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산상수훈

새로봄: 산상수훈(19)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새벽지기1 2020. 7. 26. 07:50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가을이 흰 안개를 흩뜨린다
늘 여름일 수는 없으니!
밤은 등불 빛으로 나를 유혹하며
추위를 피해 어서 귀가하라고 한다.

머지 않아 나무는 헐벗고 정원은 텅 비겠지.
그저 야생의 포도송이만 집 주위에서 빛을 발하겠지.

그리고 머지않아 그 역시 지고 말겠지.
늘 여름일 수는 없으니!
―헤르만 헤세, <가을의 시작> 부분


헤세의 시를 읽다가 '늘 여름일 수는 없으니!' 하는 구절에 그만 사로잡히고 말았다. 내가 지금 인생의 계절 중 늦여름을 지나고 있는지 초가을을 지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지만, 헤세의 시구를 타고 찾아온 적요함은 쉬 물러갈 줄을 모른다. 겨울산을 좋아한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처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머지 않아 나무는 헐벗고 정원은 텅 비겠지' 하는 구절이 자아내는 쓸쓸함만은 어쩔 수가 없다. 제법 비감한 상념에 잠겨있는 참인데, 아내가 홍옥 한 알을 손에 쥐어주고 나간다. 무심히 사과를 베어 물다가 입안 가득 번져오는 신맛에 혼곤하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적에나 접한 듯 손에 잡힌 사과를 바라본다. 빛과 어둠을 머금은 듯 붉으레한 빛깔이며,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는 몸체, 감각을 일깨우는 신맛까지 어느 것 하나 기적 아닌 것이 없다. 큰 생명의 기운이 사과 한 알로 맺혀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속깊은 곳에서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무엇을 머금어, 어떤 열매로 자라고 있는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예수는 양의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나아오지만 실상은 노략질하는 이리에 불과한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라고 하신다. 문제는 거짓 예언자들과 참 예언자들이 겉보기에는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식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가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양지꽃과 노랑제비꽃을, 벼와 피를, 진달래와 철쭉을 구별하지 못하듯이 참과 거짓을 옳게 식별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거짓 예언자들은 어쩌면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이 처신한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나 종교적 진지성도 매우 견실하다. 그들의 얼굴은 매우 부드럽고 약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스스로가 가짜임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도 주입된 공상과학 영화의 싸이보그가 자신을 참 인간으로 아는 것처럼, 그들은 자기들만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시뮬라크르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실체가 아닌 이미지에 집착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진짜와 가짜는 구별될 수 없는 것인가?

예수는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가시나무가 포도열매를 맺을 수 없고,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다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한 사람이 어떠한 존재인지는 그의 자기 진술이나 자기 규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있음이 주위에 일으키는 파장을 통해 드러난다. 근사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사람들 속에 허영심과 부산스러움의 파장을 일으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은밀한 욕망과 두려움을 이용한다. 한편으로는 욕망을 부추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주입한다. 욕망의 포로가 된 사람들, 내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래서 거짓 가르침의 포로가 된다. 예수는 사람들을 해방하지만 거짓 예언자들은 사람들을 확고히 묶어놓는다. 지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권위에 종속된 사람들은 주체로 설 수 없다. 그들은 배운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처신한다. 그들에게서 진실함이나 인격의 향기를 맡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지만 주위에 행복과 순수와 불멸의 아우라를 드러내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사람들을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나'의 경계를 넘어 타자들의 삶을 향해 흘러가도록 우리 가슴에 길을 낸다. 그들은 진리의 일부를 전부인양 호도하는 법이 없다.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도 않는다. 자기와 다른 견해와 입장을 가진 사람을 경멸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겸허히 인정하면서 다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가 있는 곳에서 불화는 사라진다. 그의 곁에 서 있기만 해도 타오르던 욕망이 잦아들고, 거룩한 생의 열망이 일어난다. 그들은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누군가의 가슴속에 빛의 알갱이를 흩뿌려 삶을 축제로 바꾼다.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연기는 자욱한데 불꽃은 없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심판처럼 두려운 말씀이다. 엘로이즈와의 사랑으로 유명한 중세의 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는 자기 학문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 당시에 가장 저명한 스콜라 신학자였던 라옹의 안셀모를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곧 스승에 대해서 실망하고 만다. 그의 명성은 재능이나 학문적인 능력이 아닌 노련함으로 얻은 것임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보내는 글에서 아벨라르는 안셀모라는 존재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안셀모는 다수의 청중 앞에 있을 때에는 그야말로 경탄할 만한 존재였으나 질문자와 마주 앉았을 때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 언어 구사는 절묘했지만 내용은 알맹이가 없었으며 이론은 공허했네. 그가 강의에 불을 붙였을 때 그의 집은 연기로 가득 차긴 했으나 빛이 비치지는 않았던 것일세.
안셀모라는 나무는 잎이 무성하여 멀리서 볼 땐 당당하게 느껴지지만, 가까이 가서 주의깊게 살펴보는 사람은 그 나무에는 열매가 없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되지."

연기는 자욱한데 불꽃은 일지 않는 삶,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는 삶은 얼마나 허황한가? 국민 5명 가운데 한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자랑하는 우리의 처지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거대한 교회는 하나둘 늘어가고, 화려한 언변의 자칭 목자들은 많지만 '있음'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에 감화를 일으키고, 세상을 정화하는 큰 혼은 찾아보기 어렵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 치고 첫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 있던가? 명성과 부를 멀리한 채 끝없이 자기를 지워갔던 고독한 은수자들의 삶은 그저 세계가 지금보다 1800년 정도 젊었을 때에 있었던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는가? '연기는 자욱한데 불꽃은 보이지 않네.' 만일 이것이 한국 교회와 교인들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지적이라면…아, 두려운 일이다.

순수와 불멸의 아우라를 잃어버린 종교, 오직 자기 확장의 욕망에 휘둘리는 종교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수 없다. 모든 성장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내적인 온축이 없는 성장은 웃자란 식물처럼 허약하게 마련이다. 노자는 도덕경 24장에서 "까치발로는 오래 서지 못한다. 가랑이를 한껏 벌려 성큼성큼 걷는 걸음으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기<足+支>者不立, 跨者不行) 했다. 까치발을 선다는 것은 남보다 크게 보이려는 것이고, 가랑이를 한껏 벌리고 걷는다는 것은 남보다 앞서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욕은 반드시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게 마련이다. 일시적으로는 남보다 커 보일 수도 있고, 남보다 앞설 수도 있다. 하지만 폭로되게 마련이다. 기독교인들이 사로잡힌 허장성세는 또 얼마나 애처로운가. 경쟁적으로 교회 건물을 크게 지으려는 시도, 이런저런 명목으로 헌금을 거둬들이는 시도, 영혼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사랑보다는 물량적인 세 불리기에 집착하는 전도의 열심조차 때로는 순수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으니 말이다.


햇빛의 선물

열매는 맺지 못한 채 잎만 무성한 나무는 얼마나 애처로운가.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서, 내 치부를 가리고 있는 허세가 한꺼풀씩 벗겨지는 그 두려운 때를 예감한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몸이 느끼는 추위는 어쩌면 내면의 부실에 대한 예감 때문이 아닌가싶다. '도'는 우리가 취하는 허장성세를 가리켜 '찌꺼기 음식'(餘食), 혹은 군더더기 행동(贅行)이라 한단다. 벗고 벗고 또 벗어 말끔히 비워야 할 때다. 비우지 않고야 어찌 고마움을 알겠는가.


시방 여릿여릿한 햇빛이
골고루 은혜롭게
하늘에서 땅으로 내리고 있는데,
따져보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무궁무진한 값진 이 선물을
그대에게 드리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건만
내가 바치기 전에
그대는 벌써 그것을 받고 있는데
어쩔 수가 없구나.
다만 그 좋은 것을 받고도
그저 그렇거니
잘 모르고 있으니
이 답답함을 어디 가서 말할 거나. (박재삼, <햇빛의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