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산상수훈

새로봄: 산상수훈 (12)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7)

새벽지기1 2020. 5. 21. 06:53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


예수는 말의 경제학을 본능적으로 체득했던 것 같다. 그의 가르침은 간결하고 소박하다. 현학도 없고, 도저한 변설도 없다. 비유를 사용한 것도 말을 모호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실상을 우리 심상에 그리듯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때때로 그의 말은 비수처럼 날카롭다. 거짓과 위선을 도려낼 때이다. 그의 말이 꿈을 꾸듯 아름다울 때도 있다. 생의 풍요로움을 드러낼 때이다. 이때 그의 말은 여항의 삶에 지친 이들의 울울한 가슴에 생명의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봄바람이 된다. 천박한 호기심을 보이는 무리들에게는 말없음을 통해 천둥보다 더 큰 울림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의 선포는 일종의 파종행위이다. 땅에 심긴 씨앗이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싹이 나고 자라나 마침내 결실하게 되듯이, 그의 말은 사건을 일으킨다. 관습적인 말의 울타리 안에 기꺼이 머물고 있는 이들에게 그의 말은 늘 낯설다. 그렇기에 불온하다.

인디언 주술사인 '구르는 천둥'은 "탁월한 스승은 자기 말을 증명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으며, 심지어 제자가 지금 그것을 이해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라고 말했다. 예수는 그런 의미에서 탁월한 스승이다. 예수는 자기의 말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어떤 이론도 들이대지 않는다. 자신의 진실됨을 입증하기 위해 하늘이나 땅을 들어 맹세하지도 않는다. 그의 말에 대한 증거는 그의 존재 자체이다. 예수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했을 때 바리새인들은 즉각 이의를 제기했다.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 하니 네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도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말이 가리키는 실체가 아니고, 그 말을 보증해주는 다른 권위였다. 답답하다. 예수는 달을 가리키고 있는 데, 바리새인들은 손가락만 바라보는 격이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우문현답이 최고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 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기 때문"(요 8:12-14 참조)이라고 했다. 내가 곧 내 말의 증거라는 것이다.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곧 내 말의 증거인가? 즉 나는 삶으로 내 말을 뒷받침하고 있는가? 아니다. 말과 존재 사이의 괴리가 나를 짓누른다.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知者不言, 言者不知" 했다. 물론 알면 입을 꾹 다물게 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 말은 쓸데없는 말, 죽은 말, 허섭쓰레기 같은 말을 늘어놓지 않는다는 말일 게다. 많은 종교인들의 말이 번다함을 면치 못하는 것은 핵심을 붙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대로 세상에 말한다"라고 하셨다(요 8:26). 또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한다"고도하셨다(요 8:38). 중요한 것은 들음과 봄이다. 듣지 못한 채 말하고, 보지 못한 채 말하는 것은 정신적인 사기이다. 세상의 뜬소문을 자기의 편견과 버물려 종교적 진리로 선포하는 것은 듣는 이들의 영혼에 대한 약탈 행위이다. 예수는 유대인들을 향해 통렬하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너희의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요 8:38) 물론 그 '아비'는 사탄이다.

폐부로부터 우러나오지 않는 말, 목구멍과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말, 자기 욕망의 필터를 통해 발해진 말들, 종교적 권위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그럴싸한 속임수가 망령처럼 우리 곁에 서성이고 있다. 화려한 말의 향연 속에서 영혼은 시들어간다. 행복하게.

모든 말들이 길을 헤매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많은 말을 하여 말들의 주소를 바꿔 놓음으로써 말들을 혹사했고 말들을 배반했고 결국에는 그 말들을 기진맥진 지쳐나게 했다. 말들은 그들의 고향을 잃어버렸고 그들의 고향에 대한 감사와 의리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배반당한 말들은 자유였다. 그들이 태어날 때 지은 모든 약속에서 말들은 자유였다. 그러나 말들은 이제 정처가 없었다. 말들은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그들이 깃들 곳을 찾았다. (이청준, <<떠도는 말들>> 중에서)

떠도는 말들, 고향을 잃어버린 말들, 약속을 저버린 말들이 우리 사이를 횡행하고 있다. 진정이 담기지 않은 말, 입에 발린 말, 그냥 해보는 말, 아첨, 아전인수가 판을 친다. 특히 배타적인 정신으로 중무장한 종교인들은 사랑을 말하면서 증오를 가리키고, 평화를 말하면서 불화를 선동하고, 상생을 말하면서 상쟁을 지향한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말의 배신 때문에 크게 상처를 받지 않는다.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믿는 진실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각오'를 했다는 사람을 보아도 그가 정말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여전히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낄낄거리고, 화를 내며 살 것이다. 그래서 그런 말을 들어도 사람들은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치지 그의 장례절차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어떤 일의 불가능을 예견하면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라고 누군가가 장담을 해도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는다. 정말로 자기 손에 불을 붙이지 않을 것임을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기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만일 자기가 약속을 어기면 '성을 바꾸겠다'라고 말해도 아무도 그의 성을 무엇으로 바꿔주어야 할지 염려하지 않는다.

말들이 제 집을 찾지 않는 한 우리는 서로를 신뢰할 수 없다. 말은 한 사회의 신뢰의 토대이다. 말이 탁해지고, 독해지면 그 사회는 병들고 만다. 시인 오규원은 말을 가리켜 '욕망의 성기며 육체의 현실'이라 했다. 우리는 말을 통해 세상을 만지고, 세상은 또한 말을 통해 우리 육체와 영혼을 어루만진다. 벌겋게 달아오른 말들, 외설적인 말들이 우리의 마음을 달뜨게 만들고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탁해진 물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 물을 바다로 돌려보내야 하듯이, 영상 예술가들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상을 보여준 후에 그 화면을 거꾸로 돌려 세상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과정을 보여주듯이, 말을 본래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벼를 도정해 쌀을 얻듯이, 말에 덧씌워진 눅진눅진한 욕망과 거짓을 벗겨내 말의 참 값을 되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의 대답은 간단하다.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하라." 자기 말의 진실성을 담보하기 위해서 다른 권위에 기대지도 말고, 화려하게 겉 꾸미지도 말고, 소박하게 말하라는 것이다. 개역 성경은 이 대목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라고 번역했다. 그것은 위험이 예기되는 상황에서 어떤 경우에라도 진실을 지키라는 비장한 명령인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아니다. 예수는 사람들의 말살이가 바로 잡히지 않으면 아름다운 세상의 꿈은 남가일몽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너무나 잘 아셨다. 그래서 우리가 말에 덧붙여온 허장성세를 걷어내라는 것이다. 졸가리를 통과한 바람처럼 소박하고 담백하게 말하라는 것이다. 아, 참 어렵구나. 자기를 미화하려는 욕망도 없이,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조바심도 없이, 그 말이 일으킬 정서적 효과에 대한 치밀한 계산도 없이, 자기 내면의 진실에 입각하여 말하는 이들은 얼마나 희귀한가? 삶이 곧 자기 말에 대한 담보인 사람은 얼마나 힘찬가? 시인 정현종은 <장난기>라는 시를 통해 우리들의 말살이의 실상을 아프게, 그러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내 말보다는 아무래도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라고 해야 먹힐 것 같아
나는 장난기가 동하면 가끔 내 말을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라고 하고 말을 한다.
사람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셰익스피어가 안 한 말이 있겠느냐 싶기도 하여) 표정을 고쳐가지고 듣는다.


시인은 '장난기'라는 제목 뒤에 숨어서 제 값을 잃은 말의 운명을 탄식하고 있다. 시인은 말을 다루는 자이니까. 그들은 말이 힘임을 안다. 바츨라프 하벨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똑같은 말이 한순간엔 큰 희망을 방출하다가도, 다른 순간에는 살인 광선을 내뿜기도 한다. 똑같은 말이 한 순간엔 참이었다가 다음번에 거짓으로, 그리고 사태를 명확하게 조명해주다가도 또 다른 순간엔 기만적으로 될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는 찬란한 지평을 열어주다가, 다음번엔 수용소 군도에 이르는 통로를 세우기도 한다. 같은 말이 한 시점에서는 평화의 주춧돌이었다가, 다음 순간엔 그 음절 하나하나마다 기관총 소리가 울려 퍼질 수도 있다."


말의 회복은 시인들만의 몫이 아니다. '말'이 곧 창조의 도구임을 아는 기독교인들이야말로 말의 제값 찾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말에 육신을 부여해야 한다. 말과 삶을 틈 없이 일치시키는 '정성스러운 삶', 예수가 걸었던 그 길을 우리도 걸어야 한다. 종교적 권위의 의상을 입고 기관총 소리처럼 울려 사람들의 영혼을 혼란에 빠뜨리는 말 말고, 욕망의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는 큰 소리 말고, 영혼의 귀를 통해 들어가 가슴과 내장을 거쳐 온 몸 구석구석까지 휘돌다가 마침내 육체를 입고야 마는 말, 그것이 참 말이다. 말이 너무 많았다. 눈빛만으로도 마음을 통할 수 있다면 말은 단순해지리라. 문제는 삶이고 정성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 있는 말을 듣는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