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가족, 십자가 아닌 날개 (신명기6:4-9)

새벽지기1 2018. 5. 22. 22:41


지난 주일 가족은 인간의 중심이고, 가족은 거래적 관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돈주머니가 하나라는 것이 가족의 최고의 특징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도 그 연장선에서 몇 가지를 더 나누고자 합니다. 최근에 소설가 공지영 씨가 인터뷰한 기사를 봤습니다. 인터뷰 말미에 기자가 묻더군요. 공지영 씨에게는 성이 각기 다른 세 자녀가 있는데 그 자녀가 작가에게 어떤 의미냐고.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제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저의 날개였어요. 아이들 때문에 다시 글을 썼고, 그렇게 쓴 글들이 제 대표작들이 됐으니까요.” 저는 이 대답을 듣고 참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옳습니다. 공지영 작가의 말대로 가족은 무거운 십자가 같은데 사실은 날개입니다. 가족이라는 날개가 있기 때문에 광야와 같은 이 세상을 꿋꿋하게 살아내는 것이고, 한반도보다 더 무거운 삶의 무게를 견뎌내는 것입니다.

 

장 지글러라는 매우 실천적인 사회학자가 쓴 [인간의 길을 가다]라는 인문학적 자서전에 브라질 동부의 해변가에서 만난 한 아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모임을 갖고 있는데 열 살 남짓한 사내아이가 땅콩 파는 것을 목격합니다. 지글러는 그 아이가 마음에 걸려 뒤좇아 갔습니다. 이름이 요아킴인 그 아이는 소년 가장이었습니다. 결핵으로 고생하는 아버지, 어린 동생 넷, 병든 어머니를 먹여 살려야 하는 소년 가장이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눈 지글러는 옆에 있는 선술집 주방장에게 가서 아이가 앉아 있는 바위에 음식을 좀 차려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잠시 후 음식을 내오자 소년은 먹지 않고 바위 위에 낡은 신문을 펼치더니 밥, 닭고기, 흔한 열대과일, 페이조아, 새우요리 카루루, 셀러드, 케이크 등을 싸서 끈으로 묶은 다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답니다. 하루 종일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위해 음식을 챙겨 간 거지요. 자기도 배가 고팠겠지만 혼자 먹지 않고 가족을 챙긴 겁니다. 누구도 돌보지 않는 가족을 열 살 아이가 챙긴 겁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콩 하나라도 나누어 먹는 것,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것, 온 세상이 외면해도 마지막까지 외면하지 않고 기다려주고, 온 세상이 돌을 던져도 끝까지 돌을 던지지 않고 품어주는 것이 가족입니다.

 

5월12일, 어제가 저의 또 다른 생일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주책없이 생일이 세 개나 있습니다. 어머니 몸에서 태어난 날이 첫 번째 생일이고, 예수님 안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날이 두 번째 생일이고, 아들에게서 간 이식을 받아 새롭게 살아난 날이 세 번째 생일입니다. 어제가 바로 세 번째 생일이었습니다. 벌써 9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9년 전 그날 아침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첫 새벽에 저보다 앞서 수술실로 들어가는 아들을 배웅하던 그 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저보다 앞서 수술실로 향하는 아들의 손을 꼭 잡고 가다가 저는 수술실 입구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 멈췄습니다. 그러자 다운이가 손을 흔들면서 ‘아빠 잘해’라며 씩 웃었습니다.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또 10시간의 대수술을 마치고 마취에서 깨어나 엄마를 만났을 때에도 제일 먼저 ‘아빠 수술에 들어갔어?’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사전 검사를 충분히 했지만 아들의 배를 열어보고 간 상태를 확인한 다음 간이 건강해야 떼어내 이식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게 염려됐던 모양입니다. 아내가 막 깨어난 아들을 매만지며 ‘응. 지금 수술중이셔’라고 하자 그때서야 ‘아, 이젠 됐다’며 안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9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9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들은 한 번도 ‘아버지 때문에 자기가 생고생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마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들은 오직 아버지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자기 몸을 찢고, 자기 간의 절반을 내어주는 대수술을 감행했습니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그런 아들이 결혼할 때에도 방 한 칸 마련해주지 못했습니다. 다 빚으로 신혼살림을 시작했어요. 당연히 4년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빚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 마디 불평이 없습니다. 며느리와 함께 빚 갚아가며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족입니다. 아무 대가 없이 자기 몸을 찢고 자기 간의 절반을 내어줄 수 있는 것이 가족입니다.


가족은 정말 소중하고 특별한 관계입니다. 가족이 아니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가족 안에서 일어납니다. 우리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살고 있지만 가족처럼 깊고 독특하고 특별한 관계는 없습니다. 모든 조건을 초월하고 모든 이유를 넘어서는 관계는 사실 가족 외에는 없습니다. 물론 남보다 못한 가족도 적지 않고, 가족이 원수인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족은 매우 특별한 관계입니다. 여타 다른 관계와는 형식도 다르고, 내용도 다릅니다. 같은 아픔이라도 가족에게 받는 아픔이 더 크고, 같은 기쁨이라도 가족에게 받는 기쁨이 더 큽니다. 이처럼 가족은 아주 독특하고 특별한 관계입니다.


몇 년 전에 영국 런던에서 ‘가정이란 무엇인가?’ 라는 제목으로 현상 모집을 했나 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응모했고 그중에 7개가 당선작으로 발표되었는데 인상적이라고 생각된 것 4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정은 작은 자가 크고 큰 자가 작은 곳이다. 가정은 아버지의 왕국이요 어머니의 세계요 아이들의 낙원이다. 가정은 우리 위장이 하루 밥을 얻어먹고 우리 마음은 천 번이나 먹는 곳이다. 가정은 인간의 허물과 실패를 숨겨 주는 곳이다. 그렇습니다. 가정은 큰 자가 작고 작은 자가 큰 곳입니다. 하루에 세 번 밥을 먹을 뿐만 아니라 마음의 양식으로 사랑과 지지를 천만번 먹는 곳입니다. 모든 허물과 실패를 받아주고 세상의 상처를 싸매주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정의 전부가 되면 안 됩니다. 가정은 작은 자가 큰 곳이어야 하고, 날마다 마음의 양식으로 사랑과 지리를 천만번 먹어야 하는 곳이어야 하고, 모든 허물과 실패를 받아주고 세상의 상처를 싸매주는 안식처이기도 해야 하지만, 동시에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지,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삶은 무엇이고 죽음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등등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을 가르치고 토론하고 배우고 경험하는 학교여야 합니다.

삶이란 그냥 주어진 것입니다. 이 세상도 나에게 그냥 주어진 것이고, 삶도 나에게 그냥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에 주어졌고 세상이 나에게 주어졌기에 그냥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운명’이라고 합니다. 예, 삶은 본질적으로 운명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냥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운명처럼 주어진 삶을 ‘책임 있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운명처럼 주어졌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은 인생이라고 할 수 없어요. 운명처럼 주어졌지만 그 삶을 ‘책임 있게’ 그리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은 성공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갖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높은 직책에 오르는 것만으로 부족합니다. 책임 있게 사는 것만으로도 부족하고, 아름답게 사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책임 있게’ 와 ‘아름답게’라는 두 형용어가 함께 어우러져야 비로소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책임 있게 사는 것과 아름답게 사는 것이 절묘하게 어우러져야 비로소 복된 인생, 건강한 인생, 덕스러운 인생, 풍성한 인생,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인생은 책임 있게 살아야 하고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 뭐였습니까? 굉장히 많은 말씀이 있지만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 말씀을 좇아 살아라.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책임 있는 삶과 아름다운 삶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 책임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이런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다. 운명처럼 주어진 삶을 책임 있게 그리고 아름답게 살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히 부모들에게 “들으라, 이스라엘아! 우리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니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부지런히 자녀에게 가르치고 강론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고 책임 있는 삶이기 때문에, 또 아름다운 삶과 책임 있는 삶이 함께 어우러져야 비로소 참된 인생이기 때문에 집에 앉아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나 있을 때에든지 자녀에게 거듭 거듭 들려주고 일러주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잠언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며 늙어서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리라.”(22:6) 여기서 ‘마땅히 행할 길’이란 다른 게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것이 사람이 마땅히 행할 길입니다.

 

사람은 사랑하며 사는 법과 책임 있게 사는 법을 가정에서 가족에게 배워야 합니다. 가정에서 하나님의 사랑 같은 사랑을 받아야 하고, 가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행해야 합니다. 또 가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야 하고, 가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자기 역할을 감당하며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책임 있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요즘은 가족이 많지 않아서 아이들의 역할이나 책임이 거의 무시되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 외에는 어떤 책임도 지우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든 건 엄마 아빠가 책임질 테니까 너희는 공부만 열심히 하면 돼’ 이게 대세입니다. 그것이 아이들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왜곡된 사랑이고 눈먼 사랑이고 어리석은 사랑이지 참된 사랑이나 지혜로운 사랑은 아닙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 역할과 자기 책임을 다하게 해야 합니다. 자기 방 정리정돈 하는 것, 숙제하고 청소하는 것, 심부름하는 것, 사랑으로 양보하는 것, 배려하는 것, 섬기는 것, 잘못을 고백하는 것, 용서하고 용서받는 것,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것, 토론하는 것, 인내하는 것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우리 선배들은 자녀를 양육하는데 있어 우리보다 고수였습니다. 몇몇 사례를 보겠습니다. 1940년 2월 5일 수요일 밤 9시경, 수요예배를 인도한 후 어두운 길을 따라 예배당에서 사택으로 돌아가는 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잠깐만 볼까요?” 하면서 네다섯 명의 장정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목사를 이끌고 사택으로 가서 가택 수색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경찰서까지 함께 가자며 데리고 나갔습니다. 경찰서로 잡혀가는 목사를 향해 늙은 아버지가 큰 소리로 당부했습니다. “여보게, 누가복음 9장 62절을 기억하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했네. 또 마태복음 10장 37절부터 39절 말씀을 기억하게. 아비나 어미 사랑하기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않다고 했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했네.”

이것은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체포돼 끌려가는 아들 손양원 목사에게 팔순이 가까운 아버지 손종일 장로님이 한 말씀입니다. 우리 선배는 이렇게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또 거창고등학교 설립자인 전영창 선생님은 일본 유학 중에 신사참배 반대, 조선독립 희구 등의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때 전영창의 어머니 유종순은 꼬박 보름동안 베틀에 앉아 베를 짜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아들을 살려주시면 절대로 내 아들로 여기지 않고 당신의 아들로 살게 할 터이니 살려만 주십시오.”

그 후 그녀는 전영창을 자기 아들이라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 바친 아들로 여겨, 전영창이 무슨 일을 하든지 뒤에서 도우며 살았습니다. 1973년에 위암으로 생을 다하기까지 아들이 운영하는 학교 농장에서 일했습니다. 그녀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위중한 상태에 있을 때 아들 전영창이 학교 신축 기금을 모으기 위해 미국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아들을 머리맡에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 걱정 말고 다녀오게.” 그렇게 아들을 보내 놓고 어머니는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영창의 아버지도 아들을 전주에 신흥중학교에 보낼 일념으로 열심히 일하면서 아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매일 아침 5시가 되면 아들을 깨워서 성구를 외우도록 했고, 아주 추운 겨울날 새벽에도 흰 눈으로 세수하게 하고 성경 말씀을 외우게 했습니다. 전영창이 일본의 고베 감옥에 있을 때 아버지 전일봉 장로가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성구가 쓰여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놀라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게 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 예, 전영창의 아버지는 감옥에 있는 아들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선배들의 가정교육이었습니다.

 

가정에서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전영창은 거창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직업 선택의 십계명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습니다.

하나.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둘.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셋.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넷.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다섯.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여섯.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일곱.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여덟.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아홉.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이 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열.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참으로 서늘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 계명대로 따를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엄격하고 서늘합니다. 그러나 전영창은 하나님에게서 또 가정에서 그렇게 배우고 자랐습니다. 전영창 안에 그런 가치관이 형성됐습니다. 세상과 전혀 다른 가치관,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이 형성됐습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형성되어 있는 하나님나라 가치관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훈육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교육입니다. 기독교인 가정도 이런 가치관에 기초해서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에 기초한 세계관 위에서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도록 훈육해야 합니다. 운명처럼 주어진 삶을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책임 있게 그리고 아름답게 살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놓고 온 가족이 토론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나라 방식으로 사는 것인지를 고민하고 토론하고 연습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정의 사명이고 가족의 역할입니다. 사람의 인격이나 성품이나 가치관은 가정에서 형성되지 학교에서 형성되지 않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모이는 교회를 통해서도 형성하기가 어렵습니다. 오직 가정에서만 가능합니다.

 

사실 가정은 최고의 학교입니다.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한 최고의 학교입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을 일컬어 ‘인생 최고의 대학’이라고 했는데 저는 가정이 ‘인생 최고의 대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이야말로 커리큘럼이 없는 전천후 대학, 인간 됨됨이를 형성시키는 최상의 대학이고, 가족이 서로에게 최고의 교사라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가르치는 지식을 배우지 않습니다. 부모의 삶을 보고 배웁니다. 부모의 일거수일투족, 언행심사, 자잘한 일상을 옆에서 보고 느끼며 배웁니다.

지난 주일예배 때 5살 밖에 안 된 여준이가 설교를 듣다가 엄마에게 ‘현장’이 뭐냐, ‘통로’가 뭐냐고 물었답니다. 정말 아이들은 예민하고 섬세합니다.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아요. 지난 월요일 날 아들네 부부하고 식사를 했는데 다운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는 사람들이 짜증내는 것이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면서 ‘자기는 집에서 짜증이라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짜증내는 게 이해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의 눈이 정말 매섭습니다. 아이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고 무심코 지나치는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말 한 마디, 몸짓 하나까지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다 보고 느끼고 배웁니다. 그래서 부모가 중요하고 가족이 중요합니다. 가정은 원하든 원치 않든 좌우지간 학교입니다. 아니, 학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정은 안식처이면서 동시에 학교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배우는 학교, 저녀들이 부모에게 배우고 형제에게 배우는 학교, 수업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은 학교, 그래서 모든 것이 수업인 학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녀와 손자를 인류 대학에 입학시키려고 힘쓰지 마시고, 여러분 가정을 인생 최고의 대학으로 만드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돈만 벌어다 주지 마시고 여러분 가정을 최고의 안식처이자 최고의 학교로 만드는 일에 신경 쓰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먼저 책임 있는 삶을 살고, 아름다운 삶을 살면 됩니다.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닦달하기 전에 여러분이 먼저 공부하면 됩니다. 자녀에게 예배 빠지지 말라고 훈계하기 전에 여러분이 먼저 마음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면 됩니다. 자잘한 일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행하면 됩니다.

부모의 일상, 부모의 일거수일투족이 아이들에게는 수업 아닌 수업입니다. 아니, 그것이 진짜 수업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이 수업 아닌 수업, 수업 시간이 따로 없는 수업, 커리큘럼이 따로 없는 수업을 통해서 가장 깊이 배우고 가장 많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수업 시간이 따로 없는 이 수업, 커리큘럼이 따로 없는 이 수업이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고, 가족이 가족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수업이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세상을 근원적으로 바꾸는 진짜 혁명의 길입니다. 여러분, 이 일에 헌신하십시오. 우리 가정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안식처이자 가장 훌륭한 학교로 만드는 일에 마음과 지혜와 시간을 쏟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