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산상수훈

새로봄:산상수훈(13)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5:39)

새벽지기1 2020. 5. 27. 07:39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 5:39)


봄은 남녘에서 들려오는 화신과, 고비사막을 거쳐 온 황사바람과 함께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마스크를 준비하고 봄을 기다린다. 달이 바뀌어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감기 증세처럼, 사람들은 기분 나쁜 미열에 시달리며 이 봄을 앓고 있다. 중동에 드리운 전쟁의 먹구름 때문일 것이다. 버들눈에 내려앉는 햇살조차 싱그럽지 않다. 햇살이야 예년과 다르겠는가만 미국의 패권주의를 의구심으로 바라보는 우리 마음에는 봄 신명이 지필 여유가 없다. 계곡을 가득 채우는 물소리의 리듬을 따라 우듬지 끝으로 우줄우줄 봄이 오르고 있지만, 인간 세상에 불어닥치는 칼바람이 매섭기만 하다. 구름 걷힌 맑은 하늘 아래 서고 싶다. 60년대의 시인 신동엽의 외침이 온몸을 관통한다.


닦아라, 사람들아
네 마음속 구름
찢어라, 사람들아,
네 머리 덮은 쇠 항아리.

아침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중에서)


외경을 잃어버린 세상, 쇠 항아리를 하늘로 알고 사는 세상, 이런 세상에 평화는 없다. 하늘을 잃은 세상은 급기야 형제를 미워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가인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그의 귀는 닫혀있어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창 4:7)는 경고조차 듣지 못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는 인간의 근본적인 결함은 끝이 없는 무례함이라 했다. 무례함이란 균형의 상실이고, 부자연스러움이고, 조화를 이룰 줄 모름이다. 과도한 권리 주장이요, 다른 이의 살 권리에 대한 부정이다.

삶의 기본 진리는 남의 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인데, 힘으로 다른 생명을 강압하면서 그것을 평화를 위한 유일한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은 문명의 얼굴을 한 야만일 뿐이다. 세상은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힘과 지배에 맛 들인 자들은 권력 행사로부터 얻는 쾌락을 끊지 못한다. 설사 그것이 저급한 것이라 해도. 폭력은 세이렌의 노랫소리처럼 매혹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노래에 이끌리는 자들은 죽음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

폭력이 일상화된 세상, 힘이 정의가 된 이 야만적인 세상에서 하늘에 순(順)하며 살 수 있을까? 소수의 이익을 위해 보편적인 정의가 짓밟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여전히 사랑의 노래를 불러도 되는 것인가? 이제 저항의 노래를 그쳐야 하나? 곤고한 역사의 뻘밭을 낮은 포복으로 기면서 우리는 하늘을 향해 묻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누가 네게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이게 대체 실현 가능한 요구인가? 조금만 손해를 입어도 화를 참지 못하는 우리인데. 작은 모욕에도 얼굴이 벌게지고 숨이 가빠지는 우리인데.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곱절이면, 라멕을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곱절"(창 4:24)이라고 외쳤던 라멕의 피가 우리 속에 흐르고 있는데.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렇게 살 수 없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여 우리를 괴롭히는가? 우리의 도덕적, 정신적 무능을 상기시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차라리 미운 놈 미워하며 살라고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런데 잠깐. 이 가르침은 어떠한 불의 앞에서도 참고 순응하라는 것인가? 아무런 정당성도 없는 요구와 힘 앞에서 저항의 몸짓조차 없이 굴종하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주체의 포기이고, 노예적 굴종이다. 굴욕은 잠깐이고 이익은 영원하다고? 지는 게 이기는 거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 넙죽 엎드린 자에게 남는 것은 모멸감과 자괴감뿐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는 무엇인가? 새로운 인간의 출현이다. 정신적 의미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작은 성취에 기뻐하고 작은 상실에 상심하는 허약한 정신이 아니라 하늘에 뿌리를 내려 어떠한 세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유인이 되라는 것이다. 허약한 몸으로 몇 번씩이나 설산을 넘나들면서 복음을 전한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은 비결을 묻는 이에게 "산을 넘기 전에 정신의 키를 산보다 높이면 산을 넘을 수 있다"라고 했다. 폭력의 산을 넘으려면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보다 더 정신의 키가 높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실 속에서 자행되는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인 폭력 자체를 용인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에 대해서 때로는 거부하고, 저항하고,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면서 정의를 요구해야 한다. 폭력과 억압에 대해서 '나는 반대한다'라고 외쳐야 한다. 하지만 그 반대는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을 배제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배제하고 미워하기는 쉽다. 하지만 포용하고 사랑하면서 싸우기는 쉽지 않다. 예수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랑하면서의 싸움이다.

힘이 필요하다. 세상의 어떤 힘에 짓눌려도 짜부라지지 않는 정신의 힘을 가진 사람,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여읜 사람이라야 사랑을 무기로 싸울 수 있다. 내면 속에 영적인 명랑함과 가벼움을 가진 사람, 철저한 낙관주의자 라야 쇠 항아리 같은 힘의 질서를 뛰어넘을 수 있다. 낙관의 근거는 우리가 아니다. 자기를 믿는 사람은 실망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자유의 길로 역사의 수레를 밀어 올리시는 하나님, 결코 지칠 줄 모르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실망하지 않는다. 물론 믿는 사람도 절망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는 지쳐 넘어졌던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영적 비상을 준비한다. 믿음의 사람은 진리의 탐구자이고, 그가 걸어간 길은 완만하지만 분명한 상승의 길이다.

이 땅의 현실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호모 에렉투스, 즉 새로운 존재는 개별적 자아의 속박에서 벗어나 시간 속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의 근원적인 아픔을 본다. 힘과 폭력의 가면 뒤에 숨어든 허약한 정신, 전체와의 관계를 잃고 표류하는 경박한 정신을 본다. 그리고 그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렇기에 그는 오 리를 가자는 자에게 십 리를 가준다. 속옷을 빼앗으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벗어준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허약한 정신을 비웃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의 얼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진정한 자유는 소유나 힘에 있지 않음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이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노벨 평화상을 받으면서 한 연설은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왼쪽 뺨마저 돌려대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어떻게 혁명의 무기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지금 지구 상에는 박격포가 터지고 총탄이 날아다니지만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거리에서 부상당한 채 뒹굴고 있는 정의는 언젠가는 더러운 치욕의 먼지를 털고 일어나 최고의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언젠가는 전 세계 민족들이 신체를 위하여 세 끼 식사를 하고 정신을 위하여 교육과 문화를 향유하며 영혼을 위하여 인간적 존엄과 평등,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날이 올 것입니다. 언젠가는 타인 중심적인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에 의해 찢긴 대의를 바로 잡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인류가 신의 제단 앞에 엎드려서 전쟁과 유혈을 뛰어넘어 승리를 거둘 것이며 비폭력적인 호의가 이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승리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당당히 맞설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은 자유의 도시를 향하여 줄달음치다 지친 우리의 발에 새로운 힘을 줄 것입니다.

이런 못 말리는 믿음을 가진 자만이 불의에 단호히 저항할 수 있다. 그 '언제'가 언제 인지는 모르지만, 인간성의 봄은 전쟁의 소문을 넘어, 절망의 황사바람을 뚫고 기어코 올 것임을 믿는 사람만이 예수 정신과 잇닿아 있는 살아있는 혼이다. 머리를 뒤덮고 있는 쇠 항아리를 찢고 또 찢고, 마음의 구름을 말끔히 닦기 위해 애쓰는 사람, 그러면서도 미움과 폭력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역사 속에 생명의 불꽃을 지피는 참 사람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큰 사람이 되라고 초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