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산상수훈

새로봄: 산상수훈(11)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5:20)

새벽지기1 2020. 5. 19. 07:11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 5:20)


정신의 보습

겨울바람에 실려온 옛 기억들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아련하다. 그 속에는 아버지의 한숨이 있고, 눈물이 있다. 낮이면 동네 사랑방에 모여 객쩍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담배 내기 화투를 치고, 밤이면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가마니를 치던 아버지들. 그도 저도 시들해지면, 꽁꽁 언 논배미 옆의 물웅덩이를 뒤져 숨어있던 미꾸라지며 붕어·물방개 따위를 잡아한 솥 끓여 푸지게 먹거나, 눈 덮인 앞산 뒷산을 위에서 아래로 누비면서 꿩이나 토끼를 몰아 대곤 했다. 생각해보니 그것은 운동선수들의 동계훈련과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겨울 한복판에 봄이 우뚝 서는 것처럼(立春), 농사는 겨울에 시작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객토작업이었다. 하천부지의 충적토나, 붉은빛을 띤 산지의 토양을 떠내 토질이 약해진 논 위에 길게 펴는 작업은 아버지들이 가장 공들였던 일 가운데 하나이다. 또 벼 그루가 남아있는 논을 몇 번씩 갈아엎어 그 속에 계분 같은 것을 넣어주기도 했다.
"아버지, 아직 벼 심을 때도 아닌데, 왜 논을 간대유?"
"그래야, 흙 속에도 공기가 스며들어서 땅이 기름지게 되살아나는 거야."

느닷없는 기억의 실타래 한 끝에서 나는 '가르친다'는 말을 붙잡았다. '가르친다'는 말과 '간다'는 말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그의 마음을 갈아엎어 그 속에 신선한 공기를 불어넣는 일일 것이다. 스승이란 굳어진 마음의 지각을 갈아엎는 정신의 보습이 아니겠는가? 예언자들은 인류의 보습이었다.

"지금은 너희가 주를 찾을 때이다. 묵은땅을 갈아엎어라."(호 10:12)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켜 '손에 쟁기를 잡은 자'(눅9:62)라 했다. 스스로 인류의 보습으로 오신 그분은 형해(形骸)만 남은, 숨 쉴 틈조차 없는 바리새적인 경건의 품에서는 어떤 생명도 자랄 수 없음을 꿰뚫어 보셨다. 상투적이고 의례적인 관행은 언제나 아편이 되어 우리를 나태한 정신으로 만들고 만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질곡이 되어 다른 이의 마음을 옭아맨다. 산상수훈은 우리의 굳은 마음 밭(心田)을 갈아엎는 정신의 쟁깃날이고, 얽매임을 끊어내는 정신의 활인검이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그 쟁깃날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사코 율법주의의 묵은 밭을 지키려 한다. 하지만 그 굳어진 체제 아래서 숨을 죽이고 있던 생명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의 쟁깃날은 해방의 소식, 곧 복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수만 치고 있을 일이 아니다. 그 갈아엎음은 더 큰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것이지, 기존 질서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지긋지긋한 율법 조문을 이제 던져버리자고? 모세도 한번 십계명 돌판을 내던졌는데 우리라고 못할 게 뭐냐고? 이제 자유라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설원처럼 찬란한 은총의 새 세계가 열렸는데, 율법이라는 누더기는 벗어던지자고? 아니다. 그게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준엄하게 이르신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문화와 전통을 정죄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예수의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더욱더 엄격한 삶의 자세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는가? 그렇다. 그렇다면 믿음만 있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가? 아니다. 믿음의 사람에게는 '아무렇게나'란 말이 없다. 그는 온 힘과 정성을 다하여 하늘의 명을 받들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다. 적어도 남의눈을 의식해서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타인의 시선이 나를 타락시킨다"는 사르트르의 말은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 정신적 토대 위에 집을 짓는 존재인가를 가리키고 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지은 까치집은 폭풍이 불어와도 무너지지 않는데, 우리 존재의 집은 작은 바람에도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정신의 천박함을 경계하라

공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 사람"이 군자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적 인정이나 평판에 기대기보다는 하늘의 뜻을 받들려는 더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산다. 그는 자기 속에 드리운 어둡고 음습한 욕망을, 세상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유가에서는 군자의 삶의 자세를 '去人欲, 存天理'라는 말로 요약한다. 그에 반해 소인은 항상 자기의 욕망 주변을 맴돌다가 급기야는 거미줄에 걸린 날벌레처럼 타인의 시선에 포박된 채 인생을 탕진한다. 그들은 탓해야 할 것을 언제나 밖에서 찾는다. 예수님께 하늘에서 내려온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던 바리새인들처럼, 그들은 삶의 중심을 바깥에서만 찾는다. 그들의 삶은 '居人欲, 廢天理'라 할 수 있을까? 조금은 가혹한 말인 듯싶다. 하지만 진리에 눈뜨지 못한, 영혼이 영글지 못한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이죽거림이 영혼의 허약을 보여주는 징표인 줄 알면서도 나는 이렇게 밖에 말할 줄 모른다.

그런데 오늘 '성도'라 이름하는 우리는 군자에 가까운가, 소인에 가까운가? 이것은 각자가 대답할 문제이다. 하지만 '거룩함을 추구하는 사람'이 소인일 수는 없다. '소인배 성도'란 말은 형용모순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자기 이익 앞에 한치의 양보도 없는 '소인배 성도', 자기를 알아달라고, 높여달라고 검은돈을 쓰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소인배 성도', 자기의 허물을 덮으려고 다른 이를 모함하는 '소인배 성도', 자기 의에 사로잡혀 함부로 다른 이를 재단하는 '소인배 성도'가 많다. 나는 이 말을 하면서도 모골이 송연함을 느낀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공자는 자기에게서 잘못된 것을 보면 자기 안에 법정을 차려놓고 자신과 송사를 벌여야 한다 했다. 이것을 자송(自訟)이라 한다. 이러한 치열한 자기 성찰과 수덕을 거쳐야 사람은 악취를 벗고 향기를 풍기게 된다. 예수님이 제자인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나은 의이다. 물론 이것은 외적인 행위 규정을 더 철저히 준수하라는 요구는 아닐 것이다. 위에서 부과된 규정은 우리 영혼에 자유와 기쁨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 영혼의 중심을 하나님께 맞히고 살라는 말일 것이다.


영혼의 중심

어린 시절, 참나무를 깎아 만든 팽이를 들고 얼음판에 나가면 참 신명 났다. 조그마한 막대기에 헝겊쪼가리를 매서 만든 채를 가지고 팽이를 돌리노라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참 신기하기도 하지. 채에 맞아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던 팽이는 곧 중심을 잡고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문제는 중심이다. 삶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생기면 우리는 더 이상 인생행로를 갈지자로 걷지 않게 된다. 하지만 우리를 비틀거리게 만드는 것을 벗어버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낡은 옷이라면 벗어버리면 그만이지만, '나'는 끝까지 지고 가야 할 달팽이집과 같다. 욕망은 우리의 중심을 요동치게 만들고, 거기서 비롯된 애증은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피폐한 정신이 걸어간 자리에 남는 것은 무거움과 상처뿐이다. 명나라의 여곤(呂坤)이라는 사람은 일찍이 마음과 자취를 다 맑게 지니려는 뜻을 지니고 살았다. 그래서 그는 네 마디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다 한다. "행함은 맑고 이름은 탁하게. 도는 나아가되 몸은 물러나게. 이익은 나중으로 하고 해로움은 먼저. 남은 풍족하게 하되 나는 검약하게 하고자 한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비슷한 말을 했다.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을,
보다 맛있는 것보다 보다 맛없는 것을
보다 즐거운 것보다 차라리 덜 즐거운 것을
쉬는 일보다도 고된 일을
위로되는 일보다도 위로 없는 일을
보다 큰 것보다 보다 작은 것을
보다 높고 값진 것보다 보다 낮고 값없는 것을
무엇을 바라기보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기를
세상의 보다 나은 것을 찾기보다 보다 못한 것을 찾아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온전히 벗고, 비고, 없는 몸 되기를 바라라.


이것은 지금 우리가 지향하는 삶을 거의 정확하게 뒤집은 것이 아닌가? 성도의 삶은 하늘 길을 가리켜 보이는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온전히 벗고, 비고, 없는 몸 되기'를 바라는 것이야말로 참된 인간의 길일 것이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뭍으로 올라오시던 예수님의 얼굴, 다볼산 위에서 해처럼 빛나던 예수님의 얼굴은 자기를 온전히 비운 이의 얼굴이었으리라. 누군가를 죄인으로 드러내고야 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 말고, 다른 이들 속에 잠들어있는 빛을 깨우는 따스한 의, 우리는 그 의를 위해 부름 받았다. 아, 길이 참 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