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산상수훈

새로봄:산상수훈(15)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새벽지기1 2020. 6. 5. 06:07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막 13:14). 읽는 자는 깨달으라는 말에 용기를 얻어, 무식한 성경 읽기를 해본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멸망의 가증한 것은 무엇이고, 서지 못할 곳은 또 어디인가? '돈'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없지는 않다. 지금의 세계는 '돈'을 축으로 해서 서에서 동으로 회전하고 있다. 이념도 사상도 돈을 중심으로 기우뚱거리며 돈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시 85:10) 세상은 어쩌면 유토피아, 즉 세상에는 없는 곳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서글프다. 하지만 돈의 파워는 싫든 좋든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중요한 것은 우주의 중심을 도는 것

돈은 권력이다. 하지만 아주 저급한 권력이다. 로또 복권이 불티나게 팔리고, 땅 투기와 아파트 투기에 자본이 몰리고, 교회조차 부동산 투자에 기웃거리는 것도 돈의 지배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 나라' 신민(臣民)으로 살아가려는 이들의 슬픈 숭배행위가 때로는 미시적인 폭력으로, 때로는 거시적인 폭력으로 나타나곤 한다. "돈의 변태적 지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리를 슬그머니 차지해버린 우리 시대의 '멸망의 가증한 것'이 아닐까?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돌의 庭園』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주의 어머니에게 아들 형제가 있었답니다.

바로 지혜의 신과 전쟁의 신이었지요.

아들 형제는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었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이제 둘 다 내 무릎에 앉힐 수가 없구나. 우주를 한 바퀴씩 돌고 오너라. 먼저 오는 쪽이 내 무릎에 앉거라."
전쟁의 신은 자기의 준마를 타고 화살처럼 달려갔습니다.

지혜의 신은 어머니 발치에 앉아 멀어져 가는 아우를 바라보았답니다.

아우가 사라지자 지혜의 신은 일어나 어머니께 절하고 어머니 주위를 세 바퀴 돌고는 무릎에 앉았더랍니다.
몇 년 뒤 전쟁의 신이 숨을 헐떡거리며 돌아와 어머니 무릎에 앉은 형을 발견했습니다.

전쟁의 신은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지요.
"어찌하여 어머님은 형을 무릎 위에 용납하셨습니까? 형은 여기서 꼼짝도 하지 않았을 텐데요."
그러자 어머니가 대답했지요.
"아들아, 중요한 것은 우주를 도는 것이 아니고 우주의 중심을 도는 것이다!"라고

어쩌면 우리는 지금 전쟁의 신이 탔던 말 잔등에 오른 채 얼바람맞은 사람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주장하고, 행동하고, 사건을 만들고, 싸우고, 움켜쥐느라 늘 분주하지만 영혼의 항아리에 감도는 것은 늘 공허한 울림뿐이다. 미디어와 광고는 우리 속에 있는 전쟁의 신을 깨우느라 분주하고, 깨어난 전쟁의 신은 '중요한 것은 우주의 중심을 도는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씀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입술을 감쳐문 채 바깥을 향해 분주히 달려 나간다.


돈이 주는 자유의 한계

돈은 자유인가? 그런 것 같다. 지갑이 넉넉하면 마음도 따라 푼푼해진다. 지갑이 비면 마음조차 궁낀다. 그러나 돈이 주는 자유는 언제나 지갑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자유는 그래서 늘 불안하다. 채움에 대한 강박이 그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돈이 주는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니라 유사(類似)-자유일 뿐이다. 문제는 유사-자유는 자유가 아니라는 데 있다. 오히려 속박이다. 뭔가를 소유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것의 노예로 전락하기 일쑤이다. 임금의 초대에 응하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나는 밭을 샀으니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니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다. 나는 장가들었으니 가지 못하겠다.' 참 자유는 포기에서 온다.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해 끝내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며 예수에게서 멀어져 간 젊은이가 생각난다.

돈은 물론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런 점에서 중립적이다. 하지만 돈은 많은 경우에 악으로 기운다. 그래서 예수님도 재물을 '맘몬'이라 했다. 맘몬은 숭배를 요구하는 우상이다. 돈은 우리 삶의 우선순위 맨 윗자리를 차지하기까지 만족할 줄 모른다. 돈의 독재가 시작되면 우리는 삶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린다. 돈벌이를 위해서 건강도, 신앙도, 신의도, 가정도 뒷전으로 미루어 둘 때가 많다. 스트레스와 불안감은 이런 삶의 당연한 귀결이다. '마음대로 살지 말고 몸대로 살자'는 어느 분의 제안은 매우 신선하다. 마음을 따라 가면 몸이 지치지만 몸을 따라 가면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던가? 그러나 알면서도 잘 안 된다.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돈을 더 버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삶의 아름다운 시간(quality time)은 줄어든다. 풀꽃 앞에 멈추어 서고, 바람과 구름과 별들, 그리고 새들과 눈을 맞추고, 신비로 가득 찬 이 세상을 찬찬히 살펴볼 여유조차 없이 우리는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겅중거리는 것이다. 삶은 전쟁터가 된다. 전쟁의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말을 죄어치면서 우리는 달린다. 숨차게 달리다가 긴급한 문제가 생기면 잠시 멈추어 서서 지나온 삶을 반추해보기도 하지만, 그 문제 상황이 풀리면 재빨리 돈벌이의 전쟁터로 달려 나간다. 이게 우리의 자화상이다. 마귀에게 절하기를 거절해서 끝내 고난의 길을 갔던 나사렛의 젊은이는 그래서 그다지 매혹적이지 않다. 하지만 돈이 주는 쾌락은 거절하기 어려운 매력으로 다가온다. 절정의 쾌락을 억제하기 어려운 것처럼 돈의 포로들은 자기 삶의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다가 결국 파탄을 맞기도 한다.

너무나 분주하게 살아가는 교인들에게 조금 천천히 살라고 하면, 그들은 대개 딱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목사님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라고 대꾸한다. 좀 덜 벌고, 좀 더 규모 있게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면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세상"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게 세상이란다. '세상을 이긴 자'를 믿는 사람들조차 기꺼이 돈의 신민이 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 한다. 또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했다. 어쩌면 이리도 정곡을 찌르는지 모르겠다. 물건이 많아지면, 사랑의 관계는 줄어들고, 존재는 피상적이 된다.


성도, 이슬 떨이

그러면 성도들은 가난해야 하는가? 할 수 있는 만큼 힘껏 가난을 택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자발적으로 가난을 택한 사람들이 있다. 주류사회의 논리에 의하면 그들은 패배자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이슬 떨이들이다. 새벽,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걸어가면서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길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몸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가난했다. 세상에 보냄을 받은 제자들은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눅9:3-4)는 명령을 받았다. 오늘의 교회들은 이 말씀을 외면한다. 한 마디로 이 말씀은 인기가 없다. 교회가 큰 일을 하려면 돈이 많아야 한다는 게 많은 이들의 생각이다. 예수님이 지금 우리 곁에 오신다면 세월이 달라졌으니까 내 지난날의 가르침을 수정하겠다고 하실까 궁금하다.

인도 사람 사티쉬 쿠마르는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핵무기 보유국들을 도보로 순례하면서 반핵운동을 벌이기로 작정하고 스승인 비노바 바베를 찾아갔다. 스승은 제자의 장도를 축하하면서 두 가지를 당부했다. 채식을 실천하라는 것과 일체의 돈을 가져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티쉬 쿠마르는 스승의 당부대로 했다. 무일푼인 그는 어느 곳에 가든 호텔이 아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찾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능력이나 방법을 의지할 수 없었다. 철저한 수동성 속에서 그는 이전에는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인류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두 팔을 벌린 채 완전히 무력해지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셨다. 그는 또한 베드로에게도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하셨다.

어디로 넘어져도 부드러운 데로 넘어질 수 있도록 방석들을 빈틈없이 방에 깔아 놓은 사람들은 들으시라. 악마는 의도적으로 풍족한 데를 따라다닌다. 악마는 좋은 잠자리 곁에 있기를 좋아한다. 필요치 않는 곳에 이런 잠자리가 있거나 혹은 수도생활이 이를 금하는 곳에 그런 것이 있으면 악마는 그런 잠자리 곁에 있기를 더 좋아한다. 늙은 악마는 가난한 자와 관계하는 것을 질색하며, 극도의 가난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알몸이 된 사람을 피한다.

프란체스코의 이런 가르침은 부하기를 구하는 우리 삶의 기초를 뒤흔들어 놓는다. '하나님으로부터 살 것인가' 아니면 '돈으로 살 것인가?'. 섬김의 문제에 관한 한 어중간한 길은 없다. 그것은 양자택일의 문제이다. 진리에 어섯눈뜬 우리들은 돈과 하나님 사이에서 한없이 흔들린다. 하지만 어머니 주위를 몇 바퀴 돌고는 그 무릎 위에 앉은 지혜처럼 우리도 '중심'이신 하나님께로 자꾸만 돌아가야 한다. 그 길에는 '나눔'이라는 포석이 깔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