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부활, 궁극적 미래 (마가복음16:1-14)

새벽지기1 2018. 4. 3. 13:32


지난 주일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난이 핵심이 아니고 온 세상을 향한 환대와 승리가 핵심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기 직전에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신 것도 자기의 죽음이 최고의 승리요 최후의 승리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최고의 증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죽음이 승리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부활은 한 마디로 예수의 죽음이 승리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하나님의 인증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부활절을 맞으면 단지 기쁘십니까, 아니면 좀 당혹스럽습니까? 부활의 소망에 위로가 되십니까, 아니면 부활의 실체가 손에 잡히지 않아서 답답하십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맨 처음 목격한 자들은 어땠을까요? 억울하게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기뻐하고 환호했을까요? 놀랍게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한 자들은 하나 같이 기겁하며 놀랐습니다.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옆에서 지켜본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로마의 백부장이었고, 막달라 마리아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또 살로메라는 여자들이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멀리서 지켜보았던 여인들은 사랑하는 분의 장례 절차가 무시되었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안식일이 지나자말자 서둘러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무덤에 가서 보니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흰 옷을 입은 청년(천사)이 앉아 있었습니다. 여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시신은 없고 웬 낯선 청년이 흰 옷을 입고 앉아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것도 첫 새벽에. 기겁을 하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청년이 말했습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으나 그는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다.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16:6).

하지만 이 말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마가는 여인들이 몹시 놀라 떨며 무덤에서 도망쳤다고 했습니다.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16:8). 물론 이 여자들만 놀란 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소식을 전하자 다들 믿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다른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했는데 그때도 다들 믿지 못했습니다(16:11,13). 모든 복음서는 부활의 소식을 들은 자들마다 하나같이 놀라고, 당황하고, 충격을 받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며 저항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도마도 다른 제자들이 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증언해도 자기가 직접 예수님의 옆구리의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왜 다들 이랬을까요? 억울하게 죽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면 당연히 기뻐하고 환호할 것 같은데 왜 다들 기겁하며 놀랐을까요? 심지어 무서워하기까지 했을까요? 그것은 부활이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하니까 다들 기겁하고, 놀라고, 무서워하고, 믿지 못하겠다고 항거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죽음의 필연성이지 않습니까. 한 번 죽으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이 오래 세월 축적된 경험이지 않습니까. 죽음이 생명의 종착지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객관적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죽음을 죽었습니다. 유사 죽음이 아니라 진짜 죽음을 죽었습니다. 향품을 준비해서 무덤을 찾아간 여자들도 죽은 시신에 바르려고 간 것이었지 부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도 예수님께 걸었던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누구도 기대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담 이래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시공간 안에서는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시공간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낮선 일, 누구도 기대하지 않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기겁하며 놀란 것이고, 무서워한 것이고, 믿지 못하겠다고 저항한 것입니다.

누가는 천사가 무서워하는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눅24:5-6). 천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는 여인네들의 둔함을 책망하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인들의 태도가 훨씬 인간적이고 정직한 태도라고 봅니다. 믿지 않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쉽게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것이 워낙 우리의 경험과 인식 밖의 일이기 때문에 믿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쓴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부활했다는 사실만을 전할 뿐 어떻게 부활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죽은 예수에게 임하는 장면이라든지, 세마포가 풀리는 장면이라든지, 멎었던 뇌와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순간이라든지, 눈을 뜨고 일어나 앉는 모습 같은 것을 전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이 부활하는 과정을 직접 목격한 사람도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있지만 부활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복음서 어디에도 부활의 과정에 대해 서술한 내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서는 그 과정이 서술되어 있는데 부활에 대해서는 아무 서술이 없습니다. 인간의 상상력을 동원해 부활의 빈 공백을 채우려 한 흔적도 전혀 없습니다. 부활의 과정은 그냥 공백으로 놓아둔 채 단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만 서술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뭘 말하겠습니까? 이것은 부활이 인간의 눈으로 관찰하거나, 인간의 이성으로 포착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걸 말해줍니다. 부활은 인간의 언어로 담아낼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걸 말해줍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인간의 눈이나 이성으로 관찰하거나 포착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행동을 동영상으로 촬영할 수 있습니까? 전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인간의 눈이나 이성으로 관찰하거나 포착할 수 없습니다. 부활하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촬영할 수 없습니다. 부활은 한 마디로 우리의 경험 너머의 사건이고, 우리의 이해 너머의 사건입니다. 아무리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의문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미지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영적으로 부활한 것도 아니고, 엉뚱한 사람으로 부활한 것도 아니고, 나사렛 사람 예수로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도마의 이야기를 봅시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친히 자기 몸의 상처를 내보이며 “네 손가락을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4~29)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제자들이 그분을 유령으로 알자 그분께서는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눅24:38~39)고 하시며 그들이 보는 앞에서 생선 한 토막을 먹었습니다.(눅24:41~43).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의 실재, 나사렛 예수의 성격을 간직하고 있는 몸으로 부활했습니다. 그분의 옆구리에 난 상처가 말해주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는 그분이 사셨던 모든 삶, 그분이 겪었던 모든 운명과 사건이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지나 온 삶의 흔적들 중 어느 것도 부활로 인해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무덤 속에 묻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이전의 삶의 모든 궤적이 간직되어 있는 몸이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지금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모든 삶의 궤적이 다 간직되어 있는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부활은 이전에 살았던 모든 삶의 궤적을 담고 있는 몸으로의 부활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 이전의 몸과는 분명히 다른 몸으로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는 이 사실을 암시하듯 말합니다. 부활하기 전에는 예수님이 ‘어디에 왔다, 어디로 갔다’고 말하는데, 부활 후에는 ‘나타났다, 사라졌다’고 말합니다(막16:9,12,14). 하늘로 들려 올라가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합니다(막16:19). 이게 무슨 말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우리와 똑같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몸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 후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몸으로 바뀌었습니다. 유령이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지듯이, 영화에서 영혼이 홀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지듯이 예수님도 방문을 다 걸어 잠근 방에 홀연히 나타나셨습니다. 분명히 유령이 아닌데 유령처럼 자유롭게 시공간을 뛰어넘었습니다.

물론 앞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로 살았던 모든 삶의 궤적을 간직한 몸으로 부활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부활하지 않고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고 자란 예수,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복음을 전한 예수로 부활했고, 부활한 몸으로 제자들과 함께 대화도 나누고, 함께 음식도 먹고, 함께 걷기도 했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몸은 분명히 시공간 안에 거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몸은 시공간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죽음으로부터도 자유로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분명히 나사렛 예수의 몸을 넘어서는 몸, 시공간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몸,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 예수님과 함께 대화하고, 함께 먹고, 함께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의 몸을 이해하거나 파악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이미 우리가 이해하거나 파악할 수 있는 차원의 몸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몸이 아니었기 때문에 눈앞에 있어도, 함께 대화하고, 함께 먹고, 함께 걸었어도 그 몸의 정체를 이해하거나 파악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신학자 한스 요아킴 크라우스도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분의 부활이 체험 가능하고 경험적이며 역사적 차원에서 파악되고 설명되는 한 부활의 신비와 기적은 사라진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세계를 영적인 세계, 시공간이 없는 세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의 세계는 시공간이 있는 세계입니다. 부활의 세계는 시공간의 세계보다 훨씬 광대하고 높고 영광스러운 세계이지 시공간이 없는 세계는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한 몸은 얼마든지 시공간에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얼마든지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필요하면 시공간에도 있다가 또 필요하면 시공간 밖에도 있다가, 이렇게 시공간 안과 밖을 맘대로 왔다 갔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거했습니다.

바울은 부활 이전의 몸과 부활 이후의 몸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2-44)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의미하는 건 뭘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려면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한 개인의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죽음은 단지 예수님만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온 세상을 죽게 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온 세상의 죗값을 자기 몸에 다 짊어지고 죽음으로써 온 세상과 함께 죽는 죽음이었고, 온 세상을 죽게 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온 세상을 죽게 함으로써 온 세상을 구원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한 개인의 부활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예수님만의 부활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사건도 아니었고, 단지 예수님에게만 일어난 예외적인 사건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온 세상과 함께 다시 살아난 사건이고, 온 세상의 죽음을 이긴 사건이고, 온 세상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꾼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생명이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준 예시적 사건이요 언약적 사건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한 개인의 부활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최종적인 변화의 단계에 돌입했다는 것, 새 시대가 열리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온 세상에 알리는 서곡이자 첫 열매인 부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부활 속에는 이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합니다. [너희도 예수처럼 부활할 것이다. 너희도 예수처럼 시공간을 넘어서는 자유의 몸, 죽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 예,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에 담긴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이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천 년 전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만 하는 것은 부족한 부활 신앙입니다. 온전한 부활 신앙은 부활의 현실 속으로 내 삶이 진입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부활의 눈으로 온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의 몸과 삶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삶이 부활의 현실 속으로 진입해 들어간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시공간 안에 살면서도 시공간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에 속한 것들로 인해 일희일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다 해도 우리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부활 신앙으로 무장했다 해도 우리의 종착역은 무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 미래인 부활을 오늘의 현실로 앞당겨 살아야 합니다. 이미 부활의 세계에 진입해 들어간 것처럼, 이미 부활 생명을 가진 것처럼, 이미 최종적인 승리를 쟁취한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부활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근본적으로 부활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의 복음일 뿐만 아니라 부활의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고전15:14)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


무슨 말입니까? 부활이 믿음의 정수라는 말입니다. 부활이 구원의 알짬이고 궁극적 미래라는 말입니다. 부활이 구원의 알짬이고 궁극적 미래이기 때문에 부활의 세계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지 않은 채로 예수를 믿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바라는 것이 부활의 세계가 아니고 단지 이생뿐이라면, 잘 먹고, 잘 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라면 예수 믿는 것이 다 허망한 일이고, 어리석은 짓 중의 어리석은 짓이라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믿음이란 단지 현재의 질서 속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덕분에 만사가 잘 풀리고, 건강하게 오래 살고, 성공하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믿음이란 부활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부활이 구원의 최종적 실재라는 말입니다. 부활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변화이고 진정한 의미의 구원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온 세계의 완전한 변화, 질적인 변화, 결정적 변화, 최종적 변화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변화의 첫 열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변화할 것입니다. 아니, 지금 부활의 세계에 진입해 들어간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궁극적 미래인 부활을 지금 여기서 앞당겨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의 신앙입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아 다시 한 번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