즐겁게 사는 듯이 보이는 사람도 자기의 생에 대한 근본적 신뢰를 잃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 잘 될 거야'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현실에 직면할 용기가 없어 원망 사고(願望思考) 속으로 도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살아있는 한 어느 누구도 가볍지 않다.


나는 내가 항상 무겁다,
나같이 무거운 무게도 내게는 없을 것이다.

나는 내가 무거워
나를 등에 지고 다닌다,
나는 나의 짐이다.

맑고 고요한 내 눈물을
밤이슬처럼 맺혀보아도,
눈물은 나를 떼어낸 조그만 납덩이가 되고 만다.
(김현승,「鉛」부분)


'나는 나의 짐'이라는 시인의 고백이 참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시인은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나는 내 영혼인 줄 알고/그만 납을 삼켜버렸나 보다" 하고 탄식한다. 오직 스스로의 노력으로만 자기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면 우리의 탄식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안에 자기를 단단히 매다

생의 짐이 무거워 허덕이는 우리에게 예수는 새로운 길을 가리켜 보인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지당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자기 염려에 사로잡혀서 가장 인간적인 진실을 외면할 때가 많다. 이런저런 걱정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지 못한다면 비극이 아닌가. 상처 입고 학대받은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고, 척박한 역사를 샬롬의 새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한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비애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당장 고픈 배를 부여잡고 서러움의 눈물을 삼키며 잠을 청하는 이에게는 배부른 자의 헛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래서인가? 많은 이들이 이 말씀 앞에서 허둥거린다. 때로는 마음속에 일고 있는 동요를 숨기지 못한 채, '내가 걱정하지 않으면 대체 누가 나 대신 걱정해주느냐?'라고 항변한다. 이 말씀의 비현실성을 공박함으로써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못하는 자기 삶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그러고는 걱정이라는 쇠 항아리 지붕 아래로 재빨리 돌아간다. 그런 이들은 대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넉넉한 데도 말이다. 걱정도 팔자라는 말은 이 대목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 앞에 선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제 힘으로 살지 말고 은혜로 살라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그저 기다리고만 있으라는 뜻이 아니다. 삶의 중심을 바꾸라는 말이다. 제 힘으로 시간과 맞서 싸우는 사람이 거두게 되는 것은 스트레스와 두려움이다. 그에게 인생은 투쟁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깊은 신뢰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평안의 열매를 거둔다. 그에게 인생은 선물상자와 같다. 좋은 일만 일어난다는 말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도 끝내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에게 맡겼던 예수처럼 우리도 그분을 철저히 신뢰한다면, 하나님의 은혜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없다. 신뢰하는 사람은 모래를 걸러 금을 얻는 사람들처럼 인생의 온갖 경험들을 믿음의 체로 걸려 보화를 얻는다. 믿음의 사람은 만사형통의 복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경험하는 모든 일속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찾아낼 줄 아는 사람이다. 내일에 대한 염려는 신뢰의 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밤하늘에 총총한 별들을 보여주면서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창 15:5)이라고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주님을 믿었다." '주님을 믿었다'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그는 하나님 안에 자기를 단단히 맸다"는 뜻이라 한다. 하나님의 마음에 자기를 붙들어 매고 살아가는 사람은 걱정과 근심의 파도에 떠밀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의 삶에 정성을 다한다. 정성은 시간을 영원에 비끌어매는 도구이다. 그래서 그의 현재는 영생으로 이어진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이것이 그의 낙관주의의 토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