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 중 마지막은 절제입니다. 사랑으로 시작된 열매 목록이 절제에서 끝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깊은 통찰이 배어 있는 영적인 지혜의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사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으로 시작하는 게 맞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열매가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성령의 열매를 9가지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모든 열매가 사랑의 열매입니다. 사랑이 어떤 상황에서는 희락이라는 열매로 나타나고, 어떤 상황에서는 화평이라는 열매로 나타나고, 어떤 상황에서는 오래 참음이라는 열매로 나타나고, 어떤 상황에서는 온유라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충성, 양선, 온유, 절제가 제각각 다른 열매 같지만 사실은 사랑이라는 열매의 변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열매의 뿌리이자 에너지원이에요. 사랑이라는 열매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열매가 사랑의 열매입니다. 모든 열매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하나의 본질에서 나옵니다. 사랑으로 희락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으로 양선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으로 오래 참음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성령의 열매를 말할 때 사랑으로 시작한 겁니다.
그렇다면 왜 절제를 마지막 순서에 넣었을까요? 그것은 절제가 없으면 모든 열매가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무용지물이 되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열매를 악한 열매로 변질시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절제 없는 사랑이 사랑입니까? 절제 없는 오래 참음이 오래 참음입니까? 절제 없는 양선이 양선입니까? 절제 없는 사랑은 폭력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절제 없는 오래 참음은 무기력이지 오래 참음이 아닙니다. 절제 없는 양선은 자기과시이지 양선이 아닙니다. 절제가 있어야 비로소 사랑입니다. 절제가 있어야 비로소 오래 참음입니다. 절제가 있어야 비로소 양선입니다. 정말 그래요. 절제가 없으면 어떤 열매도 진정한 열매가 되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것 같다가도 절제가 없으면 한 순간에 악한 열매로 돌변해버립니다. 절제가 있어야만 참된 열매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으로 시작해서 절제로 완성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성령의 열매를 말할 때 절제를 맨 마지막에 말한 겁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절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봅시다. 성령의 열매를 완성시키는 절제는 과연 무엇일까요? 자기감정이나 욕심, 충동 따위를 억누르는 것일까요? 식욕이나 성욕을 억제하는 것일까요?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일까요? 자기감정이나 욕심, 충동 따위를 억누르는 것은 ‘극기’이지 절제가 아닙니다. 식욕이나 성욕을 억제하는 것은 금욕이지 절제가 아닙니다.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은 중용이지 절제가 아닙니다.
절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기 열정과 욕망을 상대화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잠언은 마음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잠25:28).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
잠언은 왜 이렇게 자기 마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할까요?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진짜 소중한 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진짜 소중한 보물은 땅 문서도 아니고, 집문서도 아니고, 은행통장도 아닙니다. 주식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인기도 아닙니다. 사람에게 진짜 소중한 보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즉 용기 ‧ 사랑 ‧ 희망 ‧ 비전 ‧ 믿음 ‧ 깨어있는 의식 ‧ 상상력 ‧ 창의력 ‧ 등등 마음속에 있는 것들입니다. 특히 성령의 열매인 사랑 ‧ 희락 ‧ 화평 ‧ 오래 참음 ‧ 자비 ‧ 양선 ‧ 충성 ‧ 온유 ‧ 절제가 진짜 소중한 보물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보물들이 마음속에 있으니까 ‘마음을 지키는 것이 성을 빼앗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성령의 열매를 맺는 곳이 사람의 마음이고, 성령의 열매가 작동하는 곳도 사람의 마음이니까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이고, 자기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벽이 없는 성읍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을 지키는 것이 바로 절제입니다.
그런데 마음을 지키는 것이 절제라고 하면 왠지 막연합니다. 마음을 지키는 게 어떤 것인지가 구체적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더 구체적이고 실체적으로 와 닿도록 말씀드리겠습니다. 절제란 자기 경계와 한계를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감정이나 욕망을 억제하거나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경계와 한계를 넘어가지 않는 것, 다시 말하면 오버(Over)하지 않는 것, 지나치지 않는 것이 마음을 지키는 것이고, 마음을 지키는 그것이 절제입니다.
사실 세상만사에는 경계가 있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에도 경계가 있고, 술을 먹는 것에도 경계가 있고, 사랑에도 경계가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넘지 말아야 할 경계가 있고, 부부 간에도 넘지 말아야 할 경계가 있습니다. 이 경계를 지켜야 서로가 즐겁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먹는 것을 예로 들어봅시다. 아이스크림을 먹었습니다. 너무 달콤합니다. 혀에서 살살 녹는 달콤함에 매혹됩니다. 그래서 계속 먹습니다. 그런데 계속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처음에 느꼈던 기막힌 달콤함이 계속 느껴집니까? 아닙니다. 점차 사라집니다. 먹으면 먹을수록 아이스크림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없게 됩니다. 아이스크림의 맛과 향을 제대로 즐기기기 위해서는 적당히 조금 먹어야 합니다. 계속 먹고 싶은 욕구를 절제하고 적당히 조금 먹어야 아이스크림의 맛과 향을 제대로 느낄 수 있고 즐길 수 있습니다.
식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서, 에너지 충전을 위해서 식사를 합니다. 때로는 입의 즐거움을 위해서도 먹고,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을 위해서도 먹습니다. 그런데 진짜 맛있는 식사는 배가 고플 때 먹는 식사입니다. 그것도 배를 빵빵하게 채울 때가 아니라 위장의 70-80퍼센트 정도만 채우는 식사가 가장 맛있는 식사입니다. 좀 더 먹고 싶은 욕구가 있지만 그 욕구를 절제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을 때 음식의 맛과 향을 최고로 즐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몸에도 좋고요. 그런데 음식을 절제하지 못하고 배가 터지도록 먹으면 영양 과잉으로 인해 온갖 성인병이 생기고, 포만감으로 인해 음식 고유의 맛을 즐기지도 못합니다.
쇼핑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구매하면 쇼핑의 즐거움이 적어집니다. 정말 원하는 것, 정말 필요한 것을 조금 구매할 때 쇼핑의 즐거움이 최고조에 이릅니다. 일도 그렇습니다. 하루에 8시간 정도 일해야 일의 효율성이 극대화되지 과도하게 많은 시간 일하면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노동의 즐거움을 느끼기도 어렵고 몸에도 좋지 않습니다. 물론 감정도 절제해야 합니다. 운동도 절제해야 합니다. 여행도 절제해야 합니다. 섹스도 절제해야 합니다. 얼굴 화장도 절제해야 합니다. 말도 절제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경계를 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경계를 넘지 않아야 최고의 즐거움, 최고의 기쁨, 최고의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절제하지 못하고 경계를 넘어가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결국 해가 됩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해가 되고, 믿음도 지나치면 해가 되고, 용기도 지나치면 해가 되고, 지식도 지나치면 해가 되고, 베풂도 지나치면 해가 되고, 얼굴 화장도 지나치면 해가 되고, 가까이 하는 것도 지나치면 해가 되고, 술도 지나치면 해가 되고, 밥도 지나치면 해가 됩니다. 예, 뭐든지 지나치면 해가 돼요.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나치지 않도록 절제해야 합니다. 경계를 지켜야 합니다. 범사에 경계를 지켜야 존재와 삶이 아름답고 건강할 수 있습니다.
먹는 즐거움을 억누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상의 모든 것을 엄격하게 통제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 의지와 감정을 억압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절제는 억누르고, 억압하고 통제하는 게 아닙니다. 절제는 우리의 몸, 마음, 감정을 비롯해서 삶의 모든 것들이 최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힘입니다.
절제가 없는 삶을 생각해보면 금방 이해가 됩니다. 여러분은 절제가 없는 삶을 지켜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절제하지 않는 삶을 지켜보면 정말 가관입니다. 그 삶에서 어떤 맛이나 향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삶에서 어떤 아름다움이나 멋스러움이나 품격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저 한없이 추악하고 악취만 진동할 뿐입니다. 정말입니다. 절제하지 않는 삶처럼 추악하고 흉물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절제하지 않고 술 마시는 사람, 절제하지 않고 쇼핑하는 사람, 절제하지 않고 먹어대는 사람, 절제하지 않고 들이대는 사람의 삶은 정말 추악하고 흉물스럽고 혐오스럽습니다. 반면에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의 삶은 아름답고 건강하고 조화롭고 멋지고 상쾌하고 향기롭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삶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삶은 정말 황홀하도록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윤기가 있고 향기롭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과 예수님의 삶이 왜 그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이고 향기로울까요? 하나님과 예수님이 절제의 대왕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모든 일에 절제하시기 때문에, 사랑도 절제하시고, 능력도 절제하시고, 말씀도 절제하시고, 영광도 절제하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경계를 넘어가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리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마구 물불 안 가리고 사랑을 쏟아 붓지는 않습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경계를 마구 침범해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경계를 뒤섞거나 없애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시지만 내 책임의 영역 속으로 들어오지는 않으세요.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을 대신 해주지는 않으세요. 이런 일 저런 일에 시시콜콜 개입하지도 않으세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경계를 지키십니다. 경계를 지키면서 내주하시고, 내주하면서 경계를 지키세요.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데 아무튼 그래요.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경계를 분별하고 지키면서 절제 있게 사랑하십니다.
능력을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셔서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능력을 다 사용하지 않습니다. 꼭 필요할 때 외에는 능력 사용을 절제하세요. 우리가 암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병을 고쳐주지 않으시고, 굶어 죽어가는 것을 보며 마음 아파하시면서도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온 세상을 쥐락펴락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쥐락펴락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하나님은 죽었다’고 비아냥해도 능력의 칼을 뽑지 않습니다. 굴욕을 당해도 능력의 칼을 뽑아 휘두르지 않습니다. 그저 잠잠히 능력 사용을 절제할 뿐입니다. 예수님도 꼭 필요할 때 외에는 능력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능력 사용을 철저하게 절제했습니다. 심지어 아무 능력이 없는 것처럼 십자가에 죽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모든 일에 절제하시기 때문에 아름답고 매력적인 분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자유의 주인일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모든 일에 절제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절제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자유의 주인일 수 있을까요? 오로지 사랑을 쏟아 붓기만 한다면, 오로지 능력의 칼을 마구 휘두르기만 한다면, 오로지 창조만 한다면, 오로지 구원만 한다면, 오로지 베풀기만 한다면 자유하신 분일 수 있을까요? 전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자유하신 분일 수 있는 것은 모든 일에 절제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절제하시기 때문에 아름다운 분일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절제하시기 때문에 자유하신 분일 수 있는 겁니다.
자유와 절제, 이 둘은 떨어지면 안 됩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붙어 있어야 합니다. 만일 자유에 절제가 없으면 그 자유는 방탕이 되고, 절제에 자유가 없으면 그 절제는 굴욕이 됩니다. 사람의 자유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절제할 줄 모르는 자유의지는 방탕이요 폭력이지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자유의지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와 같아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닥치는 대로 부수고 짓밟고 죽이는 것처럼 절제하지 못하는 자유의지도 닥치는 대로 부수고 짓밟고 죽입니다. 코가 삐뚤어지라고 술 마시는 것은 술의 영광을 짓밟는 것이고, 배가 터지도록 밥 먹는 것은 밥의 영광을 짓밟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화장하는 것은 얼굴의 영광을 짓밟는 것이고, 옆에 있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참견하는 것은 옆에 있는 사람의 영광을 짓밟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은 반드시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유의지를 자기 맘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자유의지란 그런 게 아닙니다. 자기 맘대로 하는 게 자유의지의 본질이 아니에요. 자유의지의 본질은 절제입니다. 절제야말로 자유의지의 본질이자 꽃입니다. 절제야말로 인격의 본질이자 꽃입니다. 절제할 줄 아는 자유의지라야 진정한 의미의 자유의지이고, 절제할 줄 아는 인격이라야 진정한 의미의 인격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 인격성을 가진 인간은 반드시 절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든 성인이든 절제의 덕목을 갖춰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절제의 덕목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 같이 절제를 싫어합니다. 절제는 고리타분한 옛날 사람들이나 추종하던 덕목이라고 생각하고 아예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심지어 절제를 혐오하기까지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절제와 정반대로 나갑니다. 사람들이 다들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고 말합니다. ‘네 욕망과 감정에 충실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무엇에든 미쳐야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부모도 그렇게 말하고, 선생님도 그렇게 말하고, 언론에서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은 잘 미칩니다. 일에 미치고, 돈에 미치고, 권력에 미치고, 도박에 미치고, 춤에 미치고, 음식에 미치고, 스포츠에 미치고, 게임에 미치고, 쇼핑에 미치고, 공부에 미치고, 섹스에 미칩니다.
한국의 대기업인 LG전자에서 10년 동안 일하고 프랑스 법인장까지 승진한 에리크 쉬르데주(Eric Surdej)가 LG전자에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책 한 권 펴냈는데 책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한국인은 미쳤다] 입니다. 그는 한국의 대기업이 일, 수치, 실적, 효율에 미쳤다고 말합니다. “내가 엘지에서 보낸 10년은 직업적인 도전을 뛰어넘는, 기상천외한 경험이었다.”고 말합니다. 예, 한국인은 미쳤습니다. 한국의 대기업만 효율에 미친 게 아니라 유치원 아이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이 뭔가에 미쳐 있습니다. 효율에 미쳐 있든지, 돈에 미쳐 있든지, 실적에 미쳐 있든지, 이데올로기에 미쳐 있든지, 자기에 미쳐 있든지 좌우지간 뭔가에 미쳐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둘러보십시오. 절제의 미덕이 작동하는 곳이 있는지. 청와대, 국회, 학교, 기업, 시장은 말할 것도 없고, 교회나 법당에서도 절제의 미덕이 작동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경계를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브레이크를 밟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엑서레이터만 세게 밟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지난 50년을 엑서레이트만 밟으며 살아왔습니다. 절제의 미덕이 작동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 덕분에 경제력은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않은 사회가 됐습니다. 상처투성이 사회, 불신이 가득한 사회, 1등만 알아주는 경쟁사회가 됐습니다. 모두가 미쳐 돌아가는 미친 사회가 됐습니다.
예, 우리는 지금 절제가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경계를 지키지 않는 삶, 브레이크가 고장 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 삶은 정말 비참합니다. 추악합니다. 흉물스럽습니다. 위험합니다. 무질서합니다. 아무런 맛도 향기도 없습니다. 그저 폭력이 난무할 뿐입니다.
절제해야 합니다. 자동차에 브레이크가 꼭 있어야 하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절제의 성품이 꼭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격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자유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구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인 안에 절제라는 나무를 심고, 물을 주고, 열심히 가꾸어 열매 맺게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절제할 수 있어야 인격적인 삶, 자유인의 삶,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 생명살이로서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절제의 열매가 있어야 다른 열매들이 변질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절제의 열매를 맺도록 돕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일하시니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절제는 성령의 일이니까 나는 힘쓸 것 없어, 하고 두 손 놓고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도 절제의 열매를 맺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경계를 넘어가지 않는 능력을 배양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개독교인’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인격적인 삶, 자유인의 삶, 구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제를 배우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절제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절제를 배우고, 성령님께 절제하는 힘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절제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꼭 있어야 하는 능력입니다. 인격성을 가진 인간에게 꼭 필요한 성품입니다. 절제는 자유의지의 꽃이고, 인격의 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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