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산상수훈

새로봄: 산상수훈(20)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새벽지기1 2020. 8. 9. 07:04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일하는 사람의 그림 

 

노동자 시인 백무산은 어린 시절 또래 아이들이 집을 그릴 때 지붕부터 그렸지만 자신은 주춧돌부터 그렸다 한다. 목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집은 밑에서부터 짓는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는 어느 평자의 표현대로 '인프라적 시각'이 돋보인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널리 알려진 신영복 선생은 논리나 사상은 추상적 관념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면서 발로 설 때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감옥에서 만난 목수 할아버지의 예를 들고 있다.  

 

나와 같이 징역살이를 한 노인 목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언젠가 그 노인이 내게 무얼 설명하면서 땅바닥에 집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에서 내가 받은 충격은 잊을 수 없습니다. 집을 그리는 순서가 판이하였기 때문입니다. 지붕부터 그리는 우리들의 순서와는 거꾸로였습니다. 먼저 주춧돌을 그린 다음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 지붕의 순서로 그렸습니다. 그가 집을 그리는 순서는 집을 짓는 순서였습니다. 일하는 사람의 그림이었습니다. 세상에 지붕부터 지을 수 있는 집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붕부터 그려온 나의 무심함이 부끄러웠습니다. 나의 서가(書架)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낭패감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책을 읽다가 '건축'이라는 단어를 만나면 한동안 그 노인의 얼굴을 상기합니다.(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90쪽) 

 

한 지식인의 서가가 한꺼번에 무너질 정도의 낭패감을 안겨준 것은 새로운 이론도, 위대한 상상가도 아니었다. 이마에 땀을 흘림으로 살아가는 한 사람이었다. 땀흘려 일하는 이 앞에서 열패감을 느끼는 것은 비단 그만이 아닐 것이다. 

 

예수는 산상수훈을 마치면서 당신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지만, 듣고도 행치 않는 사람은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한다. 어린 시절을 목수인 아버지 곁에서 지내고, 청년 시절을 목수로 보낸 청년 노동자 예수의 가르침은 이처럼 담백하고 단단하다. 그의 가르침에는 관념의 기름기가 배어있지 않다. 몸으로 익힌 지혜에는 관념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요한은 예수의 삶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1:14)는 말로 요약했다. 신학적인 의미가 무엇이든 그 말의 울림이 매우 깊지 않은가? 예수의 존재는 말씀의 현존이었다. 달리 말해 예수는 몸이 된 말씀 그 차체였다는 것이다. 예수의 마지막 말 가운데 하나는 "다 이루었다"였다. 그것은 예수의 화육의 마침표가 아닐까? 화육을 그리스도론적 신비의 틀 안에만 묶어둔다면 그 말이 갖는 역동성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화육은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신앙적 사건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근원적 말씀이 우리 삶의 배후에서 울려퍼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기독교인들은 말은 잘 해"라고 말할 때, 그것을 칭찬으로 알아듣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 우스운 일이다. 그 말 뒤에 생략된 괄호 속의 말이야말로 그가 정작 하고 싶던 말이기 때문이다. 삶으로 번역되지 않은 말은 공허하기 이를 데 없다. 가끔 가위에 눌리듯 나를 통해 나갔으나 미처 삶으로 번역되지 못한 말들에 짓눌릴 때가 있다. 유창할지는 모르겠으나 사람들의 가슴 근처에도 가 닿지 못하고 추락해버리고 마는 말들의 운명을 생각할 때마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싶을 때가 많다. 어떤 때는 "당신은 말한 대로 사냐?"고 부르댈 것만 같아서 미리 '그러고 싶다'는 말로 방어막을 치기도 하지만, 몸의 언어를 익히지 못한 자의 추레함은 숨길 길이 없다. 차라리 성 프란체스꼬처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는 지친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고, 무거운 물동이를 나르는 사람을 도와주고, 가슴이 울울한 이들 곁에 머물면서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곧 설교라고 했다. 그런 설교를 하며 살고 싶다. '하면 되지' 하는 대꾸가 들려오는 듯하여 다시 낯이 붉어진다. 

 

● 희떠운 말의 성찬을 넘어   

 

신앙생활이란 '고백'을 '삶'으로 번역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고백은 활동 속에서만 진실임이 드러난다. 희떠운 말의 성찬 속에서 우리는 더욱 배고프다. 지금까지 우리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일에 익숙했다. 와우 아파트에서 성수대교로, 그리고 삼풍백화점에서 대구지하철로 이어진 무너짐의 전통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부실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는가를 반증한다. 경제대국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호언장담은 해마다 불어오는 태풍 앞에서 속수무책인 우리의 현실 때문에 그 빛을 잃는다. 우리 문화는 웃자란 벼처럼 균형과 방향을 잃어버린 채, 감각적인 쾌락의 늪에서 부유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소중한 것들은 시간과 정성의 공력이 들어가야 무너지지 않는다. '빨리빨리'와 '대충' 그리고 '알게 뭐야'라는 단어가 언제든 호출받을 준비를 갖춘 채 우리 목 근처에 머물고 있는 한 우리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7) 하신 주님의 말씀이 허언이 아님을 늘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인생은 어쩌면 집 짓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또박또박, 굳건하게 지을 일이다. 현대인들은 모두 새로운 유목민들인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들 하지만, 정신적 유목에도 베이스 캠프는 필요하지 않던가? 소설가 이윤기는 자기에겐 '서재'가 정신적 유목의 베이스 캠프라 했다. 그를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 베이스 캠프도 어쩌면 신영복이 경험했던 낭패감으로 흔들릴 수도 있다. 흔들리지 않는 집, 그게 가능한가? 예수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고 했다. 교회의 성장이란 교인수의 증가로 가늠할 수 없다. 예수의 말씀이 어떻게 교인들의 삶과 교회의 구조 속에서 구현되느냐가 그 척도가 되어야 한다. 또 다시 낯이 붉어진다.    

 

하지만 다시 출발선에 설 일이다. 인간성이 무너져내린 폐허 위에 서서, 손으로 발로 그 잔해를 걷어내고, 그 위에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한다. 믿음으로 바닥을 다지고, 수직의 중심을 잡아 삶의 재료들을 쌓아올리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과 어깨를 곁고 높이 오를 일이다. 기도의 골방과 사귐의 사랑방도 만들고, 사랑과 섬김으로 창문을 내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지붕을 삼아야 한다. 너무 늦은 때가 가장 이른 때라는 말을 지팡이로 삼아볼 일이다. 우리가 일단 내달으면 그분이 안아서 날라 주실 것이니.     

 

산상수훈 여행을 마치면서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시를 다시 읽는다.  

인간을 사랑하라. 그대가 바로 그이기에. 동물과 식물을 사랑하라, 그대가 바로 그것들이기에, 이제 그것들은 마치 신의 깊은 동료들이나 노예처럼 그대 뒤를 따른다 그대의 육체를 사랑하라. 육체가 있어야만 이 대지에서 싸울 수 있고, 물질을 영혼으로 변화시킬 수가 있다 물질을 사랑하라. 신은 거기에 이빨과 손톱을 꽉 박은 채, 싸우고 있다. 그와 함께 싸우라 매일 죽으라. 매일 태어나라. 매일 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하라. 보다 훌륭한 덕성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스스로를 낮추어 질문하지 말라. "정복할 것인가, 정복당할 것인가?"를 묻지 말라, 싸움을 계속하라! 그렇게 해서 우주의 사업은 덧없는 동안이지만 그대가 살아있는 동안에 그대 자신의 사업이 될 것이다.

동지여! 이것이 바로 우리의 새로운 십계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