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산상수훈

새로봄:산상수훈(14)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새벽지기1 2020. 5. 30. 06:44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희망은 죽지 않는다

미국이 이라크를 대상으로 벌인 물리적인 전쟁은 끝나가기만, 더 야비하고 위험하고 지속적인 전쟁이 시작되고 있다. 전후 복구사업에 동참하여 정치적·경제적 이권을 선점하려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이해관계가, 그 땅의 고통과 눈물을 삼키고 있다. 이 더러운 전쟁으로부터 비켜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이다. 우리는 이성과 신앙의 이름으로 결박해놓았던 사람의 야수적 본질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 있냐고 묻는다. 어떤 이들은 절박하게, 또 어떤 이들은 막연한 아픔과 분노로. 전쟁을 기획하고 명령하고 수행한 자들은 '해방과 자유를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속말은 힘이 정의이지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달콤한 희망 따위는 없음을 가리킨다. 하지만 4월은 우리에게 희망은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외침은 탐욕의 광풍 아래서 꺼질 듯 미약해 보이지만 결코 스러지지 않는다.

교회 마당가 살피꽃밭에 원추리를 옮겨 심던 집사님이 흥분한 목소리로 나를 찾는다. 나와 보라는 것이다. 웬일인가 싶어 따라가 보니 놀라운 광경이 보였다. 원추리를 심으려고 파놓은 구덩이 속 30㎝ 깊이에 노란색 새싹이 피어나고 있었다. 지난 늦가을 교회 담장을 헐면서 인부들의 거친 삽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줄 알았던 상사화(相思花)가 그 깊은 곳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던 것이다. 꽃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생명의 본성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상사화는 그렇게 봄을 맞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끈질긴 생명의 기적 앞에 넋이 나간 채 '야!' 소리만 연발하며 서있었다. 그 미약한 새싹은 작은 아픔에도 신음소리를 높이고, 작은 좌절 앞에서도 하늘이 무너진 듯 상심하는 내 연약함을 슬며시 비추며 그곳에 있었다. 희망은 끝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는 이에게만 있다.


'너'는 '나'를 비춰보는 거울

바벨탑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왜? 바벨탑이기 때문이다. 대답이 충분치 않은가? 그렇다면 달리 말하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까. 사람들의 다양한 소리를 억누르고, 다양한 삶의 방식을 획일적으로, 강권적으로 통일시키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참으로 조화롭다. 봄 숲에 들어 잠시라도 마음을 내려놓고, 자연의 리듬을 타 보라.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 어울릴 줄 안다. 거대한 바위도, 나무도 양지바른 곳에 피어나는 노랑제비꽃이나 개별꽃의 권리를 제한하지 않는다. 어울려 살아갈 줄 모르는 것은 어쩌면 동물세계, 특히 인간 세계의 특징인지 모르겠다. 왜 이 지경이 되고 말았는가? 인간이 암덩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암은 자기 세포의 무한증식을 시도한다지 않던가? 암은 우리 몸과 마음속에 깃든 부조화의 포자이다. 바울은 '탐심은 우상 숭배'(골 3:5)라 했다. 그렇다면 바른 신앙이란 탐심을 여의는 것에서 시작된다. 탐심을 여의는 것은 다른 존재의 살 권리를 인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태백 예수원에 머무는 한 자매의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설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어울려 살다 보면 상대방이 나를 비춰보는 거울로 여겨집니다. 상대방의 허물은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생깁니다. 나의 연약함을 상대방의 온전함으로 덮고, 그의 연약함을 나의 온전함으로 덮는다고나 할까요."

물론 상대방은 우리 삶을 비춰보는 성찰의 거울로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의 존재 깊숙이 들어와 나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건강과 나의 건강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나'인 '타인'들을 무차별적인 범주 속에 가둬버리곤 한다. 그 이유는 단지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무차별적 뭉뚱그림은 다양하게 변주되어 우리 삶 속에 파고든다. 때로는 십자군적인 선교의 열정으로, 때로는 맹목적 애국주의로, 때로는 악마적인 인종주의의 형태로 말이다. 이런 변주를 가능케 하는 것은 자신은 '선'이고 타인은 '악'이라는 자기기만적 판단이다. 하지만 세상은 선과 악이 뒤엉켜있다. 나의 자유가 남에게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나의 '선'이 다른 이에게 '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 어부는 고기를 많이 잡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고기는 그물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닌가. 악이 없는 선은 없고, 선이 없는 악도 없다. 어쩌면 노아의 방주에도 선과 악이 짝을 이뤄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어느 누구도 남에게 '악' 혹은 '악의 축'이라는 꼬리표를 붙일 수 없다. 어느 누구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남을 멸절시킬 수 있는 권한을 받은 바 없다.

탈근대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가장 소중한 것은 전체와의 관련성이 아닌가 싶다. 지금도 연세 드신 어른 가운데에는 '비가 오시네'라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자연과학자들이 비 내림의 현상을 뭐라 설명하든 상관없다. 농사철에 내리는 비는 고마운 하늘의 선물인 것이다. 우리가 이기심을 내려놓고 전체와의 관련 속에서 자기를 돌아보면 세상에 대해 내리는 우리의 주관적인 평가는 매우 터무니없는 것일 때가 많다.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아주 썩은 것이 사람의 마음"(17:9)이라 했다. 나지막한 야산에라도 오르면 세상을 조망하는 우리의 시선이 사뭇 달라짐을 느낀다. '나'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 실체인지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결국 이런 먼 빛의 시선을 획득하는 것, 다시 말해 전체에 대한 통찰을 회복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믿는 사람이란 거미줄처럼 자기를 사로잡고 있던 '나'로부터 해방되어 다른 이들과 조화롭게 공존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도 내 것이다'

예수님은 편협한 마음들을 향해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 5:45)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외면하고 싶은 말씀이겠지만 어쩔 수 없다. 하나님은 두남두지 않으신다. 이것은 혁명적인 선언이다. 동류들에게는 관대하지만, 원수에게는 몇 배의 보복을 안겨주어야 시원한 우리에게 이 말씀은 매우 불편하다. 하나님이 내편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너는 내 것'(사 43:1)이라고만 말씀하신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이어진다. '그도 내 것'이라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요 10:16).

선과 악은 자기 편의에 따라, 입장에 따라 자의적으로 가를 수 없다. 선악의 판단은 우리에게 살라는 명령을 내리신 그분의 일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체와의 관계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꽃은 선인과 악인을 가려 향기를 발하지 않는다. 성 프란체스코는 몬테 카살레의 수도원장인 안젤로가 음식을 나눠달라고 찾아온 악명 높은 3인조 강도를 엄히 꾸짖어 돌려보냈다는 말을 듣고 오히려 안젤로를 꾸짖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지 않으셨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에게 지시했다.

"거룩한 순명의 이름으로 명하니, 즉시 내가 구걸해 온 이 빵 주머니와 포도주 병을 가지고 산을 넘고 어디든지 그들을 만날 때까지 빨리 쫓아가서 내 이름으로 이 빵과 포도주를 그들에게 전부 주십시오. 그다음에 그들 앞에 무릎을 꿇어 형제의 냉정함을 겸손되이 사과하십시오. 그 사람들한테 이제는 나쁜 일을 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이웃 사람을 괴롭히지 말도록 내 이름으로 부탁하십시오. 만약 그들이 그러겠다면 나는 그들의 육신 상의 염려를 해주고, 언제든지 먹을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이렇게 다 말해준 다음에야 돌아오십시오."(『성 프란체스코의 잔 꽃송이』, 131쪽)

안젤로는 이 말에 순종했고 결국은 그들을 형제로 맞아들일 수 있었다. 악인 앞에서도 무릎을 꿇는 까닭은 그의 영혼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함이다. 자기로부터 해방된 사람이 아니고는 이런 일을 할 수 없다. 이런 큰마음과 만났을 때 그 삼인조 강도들의 굳은 마음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사랑이다. 사랑이 전제되지 않은 바름이 일쑤 또 다른 갈등의 시작임을 우리는 잘 안다.


너희도 온전하라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온전함'을 요구하신다. 여기서 온전함이란 도덕적 완전함을 뜻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아무도 이 목표에 이를 수 없다. 본래 이 말은 어떤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함을 뜻한다. 말이 우습기는 하지만 도둑의 온전함도 있고 의사의 온전함도 있다. 신기에 가까운 기술을 터득한 도둑이나, 귀신같이 병을 잘 고치는 의사도 그 분야에 있어서는 온전함에 이르렀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이 가리키는 온전함의 모델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온전함은 자비하심으로 표현된다. 하나님은 품은 커서 그 안에 품지 못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하나님의 팔은 길어서 감싸 안지 못할 이가 하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아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목에 걸린 선악과를 뱉어내야 한다. 남과 우리를 가르기 위해 준비해 둔 모든 척도들을 배설물처럼 버려야 한다. 학벌로, 지역으로, 혈연으로, 인종으로, 종교로, 힘의 크기로, 성별로 너와 나를 가르도록 부추기는 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말아야 한다. 마음으로는 폭력을 꾀하고 남을 해칠 말만 하는(잠 24:2) 이들 때문에 낙심할 것 없다. 우리는 원망하고, 투덜거리라고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온전한 삶을 살라고 부름 받았다. 놀랍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