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참 복잡한 존재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도 있듯이 사람은 구중궁궐보다 더 미묘하고 복잡한 존재입니다. 특히 사람은 자기를 향해 묻습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너는 누구냐’, ‘너는 왜 사느냐’라고 묻습니다. 물론 타인에게도 묻지요. 네 이름이 뭐냐, 네가 좋아하는 것이 뭐냐, 이번 지방선거 투표에 참여했느냐, 투표를 했으면 누구를 찍었느냐, 요즘 ○○○ 영화가 화제이던데 그 영화 봤느냐, 얼굴이 우울해 보이는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느냐 등등 많은 물음은 타인에게 던집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더 많이 묻습니다. 오늘은 뭐할까, 어떤 옷을 입을까, 어떤 직업을 선택할까, 누구를 만날까, 누구와 결혼할까,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 우주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죽음은 무엇일까, 죽으면 그것으로 끝일까,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하고 부패하고 더러울까, 정치인은 왜 거짓말을 잘할까, 왜 남자가 여자를 혐오하고 여자가 남자를 혐오할까, 우주만물은 왜 있을까,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무언가가 있을까, 내 이성과 감정은 왜 엇박자를 낼까, 나는 왜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등등 수많은 물음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며 살아갑니다.
사실 인간의 삶은 물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물음이 삶을 구성하고, 물음이 삶을 이끌어가고, 물음이 사람의 됨됨이를 형성합니다. 인류의 역사도 인간의 물음을 통해 발전해왔고, 한 사람의 인생도 그 사람의 물음을 통해 발전하고 성숙해갑니다. 인간은 진실로 묻는 존재입니다. 묻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특권이고, 묻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자질입니다. 물음이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물음이 없으면 삶도 없어요.
그렇다면 왜 물을까요? 왜 쉼 없이 물을까요? 첫째, 생각하기 때문에 묻습니다. 둘째, 몰라서 묻습니다.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알지 못하니까 묻는 겁니다. 사실의 배후가 궁금하고 사건의 배후가 궁금해서 묻고, 뭘 선택하는 게 좋을지를 판단하기가 어려워서 묻습니다. 그러나 모든 물음은 ‘잘 사는 것이 뭘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라는 물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말 그런지 확인해봅시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뭐할까, 어떤 옷을 입을까, 누구를 만날까를 묻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누구와 결혼할까, 어떤 직업을 선택할까,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을까,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 세상살이가 왜 이렇게 힘들까, 우주만물은 왜 있을까, 우주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죽음은 무엇일까, 죽으면 그것으로 끝일까를 묻습니다. 그런데 이런 물음들이 단지 그것만을 묻는 것일까요? 단지 어떤 옷을 입을지를 묻는 것이고, 단지 누구와 결혼해야할지를 묻는 것이고, 단지 죽음이 뭔지를 묻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잘 살기 위해서 묻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살면 안 되니까 어쨌든지 잘 살아보려고 이런저런 궁리를 하며 묻는 것입니다. 예, 인간의 모든 물음은 잘 사는 것이 뭘까,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하는 물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함께 물어봅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도덕을 잘 지키는 게 잘 사는 것일까요? 성공하는 게 잘 사는 것일까요? 돈을 많이 버는 게 잘 사는 것일까요? 종교적인 계율을 따르는 게 잘 사는 것일까요?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약자를 돌보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아마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인생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를 물으려면 반드시 나는 누구인가, 인생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이 물음에 대해 어떤 답을 하느냐에 따라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 달라지기 때문에 반드시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정말 잘 살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이 물음을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이 물음을 묻지 않은 채로 살아갑니다. 그 물음이 밥 먹여주지 않으니까, 그 물음을 묻는다고 돈이 나오지 않으니까, 돈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돈에서 멀어지게 하니까 아예 외면하거나 마음 한쪽 구석에 처박아둔 체로 눈앞의 성공을 쟁취하러 나가고, 돈을 거머쥐러 나갑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밤낮없이 성공을 쟁취하라고, 돈을 거머쥐라고 부추기니까 사람들이 거기에 세뇌되어서 ‘나는 누구인가?’도 묻지 않고 돈과 성공을 찾아 나섭니다. 유치원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그렇게 살아갑니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까 그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고 남들 따라서 살아갑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로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나 없는 나로 살아가고, 나 아닌 나로 살아갑니다.
여러분, 바로 이것이 비극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과 번뇌는 바로 여기서 비롯됩니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로 살고, 나 없는 나로 살고, 나 아닌 나로 살기 때문에 삶이 공허하고 번뇌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없는 삶은 허상입니다. 이 물음을 묻지 않고 사는 것은 삶의 껍데기만 사는 것이지 삶의 알맹이를 사는 게 아닙니다. 삶의 알맹이, 삶의 알짬은 나를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래는 묻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묻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누구인가? 인생은 무엇인가?’를 묻게 되어 있습니다. 저도 사춘기가 되면서 이 물음을 물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떤 인간이 참된 인간인가를 물었습니다.
여러분,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단지 사람일까요? 단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고등동물일까요?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자기 존재의 뿌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존재의 뿌리를 알려면 나를 낳아준 부모가 누구인지, 그 부모의 부모가 누구인지, 그 부모의 부모의 부모가 누구인지를 계속 추적해 올라가야 합니다. 계속 추적해 올라가서 맨 처음 인간을 만나야 합니다. 이 땅에 첫 발을 디딘 맨 처음 인간, 시간과 함께 변형된 인간이 아닌 원형적 인간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맨 처음 인간을 만났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내가 누구인지,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을까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속 시원하게 풀릴까요? NO. 풀리지 않습니다. 맨 처음 인간, 원형적 인간을 만나도 물음이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어려운 물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저 사람은 어디서 왔을까?’, ‘맨 처음 인간인 저 사람의 뿌리는 무엇일까?’라는 전혀 새로운 물음, 훨씬 어려운 물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백퍼센트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맨 처음 인간을 만났는데도 인간이 누구인지, 나는 누구인지가 풀리지 않을까요? 그것은 내가 맨 처음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 존재의 뿌리가 맨 처음 인간이라면 그 사람을 만나는 순간 내가 누구인지가 훤히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습니다. 맨 처음 인간을 만났는데도 내가 누구인지, 인간이 누구인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그렇다면 내 존재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나라는 존재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맨 처음 인간이 내 존재의 뿌리가 아니라면 맨 처음 인간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맨 처음 인간은 어디서 왔을까요? 당연히 알 수 없습니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맨 처음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를 밝혀낼 수는 없습니다. 이 일은 인간의 능력으로 밝혀낼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오직 창조자만이 밝힐 수 있는 일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창1:26-27)
매우 짤막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심오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말씀은 사람이 단지 눈에 보이는 어떤 생물체나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고등동물이 아니고 하나님을 닮은 존재,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재,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에게 속한 것들을 내어주셨다는 말입니다. 사랑, 지혜, 능력, 정의, 생명, 용기, 창의력, 자비, 온유, 신실, 희락, 평화, 오래 참음, 선함 등등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들인데, 이런 것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셨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사람의 원형이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모델링해서 사람을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원형은 맨 처음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원형은 놀랍게도 하나님입니다. 물론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거의 무한대에 가깝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저편에, 새롭게, 멀리, 낯설게, 탁월하게 계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소유가 되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일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무한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원형은 맨 처음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맨 처음 인간을 만나도 내가 누구인지, 인간이 누구인지가 보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람의 원형이 맨 처음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인간의 원형이신 하나님, 맨 처음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비로소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풀립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제가 스무 살 때 하나님을 만났는데요,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내가 누구인지가 깨달아졌습니다. 17살 때부터 내가 누구인지, 어떤 인간이 참된 인간인지를 몰라 답답했었는데 하나님을 만나자 눈이 열렸습니다. 나를 보는 눈이 열렸습니다. 난생 처음 내가 누구인지가 보였습니다. 물론 희미했습니다. 지금도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난생 처음 내가 누구인지가 보였습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물음이 엉킨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렸습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이고,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가 깨달아졌습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존귀하게 대하시는지가 깨달아졌습니다. 저는 졸지에 우주의 왕자가 됐습니다. 역사의 주역이 됐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자가 됐습니다. 억만장자도 부럽지 않고 대통령도 부럽지 않은 온 세상을 가진 자가 됐습니다. 예, 저는 하나님을 통해 저를 봤습니다. 저의 겉모습이 아니라 저의 진면목을 봤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제 존재와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날마다 변화하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놀라운 진실입니다. 인간의 원형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의 원형은 최초의 인간 아담이 아닙니다. 인간의 원형은 하나님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습니다만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당신 안에 있는 것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사랑, 지혜, 능력, 정의, 생명, 용기, 창의력, 자비, 온유, 신실, 희락, 평화, 오래 참음, 선함 등등 하나님 안에 있는 것들을 내어주고 또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모델링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단지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탁월한 두뇌를 가진 고등동물이 아닙니다. 물론 흙으로 빚어진 보잘 것 없는 존재이고, 생각하는 능력이 있어서 동물보다 좀 나은 존재이고, 시간과 공간의 구속을 받는 존재이지만, 깊이의 차원에서 보면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닮은 존재,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재, 하나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바울은 이 진실을 꿰뚫어봤습니다. 인간이 누구인지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가리켜 ‘하늘의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고 했습니다(고후4:7). 옳습니다. 사람은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생각하는 능력이 있어서 동물보다 좀 나은 존재, 상황에 매인 유한한 존재,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을 수 없는 제한적 존재입니다. 인간은 진실로 흙에 불과합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질그릇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단지 질그릇이 아닙니다. 이 질그릇 안에는 하늘의 보화가 담겨 있습니다. 사랑, 지혜, 능력, 정의, 생명, 용기, 창의력, 자비, 온유, 신실, 희락, 평화, 오래 참음, 선함 등등 하나님 안에 있는 것들이 충만히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오묘하고 자비로운 일인데요 하나님은 심히 오묘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피조물인 인간 안에 충만히 거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은 한없이 복잡합니다. 부부가 평생을 함께 살아도 남편이 누구인지를 다 모르고 아내가 누구인지를 다 모를 만큼 인간은 깊고 오묘하고 신비롭고 복잡합니다. 인간은 한 편으로는 질그릇이고,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한 편으로는 피조물이고, 한 편으로는 창조자에 버금갑니다. 여러분과 저는 이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질그릇입니다. 흙에 불과한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한 존재, 하나님을 닮은 존재, 하나님에 버금가는 존재, 하나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아름답고 존귀하고 위엄차고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눈부신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눈부신 존재가 빛을 잃었습니다. 사랑, 지혜, 능력, 정의, 생명, 용기, 창의력, 자비, 온유, 신실, 희락, 평화, 오래 참음, 선함을 발휘하며 살기는커녕 오히려 미워하고, 대적하고, 속이고, 정죄하고, 경쟁하고, 공격하고, 죽이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홍수로 세상을 멸하시며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창6:5). 예레미야 선지자도 탄식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고(렘17:9). 그렇습니다. 인간은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심히 부패하고 더럽고 추악한 존재로 추락했습니다. 사랑, 지혜, 능력, 정의, 생명, 용기, 창의력, 자비, 온유, 신실, 희락, 평화, 오래 참음, 선함 등등 하나님의 것들을 거의 다 잃어버린 채 나 없는 나, 나 아닌 나로 추레하게 살고 있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대적하고 속이고 정죄하고 경쟁하며 죽임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이 왜 이렇게 형편없는 존재로 추락한 것일까요? 세상의 머리인 인간, 세상을 다스려야 할 인간이 왜 세상을 우상으로 경배하며 세상의 종이 된 것일까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인간의 원형이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원형이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정하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고,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거짓된 나, 왜곡된 나, 나 아닌 나, 나 없는 나로 사는 것이고, 또 거짓된 나, 왜곡된 나, 나 아닌 나, 나 없는 나로 살기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대적하고, 속이고, 정죄하고, 경쟁하고, 공격하고, 심지어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내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삽니다. 사람이 다 그렇게 사니까 사람이란 그런 존재라고 미루어 짐작하고, 거짓된 나, 왜곡된 나, 나 아닌 나를 나라고 생각하고 극진히 대접하며 삽니다. 거짓된 나, 왜곡된 나, 나 아닌 나에게 온갖 사랑과 충성을 바치며 삽니다. 그러니 열심히 산들 기쁨이 있겠습니까? 성공을 하고 돈을 번들 안식이 있겠습니까? 꿈을 이루고, 자아실현을 하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열심히 일한들 의미가 있겠습니까? 꿈을 이루어도 공허할 수밖에 없고, 성공을 해도 마음 한 켠이 시릴 수밖에 없고, 열심히 일해서 가족을 먹여 살려도 영혼에 찬바람이 몰아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자고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진실로 알면 서로 미워하고 대적하고 속이고 정죄하고 경쟁하며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대적하고 속이고 정죄하고 경쟁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좀 더 근원적으로는 인간의 원형이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부정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인간의 원형이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이고,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거짓된 나, 왜곡된 나, 나 아닌 나를 나 인줄 아는 것이고, 거짓된 나, 왜곡된 나, 나 아닌 나를 나 인줄 알기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대적하고 속이고 정죄하고 경쟁하며 가슴 시린 삶, 허접하고 추레한 삶, 거짓되고 부패한 삶, 겉모양은 그럴 듯하나 속은 텅 빈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사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사는 것이 죄 중의 죄고, 슬픔 중의 슬픔이고, 비극 중의 비극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간곡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인간의 원형이신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인간의 원형이신 하나님을 찾아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고,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거짓된 나, 왜곡된 나, 나 아닌 나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또 거짓된 나, 왜곡된 나, 나 아닌 나에서 해방되어야 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될 수 있고, 내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야 사랑, 지혜, 능력, 정의, 생명, 용기, 창의력, 자비, 온유, 신실, 희락, 평화, 오래 참음, 선함 등등을 발휘하며 생명살이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일은 나를 찾는 일이고, 나를 찾는 일은 하나님을 찾는 일입니다. 또 나를 찾는 일은 삶을 찾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나와 삶은 이처럼 한데 묶여 있고 얽혀 있습니다. 하나님, 나, 삶은 따로따로가 아닌 한 덩어리입니다. 하나님을 꼭 붙드십시오.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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