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산상수훈

새로봄: 산상수훈(18)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새벽지기1 2020. 7. 6. 14:09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어야

가까운 선배가 안부 전화를 해왔다.

별일 없느냐는 안부가 오간 후에 나는 마치 옆구리에 칼을 들이대듯 느닷없는 요구를 했다.
"나 이번에 황금률 가지고 글을 쓰려고 하는데 뭐 하나 선물로 줄 이야기 없수?"
대뜸 돌아온 대답은 이렇다.
"너는 너 자신이나 잘 대접하고 살아."
"정말 그렇지?"
잦아드는 목소리로 그렇게 대꾸하고 나니 가슴이 허해진다. 다른 이들 눈에 비친 내 모습이 꼭 이 모양이구나 생각하니 참 속상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을 잘 대접하며 살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나 않겠다. 무언가로 늘 분주했지만,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살맛을 안겨 주지 못했다는 자책이 벌레처럼 내 마음속을 기어다닌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자기를 잘 대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남도 잘 대접할 수 없다. 결국 내가 잘 사는 것이 남을 잘 대접하는 길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긍정할 수 없는 사람은 남도 긍정할 수 없는 법이다. 그들은 자기 속에 지옥을 만들고는 남들도 그 지옥으로 끌어들인다.

"세상에 보탬이 되는 훌륭한 인간이 되려 애쓸 것 없다. 자기 선 자리에 충실하고 해야 할 일을 하며 조용히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가 너무 퇴영적인 것이 아닌가 의심했던 적도 있지만, 살아보니 그 정도만 해도 꽤 괜찮은 삶이다. 자공(子貢)과 공자의 대화도 이런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한 마디로 평생토록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서(恕)일게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라. 己所不欲, 勿施於人"(衛靈公篇, 23편)

주자는 이 말을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면 그 베풂이 무궁하다"고 풀었다. 역지사지하라는 말일 게다. 우리는 남에게 유익을 끼치겠다는 지나친 의욕이 오히려 생명의 왜곡을 가져오는 경우를 많이 본다. 고치에서 막 깨 나오는 나비를 돕는다고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었다가 결국에는 나비의 날개를 기형으로 만들어버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작중인물 '조르바'처럼, 우리의 선의가 누군가의 삶에 폭력이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이 대목을 떠올릴 때마다 '내 아이는 남달라야 한다'는 부모들의 강박관념이 아이들을 아이다운 삶으로부터 추방하는 작금의 현실이 떠오른다. 우리는 "∼을 위하여"라는 말에 담긴 잠재적 폭력성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대상이 되는 존재의 형편보다는 행위 주체의 의욕이 중심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을 하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은 수동적인 듯 싶지만 매우 현실적이다.


남 좋을 대로 하라

그런데 예수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가르친다. 자칫 잘못하면 이것은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좋은 게 좋은 거지' 식의 공리주의적 가르침으로 오용될 수 있다. 우리가 뭔가를 기대하기에 선을 행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선'이 아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이 만일 보상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면 그의 행위는 도덕적이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예수는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눅14:12)고 말한다. 오늘은 내가 그대를 청했으니, 그대도 나를 청하여야 한다는 유치한 품앗이가 목사들 세계에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가히 기가 막히지 않은가? 헌금을 바치는 내심의 동기가 더 많은 것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유치한 발상인가? 많은 이들이 신앙을 행복한 삶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삼는다. 하지만 예수는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식의 삶을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가 가르치는 아름다운 삶의 초점은 '남'이다. 한마디로 나 좋을 대로 하지 말고, 남 좋을 대로 하라는 말이다. 나에게 좋은 것이 남에게도 꼭 좋은 것은 아니니 말이다.

소와 사자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을 하고 혼인을 했다. 소는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다. 사자는 싫었지만 참았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다.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다. 참을성에도 한계가 있는지라 둘은 다투다가 끝내 헤어지고 말았다. 그들이 헤어지면서 한 말은 "난 최선을 다했어"였다.(박해조, <눈먼 최선은 최악을 낳는다>를 풀어 인용).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최선은 최악이 될 수 있다. 입장의 동일함이 전제되지 않은 진정한 이해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삶이란 나에게서 벗어나 너에게로 건너가기 위한 다리를 놓는 과정이 아닐까? 나의 자리를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면서 다가오지 않는 너를 원망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참 멋진 삶은 '더불어 함께' 경험하는 것이다. 자기 주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다른 이들과 더불어 어울릴 줄 아는 존재가 되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생명의 징표이다. 다른 이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자아'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오랜 습속과 욕망 위에 세워진 거푸집 말이다. 하지만 고래 힘줄보다 더 질긴 자아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자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면 자아의 속박은 인간의 아 프리오리(a priori), 즉 존재론적 한계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 한 것이 자아에 매인 존재의 탄식이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 한 것은 자아로부터 해방된 존재의 찬가이다. 이 둘 사이를 매개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한없이 왜소해진 자기에 절망한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접속하는 순간 자유인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자기로부터 해방된 사람은 남을 배려함에서 기쁨을 맛본다. 조각가인 교우 한 분이 들려준 이야기이다. 그는 지금까지 작품을 제작하면서 스스로 만족스러웠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글이든 그림이든 건축이든 음악이든 삶이든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그런 불만족의 원인을 표현의 한계에서가 아니라 작품 제작 동기의 불순함에서 찾았다는 사실이다. 포이에시스(poiesis), 곧 작품의 제작이 아름다운 삶의 재현 혹은 구성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타인들로부터의 인정이나 물질적인 보상을 목표로 했기에 만족을 얻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관심의 초점이 되는 한 어쩌면 만족은 항상 연기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순수한 제작의 기쁨을 맛본 때가 꼭 한번 있었다 한다. 그것은 앞을 보지 못하는 친구의 누나를 위해 20점의 크리스마스 카드를 드렸을 때였다. 자기가 그린 그림을 볼 수도 없는 이들을 위해 그는 가장 큰 기쁨과 열정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가 경험한 가장 순수한 행복의 시간이었다. 어쩌면 그 순간은 그가 답답한 삶의 질곡 속에 갇힐 때마다 돌아가고 싶은 순수의 시간, 곧 영원으로 빛나는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는 자기로부터 해방된 존재의 삶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내가 받고 싶은 대접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하셨기에 내가 어떤 대접받기를 원하는지를 생각해본다.

무엇보다도 나의 존재를 존중받고 싶다.

누군가에게 강요당하기 싫다는 말이다. 외적 강제가 내 행동을 규정한다면 그 속에는 기쁨이 없다. 예수의 가르침을 '지배의 포기'로 설명한 로핑크의 통찰에 나는 놀랄 뿐이다. 나의 경험, 지식, 권력, 믿음이 누군가를 타율적으로 지배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 아, 하지만 강제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의 존재에 대한, 더 나아가서 그의 존재의 근거이신 분에 대한 근원적 신뢰와 참을성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가급적이면 덜 강요하는 삶을 살겠다.

나는 용서받고 싶다.

알게 모르게 내가 상처를 입힌 모든 이들과, 내가 훼손한 모든 피조 물들로부터. 그리고 내가 소홀히 해온 나의 몸으로부터. 이런저런 욕망의 짙은 구름으로 무거워진 나의 영혼으로부터. 용서란 받아들여짐이 아닌가? 내가 용서받고 싶은 것처럼, 마음 밖으로 밀쳐냈던 모든 이들에게 이제는 마음을 열어야겠다.

아이들에게 제일 싫은 게 뭐냐고 물었더니 자기와 남을 비교하는 것이라 했다. 나도 그렇다. 교회와 교역자들이 크기의 신화에 매여있는 것이 영 가슴 아프다. 비교에 근거한 우월감과 열등감처럼 사람을 유치하게 만드는 것이 없다. 맹목적인 크기의 숭상이야말로 우리가 앓고 있는 고질병이다. 인간적 규모를 넘어선 크기가 빚어내는 파행을 우리는 바야흐로 목도하고 있다. 모든 비교는 척도를 전제로 한다. 문제는 그 척도가 비교 당하는 이의 외부에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능력과 그의 현실을 비교하지 않는다. 자기의 기대/성취와 그의 현실을 비교한다. 그렇기에 비교에 입각한 관계에서 칭찬은 예외적으로만 주어지고, 각 개인의 독자성은 고려되지 않는다. 이것은 그를 창조하신 분에 대한 모독인 동시에 생명의 낭비이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긍정한다는 것, 그보다 소중한 대접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