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산상수훈

새로봄: 산상수훈(17)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새벽지기1 2020. 6. 19. 06:55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샴쌍둥이처럼

우리는 얼마 전 이란의 샴쌍둥이 자매 랄레와 라단이 분리 수술 도중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방송 진행자가 되고 싶었던 랄레와 변호사로 성공하고 싶었던 레단, 이들 자매의 꿈은 이제 세월의 강물에 잠기고 말았다. 머리가 붙은 채로 태어나 둘인 하나로, 하나인 둘로 살아왔던 그 서럽고 고단한 생의 여정이 끝난 것이다. "신의 뜻은 더 나은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라는 것이었다"고 말하며 흐느끼는 아버지의 오열을 뒤로 한 채 그들은 평소의 소망대로 각자 다른 곳에 묻혔다. 그들은 행복할까? 속된 질문이 아픔 속에서 떠오른다. 엉덩이가 붙어있던 한국의 샴 쌍둥이 자매 사랑이와 지혜는 다행히도 분리 수술에 성공해서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한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그들을 통해 배운다. 아이들의 몸은 이제 분리되었지만 그들의 영혼 속에서 '사랑'과 '지혜'는 늘 하나였으면 좋겠다.

때때로 우리 삶이 샴쌍둥이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랑과 미움, 거룩함과 속됨, 용기와 비겁, 부드러움과 딱딱함, 불멸과 소멸의 공속, 이것이 우리 삶의 실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대립항들은 어쩌면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분리해내기 어려운 표리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노아의 방주에 승선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짝을 지어야 했던 것처럼, 추수 때까지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처럼, 자기모순 속에서 살아감이 무에서 빚어진 존재의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잘 산다 함은 우리 속에 있는, 혹은 역사 속에 나타나는 대립과 갈등을 조화시킬 줄 아는 것이 아니겠는가? 제 아무리 정교한 칼 솜씨를 자랑하는 포정( 丁, *<<莊子>>의 <養生主> 편에 나오는 소 잡는 명인. 그는 소의 뼈와 살 사이에 있는 틈으로 칼을 밀어 넣었기에 19년이나 사용한 그의 칼은 늘 방금 숫돌에 간 칼날 같았다 한다)이라 해도 선과 악을 두부 모 자르듯 갈라놓을 수는 없을 터이니 말이다. 인간사에는 절대적인 옳음도 절대적인 그름도 없지 않은가.


어떤 행동이 곧 그의 존재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씩 현실을 재단하고, 사람들의 값을 매긴다. 선무당 사람 잡듯 판단의 칼날을 마구 휘둘러 스스로 상처를 입기도 하고, 다른 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맘에 드는 사람과 싫은 사람, 기분 좋은 일과 기분 나쁜 일, 그리고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은 거의 습관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물론 몸을 가지고 살면서 시비와 곡직을 가리지 않을 수는 없다. 참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오히려 시비와 곡직을 판단할만한 예리한 식견을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판단이 기초하고 있는 자의성이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변덕스러운 '나'가 될 때 진실은 자취를 감춘다.

우리가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은 그가 전적으로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행태(行態)가 나의 감정을 상하게 하였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누군가를 비난하는 심리의 이면에는 알게 모르게 그의 행동을 자의적으로 조종하고 싶은 권력욕이 있다. 예수는 그런 우리에게 도무지 심판하지 말라고 한다. 옳고 그름에 눈감으라는 말이 아니다. 어중간한 중간을 취함으로 다른 이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라는 처세훈도 아니다. 예수에게는 애당초 지켜야 할 '자기'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말은 우리에게는 다른 이의 행동이나 존재를 결정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할 자격이 없음을 알라는 말이 아닐까? 물론 어떤 개별적인 행위에 대해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이야 필요한 일이다. 그것이 이기적인 자아가 아니라 진실에 터하고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개별적인 행태들이 그의 존재 전체에 대한 판단의 근거로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마음은 '천사와 악마의 투기장'이라지 않던가? 때로는 천사가 승리하기도 하지만, 악마가 승리를 거둘 때도 있는 것이 우리 삶이다. 설사 그의 행동이 악에 치우칠 때가 많다 해도 그것이 곧 그의 존재는 아니다.


오지랖은 넓지만 팔은 짧구나

예수는 모든 판단과 비판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한 존재에 대한 미움과 멸시에서 비롯되는 판단을 금하신다. 건전한 비판은 꼭 필요한 일이다. 비판 없이는 큰 정신이 나올 수 없지 않은가. 유약해진 정신들만이 비판을 두려워한다. 우리가 취하고 있는 삶의 방식이나 입장에 대한 질정(叱正)이 없다면 정신은 높은 곳을 향해 나갈 수 없다. 그러면 모든 건전한 비판 또는 이성적인 판단은 좋은 것인가? '모든' 비판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한 존재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담기지 않은 비판은 종종 그의 '에고'를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기 쉽다. 듣기 좋은 말도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이다. 생명이 자라기 위해서는 적당한 온도가 필요하듯이 새로운 존재 혹은 역사는 사랑이라는 품에서만 태어난다. 오지랖은 넓지만 팔이 짧은 게 문제다.


누굴 보듬어 안을 만큼
팔이 길었으면 좋겠는데
팔이 몸통 속에 숨어서
나오기를 꺼리니
손짓도 갈고리마저 없이
견디는 날들은 끝도 없는데
매사에 다 끝이 있다 하니
기다려 볼 수밖에
한 달 짧으면
한 달 길다 했으니
웃을 수밖에
커다랗게 웃어
몸살로라도 다가가
팔 내밀어 보듬어 볼 수밖에.
(김지하, <사랑> 전문)


몸통 속에 숨은 팔을 끄집어내야 할 일이다. 좌우로 갈리고, 이해타산에 따라 갈리고, 경쟁에 지쳐 안으로 오그라든 팔을 내밀어 다른 이의 삶을 무작정 끌어안는 연습을 해야 한다. 사람들이 삶에 지칠 때 하늘을 바라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두를 하나로 감싸안는 크고 텅 빈 가슴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대립과 갈등을 넘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앞에 두고 바리새파 사람들은 기세가 등등하여 예수께 묻는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요 8:4-5) 이 질문은 양날 칼과 같아서 어느 쪽을 택하든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 생각했다. 깨어 있는 사람을 시험하거나 함정에 빠뜨릴 수는 없는 법이다. 대답을 다그치는 그들에게 예수는 말한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에 담긴 함의는 자기에게 죄가 없을 때에만 죄를 판결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예수의 말은 그 여인을 향했던 그들의 마음이 자기 자신들을 향하도록 했다. 그리고는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썼다. 그 글귀가 무엇이든 이제 남은 자들은 자기의 어둠을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예수가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길로 그들을 노려보면서 그런 말을 했다면 그들의 에고는 강화되었을 것이다.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그 자리를 떠나고 마침내 홀로 남게 되었을 때 예수는 몸을 일으켜 여인을 향한다. 그리고 조용히 묻는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여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대답하자 이윽고 말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예수는 그녀를 비난하지도 않았고, 정죄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새로워졌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다. 또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다. 사랑을 심으면 사랑이 자라나고, 미움을 심으면 미움이 자라난다. 사랑이 담긴 말을 심으면 창조적 삶의 열매가 맺힌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낳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본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거짓말, 왜곡, 터무니없는 비난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애정이 담기지 않는 말도 역시 생명을 억압한다. 인간의 모듬살이에 대립과 갈등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대립과 갈등을 넘어 화해를 지향하는 것이 인간다움이 아니겠는가? 치열한 대립 속에서도 '너'에게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끊지 말아야 한다. 그 다리의 이름은 '사랑'이다. 정죄나 심판은 사랑과 소통의 거부이며 포기이다. 그것은 자기 속에 머물겠다는 애집이며, 다른 이에게로 이행해가면서 함께 성장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예수는 엄중하게 경고한다.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마 7:2) 어쩌면 이 말은 신은 우리가 이웃을 바라보는 그 눈으로 우리를 보신다는 말일 것이다. 자기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이웃의 눈에서 티끌을 찾는 우리들이다. 이웃의 눈에서 티끌보다 아픔과 눈물을 볼 때 우리는 비로소 함께 살아감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몸살로라도 다가가 팔 내밀어 보듬어 보자. 심판하기를 그만둘 때 우리 팔은 길어진다. 비록 모든 것을 품을 만큼 충분히 길지는 않다 해도, 매사에 다 끝이 있다지 않은가. 한 달, 일 년, 아니 생이 다하는 날까지라도 팔을 벌리면 우리는 어느새 하늘에 안겨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