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가족, 아래로 자라게 하는 사람들 (로마서12:14-21)

새벽지기1 2018. 5. 28. 07:03


우리는 두 번에 걸쳐 가족이 무엇인지를 살펴봤습니다. 가족은 인간의 중심이다, 가족은 거래적 관계가 아니다, 돈주머니가 하나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콩 하나라도 나누어 먹는 것,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것, 온 세상이 외면해도 마지막까지 외면하지 않고 기다려주고, 온 세상이 돌을 던져도 끝까지 돌을 던지지 않고 품어주는 것이 가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가족이 함께 사는 가정은 사랑의 안식처일 뿐만 아니라 커리큘럼이 없는 최고의 학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가족이 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쉽습니다. 가족이 되기 위해서 어려운 시험을 봐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자격 조건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가족이 되는 일은 진짜 쉽습니다. 반면에 가족으로 사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면서 동시에 가장 고통스런 일입니다. 사실 가족은 모든 것을 공유하고 깊이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미움과 아픔과 갈등과 싸움이 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치열하게 싸우고, 더 많은 갈등을 겪고, 더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사람은 다 독립된 주체입니다. 가족이라고 해도 결국은 독립된 주체들이에요. 어머니도 한 사람의 독립된 주체이고, 아버지도 한 사람의 독립된 주체이고, 자녀들도 다 독립된 주체입니다. 자녀라고 해서 부모 뜻대로 자라주지 않아요. 세 살만 되도 벌써 자기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고, 자기 맘에 들지 않으면 토라지고 떼를 씁니다. 아이들이 부모의 기대나 희망대로 자라주지 않아요. 아이는 아이대로 자랍니다. 부부도 일심동체라고들 하지만 일심동체는 말일뿐이지 절대 일심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부부는 완전히 다른 개별체예요. 어떻게 보면 정반대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가족이라 해도 개성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고, 기호가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삶의 문법이 다 다릅니다.


그러니 가족으로 사는 일이 쉽겠습니까? 당연히 어렵습니다. 제가 중학교 시절에 가출을 했습니다. 왜 가출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데 하여튼 친구의 꾐에 빠져 가출을 했습니다. 고작 서울에 사는 누나 집으로 간 것이었습니다만 어쨌든 가출을 했어요. 아들도 저처럼 고등학교 시절에 가출을 했습니다. 외할머니 댁으로 도피행각을 벌였습니다. 여러분은 저희 부자처럼 가출을 하지는 않았지요? 그런데 가출을 감행하지 않았더라도 마음으로는 몇 번씩 가출을 했을 겁니다.

부부간에도 그렇습니다. 부부로 살면서 가방 싸들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은 사람,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세상에서 가장 치열하게, 가장 치졸하게, 가장 적나라하게 싸우는 것이 부부니까, 볼 것 못 볼 것 다 보며 사는 것이 부부니까 가방 싸들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몇 번씩은 느꼈을 겁니다. 사실 자녀를 키우는 일도 힘들고, 부부로 사는 일도 힘들거든요. 저희 부부도 힘든 과정을 겪어내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여러분도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온 몸으로 겪어내면서 여기까지 왔을 게 틀림없습니다. 솔직히 눈물 없이, 탄식 없이, 고통 없이, 상처 없이 산 가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가족은 깊은 상처와 아픔을 겪어내며 살아갑니다. 수많은 갈등과 맞닥뜨리면서 싸우고 상처받고 인내하고 아파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사람은 이처럼 갈등을 겪고 싸우고 상처받고 아파하면서 자랍니다. 여러분도 그러겠지만 저 또한 오늘의 제가 된 것은 크게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작게는 아버지와 아내와 아들의 영향이 제일 컸습니다. 저희 5형제는 아버님께 회초리를 맞으면서 컸는데요, 형제 중에 누가 싸웠다 그러면 5형제가 똑같이 아버님 퇴침 위에 올라가서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았습니다.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으면서 형제간에 싸우면 안 된다, 우애해야 한다, 작은 돈은 아끼고 꼭 써야 할 돈에 인색하면 안 된다, 등등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때 회초리를 맞아가면서 아버님께 들었던 말씀이 음으로 양으로 저희 형제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가 9년 전에 간 이식 수술할 때 형제들이 합심해서 1,000만원이 넘게 병원비를 보태준 것도 아버님의 가르침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버님보다도 저를 더 크게 자라게 한 것은 아내와 아들입니다. 특별히 사춘기 시절의 아들과 싸우면서, 또 아내와 이런저런 일로 다투고 싸우면서 가장 많이 자랐습니다. 싸우면서 저를 돌아봤고, 싸우면서 저의 악함과 한계를 보게 됐고,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모난 부분이 조금씩 깎여나갔고 부족한 부분이 조금씩 채워져 갔습니다. 예, 저는 가족과 살면서 아래로 자랐습니다. 위로 자라지 않고 아래로 자랐습니다.

제가 방금 ‘위로 자라지 않고 아래로 자랐다’고 했는데요, 옳습니다, 사람은 위로도 자라야 하지만 아래로도 자라야 합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높아지는 것, 지식과 능력이 향상되는 것, 경험이 쌓이고 식견이 넓어지는 것, 힘이 강해지는 것은 위로 자라는 것을 의미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 자신의 부족함과 한계를 아는 것은 아래로 자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사람은 위로도 자라야 하지만 아래로도 자라야 합니다. 젊어서는 위로 자라야 하고 나이가 들면서는 아래로 자라야 합니다. 아래로는 자라지 않고 위로만 자라면 사람이 깊어지지 않아요. 사람이 아주 교만해지고 오만해지고 거만해지고 얕아집니다.

 

요즘 대한항공 오너 일가족이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어서 잘 아시겠습니다만 언론을 통해 드러난 행태를 보십시오. 조선시대 왕보다도 더 위세를 부렸습니다. 사람 됨됨이가 아주 천박합니다. 내면의 깊이와 아름다움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요. 명품으로 온갖 멋을 다 부렸지만 행동거치가 그렇게 추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그랬을까요? 다들 배울 만큼 배우고 가질 만큼 가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천박하고 추한 갑질을 했을까요? 이유는 분명합니다. 아래로는 자라지 않고 위로만 자랐기 때문입니다. 위로만 자랐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종 부리듯 한 것이고,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는 갑질을 한 것입니다. 사람이 위로만 자라면 어쩔 수 없어요. 사회적으로는 성공할지 몰라도 인간적으로는 성공하기가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인간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래로 자라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자들과 어울리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로이 지내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권면했습니다(롬12:14-21). 자, 이 내용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위로 자라기만 한 사람이 행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제가 보기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위로 자라기만 한 사람은 박해하는 자를 축복할 수 없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없습니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자들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로이 지낼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오직 아래로 자란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것들이 생명살이이고,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인데 이런 생명살이는 아래로 자라야만 할 수 있습니다. 아래로 자라야만 그리스도인의 품격이 생기고, 아래로 자라야 내면이 성숙해지고, 아래로 자라야 상대를 존중하여 배려할 수 있고, 아래로 자라야 원수를 품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아래로 자라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아래로 자라야 합니다. 젊어서는 위로 자라야 하지만 나이가 스물이 넘어가고 서른이 넘어가면 아래로도 자라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다운 생명살이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참으로 흠이 많은 사람입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런 제가 조금이라도 아래로 자랄 수 있었다면 그것은 순전히 예수님 덕분이고 가족 덕분입니다. 부모님과 다섯 형제가 함께 살면서, 또 저와 아내와 아들 셋이 함께 살면서 치열하게 싸우고 크고 작은 갈등을 겪고 이런저런 아픔을 겪어야 했기 때문에 제가 조금이라도 아래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아내도 아마 저와 싸우면서 아래로 자랐을 것이고, 아들도 아마 저와 싸우면서 아래로 자랐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고로 싸우면서 아래로 자랍니다. 우리 선조들께서도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고 말씀했고, 가수 구창모 씨는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노래했습니다. 예,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것이 인간의 법칙입니다. 인간은 아픔 없이 깊어지지 않아요. 아픔 없이 아래로 자라지 않아요. 싸움 없이 아래로 자라지 않아요. 아파야만 성숙하고, 싸워야만 아래로 자랍니다.

 

물론 싸우는 것은 결코 좋은 게 아닙니다. 가족끼리 싸워야 아래로 자랄 수 있으니 열심히 싸우라고 권장할 수는 없습니다. 부부 간의 싸움으로 인해 이혼하는 경우도 많고, 부모와 자식 간의 싸움으로 인해 아이들의 영혼이 황폐해지고 삐뚤어지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자살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에 싸우는 것을 권장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할 수만 있으면 싸우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바울도 할 수 있으면 모든 사람과 평화하라고 했듯이 할 수만 있으면 싸우지 않아야 합니다. 하지만 가족 간에 이런저런 갈등을 겪고 싸움을 해야만 사람이 아래로 자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사람은 싸우면 안 됩니다. 싸움은 가장 이기적이고 오만한 인간의 악행입니다. 싸움은 곧 지옥입니다. 그러나 싸우지 않으면 아래로 자라지 않습니다. 치열하게 싸우면서 뼈가 녹는 아픔을 겪지 않으면, 치열하게 싸우면서 자기의 밑바닥을 보지 않으면 아래로 자라지 않아요. 싸워야 아래로 자랍니다. 치열하게 싸우면서 뼈가 녹는 아픔을 겪고, 치열하게 싸우면서 자기의 밑바닥을 봐야 아래로 자랍니다.

그러니까 싸우면 안 되는데 싸워야 합니다. 싸우면 안 되는데 안 싸우면 아래로 자라지 못하고 싸워야 아래로 자라니까, 또 아래로 자라야 사람이 되니까 어쩔 수 없어요. 사람은 싸워야 합니다. 싸우면 안 되는데 싸워야 돼요. 이것이 인간의 딜레마입니다.

 

물론 싸운다고 해서 누구나 아래로 자라는 것 아닙니다. 또 모든 싸움이 아래로 자라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솔직히 대부분의 싸움은 아래로 자라게 하기보다 아래로 추락시킵니다. 가족 간의 싸움도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가족 간의 싸움도 사람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사람을 해치기도 하고 사람을 아래로 자라게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잘 싸워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치명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고, 가족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할 수 있기 때문에, 또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정말 지혜롭게 싸워야 합니다. 무작정 싸우면 안 되고 잘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싸워야 합니다.

가족 간에 싸울 때 상대방을 억압하고 지배하기 위해 싸우면 안 됩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공격하기 위해 싸우면 안 됩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정죄하며 싸우면 안 됩니다. 상대방의 행동을 문제 삼아야지 인격을 정죄하면 안 돼요. 인격을 정죄하면 상대방이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자존감이 무너지고 마음이 굳어지고 관계에 금이 갑니다.

이렇게 싸우면 안 돼요. 올바른 삶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피차 변화하고 성숙하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또 싸움을 통해서 자기의 연약함과 한계를 돌아봐야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상대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으로 싸움을 끝내기 쉬운데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런 싸움은 상처와 고통을 줄 뿐이지 아래로 자라게 하지는 않습니다. 아래로 자라려면 싸움을 통해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자기의 밑바닥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를 이해하는 폭을 넓혀가고 상대방의 연약함과 한계를 받아주는 역량을 키워가야 합니다. 피차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싸움을 통해 아래로 자라는 축복을 받습니다. 가족이 더 성숙해지고 단단해지는 은총을 받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꼭 가족일까요? 힘겨운 직장생활을 통해서도 아래로 자랄 수 있고, 여러 가지 형태의 관계를 통해서도 아래로 자랄 수 있지 않습니까? 또 독서를 통해서도 아래로 자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꼭 가족을 통해서만 아래로 자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족 외에는 다 한계가 있습니다. 직장생활이나 여러 형태의 관계나 독서는 일로 만나고, 이해관계로 만나고, 인간의 어느 한 부분이 만나기 때문에 사람을 아래로 자라게 하는데 있어 명백한 한계가 있습니다.

가족은 달라요. 가족은 존재 전체로 만나고 삶 전체로 만나고 인격 전체로 만납니다. 세상의 모든 만남은 인간의 어느 한 부분, 생활의 어느 한 부분이 만나는데 가족은 그러지 않아요. 가족은 전인이 만납니다. 존재 전체, 삶 전체, 인격 전체가 만납니다. 인간의 밑바닥까지 다 드러내면서 만납니다. 또 상대방의 일거수일투족에 개입하면서 만납니다. 가족만이 이렇게 만나요. 오직 가족만이 이렇게 전인적으로, 인간의 밑바닥까지 다 드러내면서 만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관계의 질, 만남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도 가족을 통해 아래로 자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가족은 치열하게 싸웠다 하더라도, 서로의 밑바닥이 완전히 드러났다 하더라도 안 볼 수가 없습니다. 영원히 돌아설 수가 없습니다. 실컷 싸웠어도 함께 밥 먹어야 되고, 죽도록 미워도 얼굴 마주해야 되고, 마음이 돌덩이처럼 굳어도 다시금 사랑으로 다가가고 품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족관계가 깨지고, 가족관계가 깨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니까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참고 용납하고 화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족은 죽도록 싸워도 다시 함께 밥 먹어야 하니까, 뼛속까지 미워도 참고 받아주고 사랑해야 하니까, 마음이 얼음장처럼 식어도 다시 품고 용서하고 마주해야 하니까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속이 썩어문드러지는 아픔과 고통을 겪어내면서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자라는 겁니다.

 

가족은 어떤 상황이 와도 돌아서지 않고 끝까지 함께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관계를 복원합니다. 가족으로 사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이 와도 돌아서지 않아야 하니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좌우지간 관계를 복원해야 하니까, 실컷 싸우고 나서도 얼굴 보고 같이 밥 먹어야 하니까, 그것이 가족이고 그래야 가족이니까 가족으로 사는 일이 힘든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으로 사는 일이 이렇게 힘들기 때문에 가족으로 사는 일을 통해 아래로 자라는 것입니다. 저도 가족으로 사는 일을 통해 아래로 자랐습니다. 아내를 통해 아래로 자랐고, 아들을 통해 아래로 자랐습니다. 특별히 치열하게 싸우면서 정말 힘겹게 조금씩 아래로 자랐습니다. 물론 저를 아래로 키우느라 두 사람이 무지 고생했습니다. 그래서 한 편으로는 참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참 감사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결국 가족은 누구입니까? 가족은 나를 아래로 자라게 하는 사람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래로 자라게 하는 사람이고, 아내는 남편을 아래로 자라게 하는 사람이고, 부모는 자녀를 아래로 자라게 하는 사람이고, 자녀는 부모를 아래로 자라게 하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은 나를 위로 자라게 합니다. 언론도 나를 위로 자라게 합니다. 책도 나를 위로 자라게 합니다. 선배도, 친구도, 직장 상사도 위로 자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가족은 나를 위로 자라게 하기보다는 아래로 자라게 합니다. 하나님도 나를 위로 자라게 하기보다는 아래로 자라게 하십니다. 예, 하나님과 가족만 사람을 아래로 자라게 합니다. 그러니까 가족은 나를 아래로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족에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마음 아프게 함으로써 나를 아래로 자라게 하는 가족에게 큰 감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가족은 나를 아래로 자라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