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교회, 또 하나의 가족(2) (로마서12:1-5)

새벽지기1 2018. 6. 6. 09:53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가족의 일원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교회라고 하는 하나님의 가족의 품에서 태어나고, 하나님의 가족의 품에서 양육을 받고, 하나님의 가족과 함께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갑니다. 물론 요즘의 교회 현실은 좀 다릅니다.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가족인가에 대해 깊은 의문이 드는 게 사실입니다. 시대가 흘렀어도 인간의 가족은 한 집에서 모든 것을 공유하고, 또 죽으나 사나 가족인데 비해 하나님의 가족은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게 대부분이고, 그것도 잠깐 손님처럼 만났다 헤어지기 때문에 때로는 낯설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교회 안에 영적 소비자도 많고 떠돌이도 많고 심지어 사기 치려고 믿는 척하는 자들까지도 있기 때문에 교회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말이 그렇게 확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나님의 한 가족”(엡2:19)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본래는 할례 없는 자들이요,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들이요, 이스라엘 공동체 밖에 있던 자들이요, 약속의 언약 밖에 있던 자들이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가까워졌으니(엡2:11-13)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한 자들이 모인 모임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공통분모, 믿음으로 하나님이 부름에 응답했다는 공통분모 외에는 모든 것이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한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인간의 가족과 비슷한 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의 가족과 세상의 가족 간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지난 주일에는 닮은 점을 중심으로 살펴봤는데 오늘은 차이점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가족에게는 가족의 경계가 없어야 합니다.

세상의 가족은 가족의 경계가 있습니다. 가족과 가족이 아닌 사람의 구분이 명확합니다. 결혼과 입양을 통해서 어제 가족이 아니었던 사람이 오늘 가족이 되는 일이 있기는 합니다만 기본적으로는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로 세대가 이어지면서 가족이 확장되지 가족 밖으로 가족이 확장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세대를 통해 확장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해서 아들이 자동으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지는 않습니다. 아내가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해서 남편이 자동으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인간의 혈통이나 선택으로 되지 않아요.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됩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됩니다.

또 하나님의 가족은 가족 밖으로 확장됩니다. 어제까지 가족이 아니었던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오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기만 하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가족이 되고 교회의 지체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가족은 경계가 분명치 않아요. 누구든지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고, 항상 새로운 가족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가족은 가족의 경계가 분명치 않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족의 경계가 아예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절대로 우리끼리 하나님의 가족으로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 지금의 좋은 분위기가 깨지니까 우리끼리 사이좋게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자고 하면 안 됩니다. 가족 이기주의에 사로잡히면 안 됩니다. 지금 하나님의 가족이 아니라고 해서 배타적으로 대하면 안 됩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다고 적대적으로 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가족 밖으로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딤전2:4)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의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도 열려 있어야 하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게도 열려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경계도 없이 하나님이 보내시는 자는 누구라도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환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족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가족은 세상과 구별된 공동체여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가족은 언제든지 누구든지 가족 밖에 있는 자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경계도 없이 모든 사람에게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과 구별돼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세상에서 부름 받은 자들이니까, 세상 풍속을 따르던 것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삶으로 부름 받은 자들이니까 모든 면에서 구별돼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면서 바로 이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살지 말라는 말입니다. 가치관이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하루를 살아가는 마음의 자세나 삶의 목적은 말할 것도 없고 말 한 마디, 눈짓 하나까지도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좀 더 축약해서 말하면 삶의 방향성이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삶의 모양과 내용을 좌우하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삶의 방향성입니다. 뭘 위해 사느냐, 뭘 향해 사느냐 하는 삶의 방향성, 삶의 지향성이 삶의 모양과 내용을 좌우합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키가 커서 항상 맨 앞에 섰습니다. 도열할 때도 맨 앞에 섰고 행군할 때도 맨 앞에 섰습니다. 언젠가 사단 훈련소에 들어가서 야간 행군을 했습니다. 아주 캄캄한 밤에 중대장의 인솔을 받으며 행군을 하는데 중대장이 갑자기 행군을 멈추게 했습니다. 그러더니 길을 잘못 들었다며 뒤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다들 찍소리도 못하고 뒤로 돌아가는데 행군 대열 맨 앞에 섰던 저는 졸지에 맨 꼴찌가 됐습니다. 졸지에 꼴찌에 선 저는 앞에 선 친구들을 졸졸 따라갔습니다. 그때 문득 생각이 스쳤습니다. ‘아!! 뒤로 도니까 선두가 꼴찌가 되는구나. 방향이 잘못 되니까 모든 게 뒤바뀌는구나. 아!!! 앞서는 게 중요한 게 아니구나. 방향을 제대로 알고 가는 게 중요하구나.’하는 깨달음이 번쩍했습니다. 순간 너무 기뻤습니다. 중요한 진실을 깨달은 것이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40년이 지금도 그날의 깨달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앞서는 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앞서는 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서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바로 방향입니다. 아무리 앞서더라도 방향이 틀리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방향이 잘못되면 앞설수록 뒤떨어지고, 잘 할수록 문제가 커지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할수록 더 많은 해를 끼치니까, 방향을 잘못 잡으면 모든 수고가 허사이니까 목적지를 제대로 알고 그 방향을 향해 가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삶의 우선순위, 삶의 방향성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에 맞춰져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삶의 방향성이 제대로 맞춰져 있으면 다른 일들도 다 옳은 방향으로 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삶의 방향성, 삶의 지향성이 모든 것을 좌우합니다.

여러분, 악이 무엇입니까? 악이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악이란 방향성의 문제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 정의의 태양이신 하나님을 지향하지 않는 것은 악입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선한 일이라 해도 하나님을 지향하지 않는다면 두 말할 것 없이 악입니다. 실제로 크고 작은 악들은 방향성의 왜곡과 뒤틀림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세상의 모든 풍속은 악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을 등진 채 인간이 방향을 설정하고 목표를 세우고 추진하는 이 세상의 모든 풍속은 본질적으로 악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이 세상 풍속을 좇지 말라. 이 말은 몇몇 행위를 본받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술 먹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지향하는 삶의 방향성을 따라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바꿔 말하면 삶의 방향성이 다르지 않으면 세상 사람이나 다를 게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먹고 사는 일은 하나님의 사람이든 아니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든 아니든 밥 먹어야 삽니다. 돈 벌어야 살고 일해야 삽니다. 잠도 자고 숨도 쉬고 섹스도 해야 삽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슬플 땐 울음이 터져 나오고, 일이 풀리지 않을 땐 답답해지고, 속이 상할 땐 우울해지고, 아플 땐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호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어깨가 축 쳐지고, 할 일이 없으면 존재감이 약해집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해서 뭐 특별하게 사는 것 아니에요. 살아가는 건 다 똑같습니다. 사람이 하는 행위를 다 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삶의 방향성은 달라야 합니다. 솔직히 세상 사람들은 세계 내에서 누가 더 잘났냐, 누가 더 힘이 세냐, 누가 더 빨리 위로 올라가냐, 누가 더 많은 것을 챙기냐, 그 싸움하며 삽니다. 모든 관심사가 거기에 집중돼 있어요. 최근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북미 회담을 놓고 엎었다 뒤집었다 UP & DOWN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누가 더 힘이 세냐, 누가 더 많은 것을 챙기냐를 놓고 치열하게 신경전을 하는 것입니다. 일본과 중국도 그 틈바구니에서 손해 보지 않으려고 온갖 외교적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이고요. 이처럼 세상 사람은 자기 영광과 자기 이익에 골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런 삶의 방향성에 따라 삶의 방식이 결정됩니다. 더 큰 힘을 얻고,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은 것을 얻는데 유리한 수단과 방법을 선택합니다. 자기 영광이나 자기 이익을 쟁취하는데 효과가 있는 수단과 방법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남을 속이기도 하고, 몰래 미끼를 던져 유혹하기도 하고, 상대의 약점을 공격하기도 하고, 가짜뉴스를 퍼뜨려 흑색선전을 하기도 하고, 물리적인 폭행을 가하기도 하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달라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누가 더 잘났냐, 누가 더 힘이 세냐, 누가 더 빨리 위로 올라가냐, 누가 더 많은 것을 챙기냐, 이 싸움 하면 안 됩니다. 자기 영광과 자기 이익을 위해 골몰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삶의 방향성이 세상 사람과 달라야 합니다. “왜 사느냐?” “Why do you live?”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달라야 합니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다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은 “왜 사느냐?”는 물음 앞에서 “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정의로우심을 향해 삽니다.”(마6:33)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날이면 날마다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살까, 어떻게 정의롭게 살까, 어떻게 사랑하며 살까, 어떻게 세상을 아름답고 복되게 하는 삶을 살까를 물으며 기도해야 하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삶의 목표, 삶의 우선순위, 삶의 방향과 방식이 구별돼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래야 세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같은 길을 가가지고는 세상을 구할 수 없어요. 세상과 다른 길을 가야만, 세상 사람들이 가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가야만 세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습니까? 세상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쉽습니까? 예, 결코 쉽지 않습니다.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힘찬 연어들처럼 사는 일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 세상 풍속이 이미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내면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다 하더라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듣고 보고 배우고 익힌 것이 이 세상 풍속이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것들에 의해서 우리들 감각에 주입된 것이 이 세상 풍속이고, 이 세상 풍속이 그리스도인 안에 거의 내면화되어 있고 제2의 천성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세상과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실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로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동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의 자동적으로 누가 더 잘났냐, 누가 더 힘이 세냐, 누가 더 빨리 위로 올라가냐, 누가 더 많은 것을 챙기냐 하는 싸움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말한 것입니다(롬12:2). 저들이 하나님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마음속에 이 세상 풍속이 깊게 새겨져 있기 때문에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말한 것이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정말 예리한 말씀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절하게 발견한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성경 말씀을 듣지만 그들의 마음과 생각 속에 세상의 가치관과 논리와 상식이 가득하더라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천국 간다는 천국행 티켓만 확보했을 뿐이지 실제 삶은 세계 내에서 누가 더 잘났냐, 누가 더 힘이 세냐, 누가 더 빨리 위로 올라가냐, 누가 더 많은 것을 챙기냐, 이 싸움하며 살더라는 것입니다. 더 큰 힘을 얻고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효과적으로 자기 영광이나 자기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상식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습성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법들이 그리스도인의 일거수일투족 안에 깊이 들어와 있더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배와 설교와 기도까지도 철저하게 세상적 가치, 자본주의적 가치에 매몰돼 있더라는 것입니다.


매우 마음 아프고 부끄러운 일인데 사실이 그러합니다. 한국교회는 삶의 방향성이 세상과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먹고 사는 모습은 같아도 삶의 방향성만큼은 달라야 하는데, 가족의 경계는 없어도 삶의 방향성만큼은 세상과 구별돼야 하는데, 삶의 방향성이 구별돼야 다른 것이 다를 수 있는데, 먹고 일하고 숨 쉬고 자고 걷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들이 다 다를 수 있는데 결정적으로 그것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왜 삶의 방향성이 구별되지 못한 것일까요? 하나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들이 눈 먼 자들이라서 그렇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바리새인을 많이 비판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안다고 자처했으나 예수님은 저들이 눈 먼 자들이라고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저들은 눈 먼 자로서 눈 먼 자들을 인도하고 있다, 만일 눈 먼 자가 눈 먼 자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마15:14). 지금의 한국교회가 꼭 그렇습니다. 수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고 자처하며 열심히 설교하고 있습니다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눈 먼 장님이 대부분입니다. 조금이라도 눈 뜬 자들은 알아요.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눈 먼 장님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한국교회가 제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설교자와 성도가 모두 눈 먼 자들인데,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삶의 방향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잃어버린 삶의 방향성을 되찾아야 모든 것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먹고 일하고 숨 쉬고 자고 걷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할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구별된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하나님 말씀에 눈 뜬 설교자가 많이 나와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만 되뇌는 설교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무엇인지를 깊이 이해하고 설명할 줄 아는 설교자,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이 어떻게 겹쳐 있으며 어떻게 구별돼 있는지를 깊이 이해하고 설명할 줄 아는 설교자가 많이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학자나 바리새인 같은 설교자가 아니라 바울 같은 설교자가 많이 나와야 합니다.

 

신앙의 핵심은 방향성입니다.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선포했습니다(마1:15). 여기서 회개하라는 말씀은 뉘우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라는 말입니다. 옳습니다. 삶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핵심이자 본질입니다. 그런데 삶의 방향을 전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씀에 눈떠야 합니다. 말씀에 눈떠야만 내가 지금까지 달려왔던 걸음이 잘못된 방향이라는 것을 알고 대전환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말씀에 눈떴다고 한 순간에 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말씀에 눈을 떠야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재조정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눈뜨지 못하면 믿음으로 천국행 티켓을 손에 쥐고 세상을 좇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중시하고 욕망하는 것을 똑같이 중시하고 욕망하며 살게 됩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와 성도들이 믿음으로 열심히 성실하게 세상의 길을 가고 있는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말씀에 눈을 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가졌으나 율법에 소경이었던 것처럼 많은 목사와 성도들이 말씀은 가졌으나 말씀에 소경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눈을 떠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떠야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재조정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나라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통해 해야 하는 일도 바로 그것입니다. 목사는 설교를 통해 말씀의 눈을 띄워줘야 합니다. 말씀의 눈을 띄워줘서 하나님나라를 향해 가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삶의 방향성을 바르게 깨우쳐줘야 합니다. 그런 설교가 진정한 설교입니다. 인생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 설교, 생명의 나침반 역할을 하는 설교가 진정한 설교입니다. 흐트러진 삶의 방향성, 세속화된 삶의 방향성을 다시금 하나님나라로 재조정하게 하는 설교가 진정한 설교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의 핵심은 말씀입니다. 교회의 핵심도 말씀이고, 예배의 핵심도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첫째, 가족의 경계가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가족의 경계가 없이 세상을 향해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가족은 삶의 방향성이 세상과 구별돼야 합니다.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들처럼 세상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삶의 공동체가 돼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말씀샘교회는 그런 하나님의 가족이 돼야 합니다. 주님, 우리를 이런 가족이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