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십자가, 예수님의 환대와 승리 (요한복음19:23-30 )

새벽지기1 2018. 3. 27. 06:07


오늘은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공포와 두려움과 저주의 표징이었던 십자가가 최고의 사랑과 환대와 승리의 표징으로 바뀐 것을 기념하는 날이고, 죽음이 왕 노릇하던 삶이 파국에 이른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영화 감독 멜 깁슨은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예수님의 고난과 고통에다 초점을 맞췄는데 그것은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피상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고난과 고통이 핵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환대, 예수님의 승리가 핵심입니다. 물론 1세기 로마 시대에 십자가는 형벌, 저주, 공포, 두려움의 표징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가장 저주스런 형벌의 죽음을 당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사랑이었고, 환대였고, 승리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가면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다 이루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말씀이 아니고 일종의 선언인데, 이 선언은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선언이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를 증언하는 선언이었습니다. 이 선언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 죽음을 최고의 승리요 최후의 승리라고 보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자기의 죽음을 최고의 승리요 최후의 승리라고 봤을까요? 이걸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이전에 하신 말씀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언젠가 자기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10:45). 자기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 존재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 세상을 섬기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세상을 섬기는 것일까요? 실업자 하나 없는 실업자 제로 사회를 만드는 것일까요?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한 최상의 복지를 실현하는 것일까요? 갑이 을을 쥐고 흔드는 횡포를 없애는 것일까요?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부의 불균형을 없애는 것일까요? 노동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일까요? 무상 의료를 실시하는 것일까요? 전쟁 무기를 없애는 것일까요?

우리는 ‘세상을 섬긴다’ 그러면 대뜸 이런 것들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해 내어주는 것이 세상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참 고상하고 훌륭한 생각이긴 합니다만 낯설고 비현실적인 생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허무맹랑한 생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자기의 죽음이 세상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섬기는 진정한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뒤집어서 말하면, 예수님은 세상을 어지럽히고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근본 원인, 죽음이 왕 노릇하게 된 근본 원인이 인간의 죄에 있다고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불화와 재앙은 먹지 말아야 할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죄에서 비롯됐습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과 불화와 재앙은 사실상 아담(인간)의 죗값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위해서 정말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죗값을 치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죗값을 치르는 것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죗값을 대속하기 위해 죽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섬기는 일이라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여러분, 예수님의 죽음이 어떤 죽음이기에 그분의 죽음이 세상을 섬기는 일이 되는 것일까요? 사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온 세상의 운명과 직결된 죽음이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행동, 선악과를 먹은 행동이 온 세상의 운명과 직결돼 있었듯 예수님의 죽음도 온 세상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잘 아는 대로 아담은 한 개인으로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행동은 아담 개인에게만 죽음을 초래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의 행동으로 인해 온 세상이 죽음에 갇히게 됐습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분명히 한 개인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예수님만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온 세상을 죽게 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온 세상의 죗값을 자기 몸에 다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온 세상과 함께 죽는 죽음이었고, 온 세상을 죽게 하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죽게 함으로써 온 세상을 구원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기 죽음의 비밀을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죽음이 세상을 섬기는 일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의 죽음을 영화롭게 되는 일이라고 봤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한 기도를 보십시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아무리 생각해도 참 아리송한 기도입니다. 십자가에 죽는 것은 패배 중의 패배요 저주 중에 저주인데 이런 죽음으로 어떻게 아들이 영화롭게 되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다는 게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자기의 죽음을 고난의 잔이라고도 이해했지만 동시에 자기가 영화롭게 되는 길이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길이라고도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피하고 싶은 고난의 잔을 피하지 않고 마신 겁니다.

 

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를 제대로 알려면 ‘때가 찼다’(막1:15)는 말씀을 깊이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여기서 ‘때가 찼다’는 말은 그냥 뜻 없이 내뱉은 말이 아닙니다. ‘때가 찼다’는 말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때’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왔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때’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오면서 줄기차게 그 때를 기다려왔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때가 찼다’는 말을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바로 그 때가 드디어 왔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전하는 이 복음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갑작스럽고 기이한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오래 전부터 듣고 기다려왔던 바로 그 일에 관한 이야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던 바로 그 일이 성취될 ‘어떤 날’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때가 찼다’는 ‘그 때’(그 날)는 과연 ‘어떤 때’일까요? 구약이 말하는 모든 것이 사실은 그 때에 관한 것인데 그 때가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일까요? 가까운 과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때를 가리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는 날(사55:5),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날, 저들이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는 날, 산들과 언덕들이 저들 앞에서 노래 부르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 치는 날, 잣나무가 가시나무를 대신하고 화석류가 찔레를 대신하여 나는 날이라고 말했습니다(사55:11-13).

또 여호와께서 기름부음 받은 자를 보내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는 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고,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는 날이라고 했습니다(사61:1-4).

또 지혜와 총명의 영이 강림하여 공의로 다스리는 날이라고 말하면서 그 날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고, 암소와 곰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고,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치고,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사11:1-9).

에스겔 선지자는 그 때를 가리켜 여호와께서 자기 양을 찾되 흐리고 캄캄한 때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건져내는 날, 그들을 만민 가운데서 끌어내며 여러 백성 가운데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 위에 두는 날,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는 날,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는 날이라고 했습니다(겔34:11-13, 23-24).

다니엘은 그 때를 가리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주시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는 날이라고 했습니다(단7:22).

세 선지자의 말을 종합하면 그 날은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날(때)이고, 이차적으로는 피조세계 전체가 구원받는 날(때)임이 분명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때가 찼다”고 했을 때 그 ‘때’는 다른 때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때, 피조세계 전체가 구원받는 때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는 복음도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이사야와 에스겔과 다니엘이 말했던 그 날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좀 더 멀리 올라가보겠습니다. ‘때가 찼다’는 예수님 말씀은 모세, 아브라함, 아담과도 연결돼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출6:6-7).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람을 부르시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3). 하나님은 하와를 유혹한 뱀에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뱀과 여자를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뱀은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3:15).

이 말씀들을 종합하면 ‘때가 찼다’는 예수님 말씀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약속한 것을 최종적으로 성취될 때가 됐다는 말이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약속한 것을 최종적으로 성취할 때가 됐다는 말이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말씀한 것을 최종적으로 성취할 때가 됐다는 말입니다.

결국 ‘때가 찼다’는 예수님 말씀은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브라함과 모세를 거쳐 수많은 선지자들이 말했던 바로 그 날과 연결돼 있고, 온 이스라엘이 학수고대하던 그 날, 다니엘이 보았던 묵시적 승리의 그 날과도 연결돼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 말씀의 핵심 줄거리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일관되게 말씀하신 것은 사실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에 갇혀 있는 세상을 죽음에서 구출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죽음의 종살이하는데서 해방하여 생명살이 하도록 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도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께서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일이 이루어질 때가 드디어 왔고, 내가 그 일을 하겠다는 이야기를 한 겁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그 일을 하라고 세상에 보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 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고,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다윗에게 말씀하시고, 이사야에게 말씀하시고, 다니엘에게 말씀하셨던 바로 그 일을 하라고 보냄 받았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꿈꾸는 것,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이루어주라고 보냄 받은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꾸만 예수님을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꿈꾸는 것,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이루어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도우미로 보냄 받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그 일을 이루라고 보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공생애 3년 동안 그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만이 진정으로 세상을 섬기는 일이고 세상을 구원하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어가면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한 겁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로 그 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던 바로 그 날의 일이 십자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한 겁니다.

영국의 신약학자인 톰 라이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습니다.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그 절정에 도달한 순간이다. 십자가는 마침내 그들의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가지고 돌아오시는 광경을 예루살렘 성의 파수꾼이 목격한 순간이다. …… 십자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의 나라에 승리를 거둔 순간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첫 불순종 이후로 잠긴 채 막혀 있던 거대한 옛 문이 활짝 열려서, 단순히 폐쇄되었던 동산이 다시 한 번 열려서 우리에게 기쁨을 선사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항상 계획해 오셨던 장차 올 도성을 우리에게 공개하고 초대하여 그 문을 통과하여 들어와 그분과 함께 그 도시를 건설하자고 권하는 순간이다.”(하나님은 어떻게 왕이 되셨나. 326쪽).

 

진실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순간은 하나님의 섭리가 최절정에 이른 순간이었습니다.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최종적으로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종말론적인 구원이 역사 속에서 최종적으로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내 죄를 대속한 죽음이라고만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내 죗값을 대속하는 것보다 훨씬 광대하고 심오하고 근원적이고 풍성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운명이 전환되는 우주적인 대전환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 엄청난 일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었습니다.

물론 삶을 통해서도 놀라운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놀라운 일, 온 세상을 구원하는 일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성취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수님 되심, 예수님의 아들 되심, 예수님의 왕 되심도 십자가의 죽음으로 계시됐습니다. 병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출렁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는 것으로도 계시됐지만 진짜 예수님의 예수님 되심, 예수님의 아들 되심, 예수님의 왕 되심은 약함과 패배와 죽음으로 계시됐습니다. 찬란한 권세와 영광과 승리로 계시되지 않고 조롱과 핍박받음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계시됐습니다. 예수님의 강함은 약함으로 드러났고, 예수님의 왕 되심은 제자들의 발을 씻는 종 됨으로 드러났고, 예수님의 승리는 십자가의 패배로 드러났고, 예수님의 능력은 무력함으로 드러났습니다.

 

톰 라이트는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위에 등극한 것은 십자가 위에서다’ 정말입니다. 예수님의 왕위 등극은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배하고 파괴하는 힘의 승리로 세워지지 않고 약함과 패배로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지배하고 군림하는 방식이 아니라 패배하고 조롱당하는 방식, 사랑으로 섬기는 방식으로 아주 고요하게 비밀스럽게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어떤 다스림도 없이 온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나라의 비밀이고, 복음의 우매함입니다. 바울은 이런 복음의 우매함을 깨닫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의 도(예수의 죽음)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없이 미련한 것이지만 그 미련한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사랑을 드러낸 최고의 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랑을 보려거든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한 자는 결코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 자는 결코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한 자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사랑은 오직 십자가에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십자가에 나타난 능력, 십자가에 나타난 영광,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배하고 군림하는 힘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과 사랑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나라를 이루어가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는 방식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길도 이 길밖에 없습니다. 내가 조롱당하고 패배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조롱당하게 함으로써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무너뜨림으로써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패배하게 함으로써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얄궂은 분이세요. 하나님은 나를 조롱당하게 함으로써 영화롭게 하시고, 무너뜨림으로써 세우시고,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게 함으로써 생명을 살게 하십니다. 저는 이런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나를 무너뜨림으로써 세우시는 그 하나님, 온 세상을 심판함으로써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다 이루신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배합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