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병선목사

성령12- 온유, 성숙에 이르는 길 (마태복음11:29-30)

새벽지기1 2017. 10. 23. 07:27


오늘 살펴볼 성령의 열매 ‘온유’는 ‘오래 참음’, ‘절제’와 함께 수동적인 측면이 강한 열매입니다. 능동적인 행함보다는 수동적인 받아들임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열매가 중요합니다. 사실 인생은 능동적인 행위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생은 수동적인 받아들임으로도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능동적인 행위보다 수동적인 받아들임이 많은 게 인생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에서도 확인되듯이 인생이란 피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 어떤 형제를 만나느냐, 어떤 외모를 타고나느냐, 어떤 능력과 기질을 타고 나느냐,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 어떤 이웃을 만나느냐, 학교에서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 직장에서 어떤 상사를 만나느냐, 교회 안에서 어떤 성도를 만나느냐, 오늘 어떤 날씨를 만나느냐 하는 것들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홍수와 지진 같은 자연재해라든지,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라든지, 이런저런 모임이라든지, 가까운 사람의 죽음 같은 것들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그냥 받아들여야 돼요. 사람들은 인생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인생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선택할 수 있는 일보다 피할 수 없는 일이 훨씬 많습니다.

 

이렇게 피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야 피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은 인생을 잘 살 수 있을까요? 비결은 단순합니다. 피할 수 없는 일들을 지혜롭게 받아들일 줄 알면 됩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는 말대로 피할 수 없는 일들을 즐길 줄 알면 됩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이 온유함입니다. 그러니까 온유함은 밖으로 행하는 능력이 아니라 안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입니다.

온유함은 흔히 생각하는 부드러움이 아닙니다. 인간관계 처세술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관대하게 용납하는 것도 아닙니다. 적당히 모나지 않게 처신하는 능력도 아닙니다. 온유함은 내 삶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과 사건을 용납하고 환대하는 능력입니다. 내가 원하건 원치 않건, 내가 좋아하건 좋아하지 않건, 내 삶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 내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 나에게 다가오는 상황을 외면하거나 내치지 않고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입니다.

물론 온유함으로서의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이란 모든 일을 무조건 용납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적당히 넘기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온유함으로서의 ‘받아들일 줄 아는 능력’이란 현실을 외면하거나 배척하기보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직면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최근에 논란이 많은 동성애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온유한 자는 동성애를 무조건 용납하거나 수용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동성애를 무조건 정죄하거나 배척하지도 않습니다. 동성애 문제를 동성애자들의 인권이라는 시각에서만 보지도 않고, 성적인 시각에서만 보지도 않습니다. 온유한 자는 동성애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주시하고 관찰합니다. 동성애자들의 고민이 무엇이고 아픔이 무엇인지, 그들이 어떻게 동성애를 하게 됐는지, 그들의 인권 상황이 어떠한지, 이 시대에 왜 동성애 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부각됐는지 등등을 면밀하게 살피고,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동성애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동성애자들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은지, 어떻게 치유하고 회복시켜야 하는지를 열린 마음으로 탐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성애 문제를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좀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자기 뜻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자기가 희망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어 하고, 상사는 아랫사람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부리고 싶어 합니다. 일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풀어가고 싶어 합니다. 자기가 상황을 통제하면서 배제할 것은 배제하고, 외면할 것은 외면하고, 회피할 것은 회피하고, 선택할 것은 선택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온유함은 바로 통제의 욕구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통제하지 않고 받아들이듯이, 가을이 오는 것을 통제하지 않고 받아들이듯이 나에게 다가오는 어떤 일이나 상황을 통제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대통령을 예로 들어봅시다. 대통령은 막강한 힘이 있기 때문에 언론과 정보를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발동할 겁니다. 그래서 언론을 통제한다면 그 대통령은 온유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반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발동함에도 불구하고 그 욕구를 내려 놓고 언론과 정보를 통제하지 않는다면 그 대통령은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온유함이란 일차적으로 받아들임입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일들,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를 내려놓고 나에게 주어진 현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내가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지 않으니까, 내가 외면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으니까, 내가 부정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으니까, 내 마음대로 내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으니까, 현실이라는 게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고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실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외면하고 피하고 부정하는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환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가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또 외부 자극을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이 내 존재와 성품과 삶의 자산이 되어 내 존재와 성품과 삶을 자라게 하고 충만하게 합니다. 내가 원치 않는 현실이 다가오더라도 그 현실을 외면하거나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환대하면 그것으로 인해 내가 성장하고 충만해지고 온전해집니다.

나무를 생각해보면 좋습니다. 나무는 밖으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자기에게 맞는 환경을 찾아 이동하지 못합니다. 나무는 자기 자리에 붙박여서 외부의 환경을 받아들입니다. 장마에 비가 너무 많이 온다고 피하지 못해요. 햇볕이 너무 뜨겁다고 피하지 못해요. 비가 오면 비를 맞고, 햇볕이 내리쬐면 햇볕을 쪼입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면 눈보라를 맞습니다. 개미나 벌레가 가지와 잎을 갉아 먹으면 찍소리 못하고 먹힙니다. 나무는 이렇게 자기에게 다가오는 외부 환경과 자극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견딥니다. 수십 년, 때로는 수백 년을 그렇게 한 자리에서 자기에게 다가오는 온갖 풍파를 다 받아들이고 적절하게 반응하면서 견딥니다. 그리고 그러는 과정에서 나무가 자랍니다. 외부 환경을 받아들임으로써 어느 때는 꽃을 피우고, 어느 때는 열매를 맺고, 어느 때는 잎을 떨어뜨리고, 그러면서 나무가 아름드리나무로 자랍니다. 세상에 풍성한 열매를 내어놓습니다. 바로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나무는 이렇게 아무 말 없이 온유함의 정수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온유함을 배우려면 나무에게서 배우십시오.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의 이야기를 들으십시오. 나무는 아무 말 없이 온유함을 가르치는 우리의 스승입니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갑시다. 온유한 사람은 나무처럼 외부 환경을 받아들입니다. 바다가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듯이 갖가지 현실을 자기 안에 받아들여 자기가 거대한 바다가 됩니다. 그리고 그 바다에서 자유롭게 유영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안에 작은 웅덩이 하나 파놓고 거기서 살지 않아요. 현실이라는 갖가지 강물을 자기 안에 받아들여 그 안에서 삽니다. 가난해도 괜찮고 부유해도 괜찮아요. 낮아도 괜찮고 높아도 괜찮아요. 권력이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괜찮아요. 어떤 현실이 다가오더라도 그 현실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유영합니다. 그 현실을 품고 살아냅니다. 이것이 온유함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놀랍게도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시편 37편에서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긴”다고 했고(v.11), 예수님은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마5:5).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땅을 차지한다,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말은 땅 부자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현실에 깊이 뿌리내린다는 뜻입니다. 현실을 충만하게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현실 자체를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 누린다는 뜻입니다. 정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땅은 현실입니다. 현실이야말로 참된 땅이에요. 흙덩어리가 땅이 아니고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 진짜 땅입니다. 그런 면에서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온유한 자가 현실을 더 풍성하게 산다, 더 충실하게 산다, 더 깊게 산다, 더 온전하게 산다, 더 옹골차게 산다는 뜻입니다. 현실을 더 폭넓게 품고 산다는 뜻입니다. 현실에 더 깊이 뿌리내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 이름이 많이 알려진 사람, 큰 사업을 하는 사람, 대통령이 큰 사람이 아니고 현실 전체를 마음에 품고, 그 현실을 옹골차게 살아가는 사람이 진짜 큰 사람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중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박근혜 전 대통령을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싸움질하고 욕지거리하는 국회의원을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중소기업에 횡포 부리는 대기업 회장을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소신 없이 권력에 아부하는 장관이나 고위 공무원을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대형교회 담임 목사를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큰 도둑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있어도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정말 큰 사람은 누구냐? 현실 전체를 마음에 품는 사람, 즉 온유한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제대로 인식하지는 않지만, 또 온유한 사람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겉으로 잘 드러나지도 않지만, 온유한 사람이야말로 진짜 큰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사회적인 지위도 없고, 사회적인 명망도 없고,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세력도 없는 변방의 가난뱅이였습니다. 내놓을 직함 하나 없는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적군을 물리치는 영웅이 아니었어요. 백마를 타고 자기 왕국이 도래했다고 선포하는 왕이 아니었어요. 예수님은 비천한 당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제자들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무력하게 십자가의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슴 속에는 세상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도 품지 못한 세상, 하나님이 창조한 거대한 세상이 있었습니다. 죄와 죽음에 시달리는 뼈아픈 현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의 현실을 원망하지도, 외면하지도, 배척하지도 않았습니다. 현실이 왜 이렇게 개떡 같으냐고 내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개떡 같은 현실을 품었습니다. 죄와 어둠이 가득한 개떡 같은 현실을 품고 그 현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품은 세상, 예수님이 품은 현실이 어느 누구보다도 크고 광대하니까 그분이 가장 크고 광대한 사람인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습니다. 세상 전체를 품은 사람, 삶의 현실 전체를 품은 사람이 진짜 큰 사람입니다. 세상 전체를 품은 사람, 삶의 현실 전체를 품은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고, 온유한 사람이 진짜 큰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마11:29)

 

우리도 예수님 같은 큰 사람이 돼야 합니다. 사회적인 지위에서 큰 사람, 맡은 일에서 큰 사람, 권력과 돈에서 큰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 같이 존재에서 큰 사람이 돼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제일 되는 사명입니다. 저는 목사로 사는 것을 제일 되는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는 것을 제일 되는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4:13)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같은 분량으로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우리의 사명이요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니고 예수님 같은 큰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여러분, 이 사명에 전념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사명에 전념한다고 해서 세상이 표창장 주지 않습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명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큰 사람이 되면 일은 뒤따라옵니다. 일을 쫓으면 큰 사람이 될 수 없지만 큰 사람이 되면 일이 좇아옵니다. 그러므로 큰 사람이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합니다.

 

결국 온유한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그리고 큰 사람이 되려면 온유해야 합니다. 온유해야만, 다시 말하면 나에게 다가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큰 사람으로 자랄 수 있습니다. 완고하면 못 자라요.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려고 대들면 못 자라요. 그런 사람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딱딱하게 굳어질 뿐이지 자라지는 못해요. 온유해야 자랄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예수님 같은 큰 사람으로 자랄 수 있어요. 사람뿐 아닙니다. 모든 생명은 외부의 환경을 받아들여야만 자랍니다. 개도, 돼지도, 호랑이도, 고래도, 나무도, 개나리도 외부의 환경을 받아들이고 반응할 줄 알아야 자랍니다. 사람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온유해야 자랍니다. 그리고 자란 사람이 온유합니다. 온유해야 자라고, 자라야 온유해져요.


모세를 봅시다. 성경은 모세를 가리켜 지상의 어떤 사람보다 온유하다고 말합니다(민12:3). 본래는 혈기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이집트 사람이 자기 동족인 히브리 사람을 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을 쳐 죽였을 정도로 혈기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그런 모세가 노년에는 지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됐습니다. 그 배경이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목이 곧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품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와 함께 출애굽한 사람들은 ‘목이 뻣뻣한 백성’이요(출32:9), ‘목이 곧은 백성’이었습니다(33:5, 신9:6,13, 31:27). 신약시대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설교하면서 출애굽한 조상들을 가리켜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행7:51)이라고 했습니다. 예, 모세는 목이 뻣뻣한 자들을 이끌고 이집트에서 탈출했고, 그들과 함께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자기에게 다가오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치지 않았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죽을 위기를 피해 동족을 버리고 떠나기도 했지만 나이가 든 후에는 고난 받는 동족에게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목이 곧은 사람들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을 자기의 현실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힘겨운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온유한 자로 성장했습니다. 모세가 만일 이 현실을 외면하고 부정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모세가 과연 온유한 자가 됐을까요? 어림도 없습니다. 모세가 자기에게 다가오는 현실을 받아들였기에, 즉 온유했기에 온유한 자로 자란 것입니다. 온유했기에 큰 사람으로 자란 것입니다. 결국 온유함으로 온유함에 이른 거예요. 온유함으로써 자랐고, 자람으로써 온유해진 겁니다. 다윗도 사울의 손에서 구원받은 후에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다”(삼하22:36)고 노래했습니다.

 

예, 온유함이 우리를 크게 자라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의 온유함을 배우라고 말씀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11:29). 바울은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라.”(딤후2:24-25). 사랑하는 디도에게는 “너는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라.”고 권면했습니다(딛3:2).

예, 우리는 온유함을 배워야 합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배양해야 합니다. 예수님에게서 배우고, 나무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물론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현실과 타협하는 것은 결이 다릅니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은 내가 현실에 무릎 꿇는 것이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현실을 품는 것입니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은 내가 현실보다 작아지는 것이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현실보다 커지는 것입니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은 내가 현실 속에 녹아들어가는 것이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현실을 녹여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현실과 타협하는 것과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많이 다릅니다. 어찌 보면 비슷한 듯 하지만 둘은 많이 다릅니다.

 

온유한 사람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보십시오. 현실을 폭넓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현실과 타협하지는 않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현실과 타협하지는 않아요. 반면에 아무런 저항 없이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아니, 현실을 환대합니다. 자기가 현실보다 크니까, 자기가 현실보다 뜨거우니까 이무런 저항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결국 현실을 받아들이려면 내가 현실보다 커야 하고, 내가 현실보다 뜨거워야 합니다. 내가 현실보다 커야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고, 내가 현실보다 뜨거워야 현실을 녹여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보다 작습니다. 사람은 본래 현실보다 큰 존재였는데 현실에 짓눌리고 치이고 상처 받으면서 현실보다 작아졌습니다. 현실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됐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현실은 자꾸만 커지고 있고, 사람은 거꾸로 자꾸만 작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작아지고 있어요. 쥐방울만해져가고 있어요. 저는 이것이 불신과 함께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작아지고 있다는 것, 100년 전, 200년 전 사람들보다 더 작아지고 있다는 것이 이 시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현대인은 온유하지 못합니다. 그런 우리를 성령님께서는 다시금 현실보다 큰 존재로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큰 사람으로 회복시키고 계십니다. 온유함으로 온유함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성령 안에서, 성령의 도움을 힘입어 온유한 자로, 큰 사람으로 자랍시다. 죽을 때까지 중단 없이 자랍시다. 이것이 우리의 제일 되는 사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