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보다 빠르게 지나가는 세월과 함께 사라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삶에 정말 소중한 것들이 많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 사이를 이어주던 정(情)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동네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동네 어른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웃사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줄넘기나 자치기 등 함께 하는 놀이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언어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어떤 언어, 어떤 말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삶의 한 부분이 무너진다는 것인데 시대와 함께 잃어가는 언어들이 있습니다. 사전에는 있지만 사람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는 언어들이 있습니다. 우정, 의리, 신뢰, 신의, 나눔, 이런 단어들은 거의 회자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단어를 말하지도 않고 당연히 들을 기회도 거의 없습니다.
‘나눔’이라는 단어만 해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나눈다’는 말을 일상생활에서 많이 듣고 사용합니까? 방송이나 구호단체에서 구호 모금을 홍보할 때나 말하지 거의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나눔’이라는 말,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또 나누어 갖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처럼 아름다운 말, 아름다운 마음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혼자 살도록 만들지 않았습니다. 더불어 함께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함께 어우러져 이것저것을 나누며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도 나누고 저것도 나눌 때 사는 맛이 나고, 사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술 이야기를 해서 좀 그렇습니다만 술을 좋아하는 애주가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술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맛으로 마신다고. 술잔이 오고가야 술맛이 난다고. 그렇습니다. 술이 아무리 좋아도 혼자 마시는 술은 맛이 없습니다. 술잔이 오가면서 마주쳐야 술맛이 나는 법입니다.
술 한 잔을 마시는 것도 그러한데 인생살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혼자 사는 인생살이, 정말 재미없습니다. 흔히 ‘내가 벌어서 내 맘대로 쓰고 사는 것이 제일 속 편하다’고들 말하는데 속이 편할지는 모르겠으나 거기에 무슨 낙이 있겠습니까?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보람이 있겠습니까? 사실 내가 벌어서 내 맘대로 쓰고 사는 것처럼 무미건조하고 딱한 일은 없습니다. 자고로 인생이란 서로 어울리고 나눌 때, 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고, 슬픔을 나누고, 아픔을 나누고, 지식을 나누고, 지혜를 나누고, 마음을 나눌 때 사는 맛이 나고 피차 자라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서로 함께 나누며 살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작은 것이라도 서로 나누며 살 때 사는 맛이 나고, 힘든 인생살이를 버텨낼 힘이 생기고, 그 힘을 통해 서로가 자라는 법입니다.
아주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목회 초년 시절에 나이 먹어 결혼한 신혼부부가 옆집에 살았습니다. 어느 날 옆집 남자가 싱글벙글하며 1주일 전에 아내가 아들을 출산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듣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옆집이 아들을 출산했다는데 작은 선물이라도 하자. 그래서 작은 선물을 했습니다. 오래 만난 사이도 아니고 마음을 주고받는 대화를 나누지도 않은 사이였지만 출산을 축하하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런 것이 인생의 아름다움이고 살아가는 재미 아니겠습니까.
지난 주 목요일에 2차 오두막 강좌를 마쳤습니다. 12주 동안 구원의 세계를 탐험하는 멋진 여행을 했습니다. 돈 한 푼 받지 않고, 교회에서 간식까지 다 주어가면서 구원의 영광과 비밀을 나누었습니다. 온 힘을 다해 구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구원을 사는 길로 안내했습니다. 열두 번의 강의를 두 번씩 24회 강의하는 것,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나눈 그 시간들이 기쁘고 뿌듯하고 감사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삶입니다. 사실 삶이란 나눔이고, 나눔이 삶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소유가 삶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자 오해입니다. 여러분, 소유는 결코 삶이 아닙니다. 소유는 삶을 소외시키고 옥죌 뿐이지 삶을 진작시키지는 않습니다. 나눔만이 삶이고, 나눔만이 기쁨입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를 권면하면서 도둑질하지 말라는 권면까지 합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 참 구체적인 권면입니다. 일할 힘이 있으면 정당하게 돈 벌어서 일할 수 없는 자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열심히 돈 벌어서 나누라는 거예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구제하는 일에 대해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주일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헌금하고 그것은 잘 보관해놓으십시오. 적절한 때가 되면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여러분의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고전16:1-4)
로마에 있는 교회 성도들에게도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의 절대성을 강조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 우리의 몸이 여러 지체로 이루어져 있듯이 그리스도의 몸도 여러 지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각각의 지체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의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섬기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권면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베푸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받은 은사를 따라 서로 나누라고, 나눔을 통해 서로에게 덕을 끼치고 주님의 몸을 온전히 세우라고 다양한 은사를 주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롬12:4-8).
이뿐 아닙니다. 신약성경에는 ‘서로’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서로’라는 말은 ‘나눔’과 ‘협동’을 전체하는 말인데 서로 앞장서서 남을 존경하라(롬 12:10), 서로 마음을 합하라(롬 12:16), 서로를 받아들이라(롬 15:7), 서로 충고하라(롬 15:14), 서로 참으라(고전 11:33), 서로를 위하여 같이 걱정하라(고전 12:25), 서로 화목하라(살전 5:13), 서로에게 선을 행하라(살전 5:15), 서로 사랑으로 섬기라(갈 5:13), 서로 남의 짐을 져주라(갈 6:2), 서로 위로하라(살전 5:11), 서로 사랑으로 참아주라(엡 5:21), 서로 죄를 고백하라(약 5:16), 서로 용서하라(골 3:13),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약 5:16), 서로 친교를 나누라(요일 1:7), 서로를 세워주라(살전 5:11) 등등 ‘서로’, ‘피차’라는 말이 쉼 없이 나옵니다.
성경은 왜 이렇게 ‘서로 ...하라’는 말을 많이 할까요? 나눔이 곧 삶이고, 나눔이 곧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지체가 되어 사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나라의 삶이고 기쁨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음식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고, 슬픔을 나누고, 아픔을 나누고, 지식을 나누고, 지혜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이 나누어야 할 수많은 목록 중에 첫 번째 목록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 바울은 왜 이렇게 강력하게 말씀을 전파하라고 말했을까요? 그리스도인은 왜 최선을 다해 복음을 나누어야 할까요?
첫째, 복음은 집이나 아내처럼 나 혼자 차지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고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 자기 꽁무니를 따라다니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며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라고 불렀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불렀습니다. 세상 끝까지 가서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모르는 자들과 나누라고 불렀습니다.
옳습니다. 복음은 자기 안에 고이 간직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다른 사람과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누어야 하는 것, 이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복음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누지 못하면 일차적으로 복음이 질식해 죽습니다. 풀이나 나무가 태양을 보지 못하면 누렇게 말라 죽고, 샘물을 퍼내지 않으면 샘물이 고여 썩듯이 복음도 나누지 않고 교회 속에 가두어 놓으면 복음이 누렇게 말라 죽고, 복음이 썩어 냄새나게 됩니다.
이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영혼이 메말라 죽습니다. 복음을 나누는 것은 영혼의 운동과 같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운동을 해야 근육이 탄탄해지고 근육이 탄탄해야 활력이 넘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영혼도 복음을 나누는 영혼의 운동을 해야 영혼이 탄탄해지고 활력이 넘치지 복음을 나누지 않으면 영혼이 메말라 시들시들해집니다. 고목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세월이 갈수록 영혼이 딱딱해지고 자기고집만 강해지고 그래서 사람이 편협해지고 고리타분해지고 옹졸해집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나눠야 합니다. 복음은 소유하라고 주어진 게 아니라 나누라고 주어졌기 때문에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파하고 나눠야 합니다.
둘째, 우리가 복음을 나누어야 하는 이유는 모든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종교적인 진단이 아닙니다. 기독교만의 진단이 아닙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구체적 사실입니다. 자신의 내면과 언행을 조금이라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구체적 사실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이든지, 심리적으로 무감감한 사람이든지,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든지 좌우간 뭔가가 막혀 있는 사람이지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라고 봐야 할 겁니다.
예, 사람은 죄인입니다.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수많은 죄와 어둠에 갇혀 삽니다. 자기 안에 갇혀 살고, 돈에 갇혀 살고, 권력에 갇혀 살고, 육체의 욕망에 갇혀 살고, 노동에 갇혀 살고, 세상의 상식과 도덕에 갇혀 살고, 시대 문화에 갇혀 살고, 오래된 전통에 갇혀 삽니다. 근본적으로는 자기 안에 있는 죄에 갇혀 삽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했습니다(요8:34). 예, 모든 인간은 죄의 종으로 살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모든 세상살이는 죄의 종살이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죄의 종살이를 하는지 볼까요? 겉으로만 보면 사람들이 자기 맘대로, 자기 의지대로 죄를 짓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깊이의 차원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 의지로 죄를 짓는 게 아니라 죄라는 권세에 굴복하며 죄를 짓습니다. 죄에 사로잡혀 죄를 짓고, 죄에 이끌려 죄를 짓고, 죄를 향해 죄를 짓고, 죄를 내면화하여 죄를 짓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사실은 모든 인간이 죄에 사로잡혀 죄를 짓고, 죄에 이끌려 죄를 짓고, 죄를 향해 죄를 짓고, 죄를 내면화하여 죄를 짓습니다.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죄를 지었으니까 ‘죄의 주인’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은데 ‘죄의 주인’이라고 하지 않고 ‘죄의 종’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모든 사람이 죄의 종이기 때문에 사람은 다른 무엇보다도 죄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시작이고 핵심입니다. 예수의 복음이 바로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는 능력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고 나눠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복음을 나누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의 복음이 유일무이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설교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나중에 쓴 편지에서도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벧전1:23)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당연히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최고의 복음 전도자인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1:15)라고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예수의 복음만이 유일무이한 구원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예수의 복음 말고도 다른 구원의 길이 있다면, 석가모니를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있고, 공자를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굳이 예수의 복음을 고집할 필요도 없고 열심히 나눌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기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 복음만이 유일무이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에 복음을 나누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복음을 나누어야 하는 이유를 짧게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복음은 나누라고 주어졌다, 둘째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셋째 예수의 십자가 복음만이 유일무이한 구원이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고 나누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옳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복음을 나누는 삶이어야 합니다.
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님은 복음 전도와 관련해서 중요한 두 마디를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도 못한 채 거부하고 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지를 알기만 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맞습니다. 기독교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도 많고, 복음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거부하는 자들도 많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거부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특히 요즘에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인상 때문에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도 많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복음을 제대로 설명하고 가르치기만 한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자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설명하고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그냥 예수 믿으세요, 우리 교회 나오세요, 라고 한 마디 하는 것 말고, 좀 더 인격적인 방식으로, 복음을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기독교를 오해한 채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때문에 복음에 냉소적인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좀 더 자세하게, 좀 더 솔직하게, 좀 더 정확하게 복음을 전해야겠습니다. 한 사람을 마음에 품고 기도하며 복음을 나눠야겠습니다. 방법은 다양합니다. 주일 예배 때 들었던 말씀을 나누어도 되고, 일상에서 경험하고 깨달은 것을 나누어도 되고, 그저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어도 됩니다. 정을 나누고, 삶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실패와 아픔을 나누고, 경험과 깨우침을 나누면 됩니다. 그런 나눔을 통해 구원의 복음이 나누어질 것입니다.
오늘 설교 서두에서 나눔이 곧 삶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서로 함께 나누며 살 때 사는 맛이 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옳습니다. 나눔이 삶입니다. 소유가 삶이 아니라 나눔이 삶입니다. 서로 함께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나라의 삶이고, 삶의 영광이자 기쁨입니다. 특히 복음을 나누는 것은 모든 나눔 중에서도 가장 소중하고 격조 높은 나눔이고, 가장 영광스럽고 복된 나눔입니다. 우리 모두 복음을 나누는 삶을 살아갑시다. 지극히 겸허한 마음으로 복음을 나누는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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