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마른손의 회복 (마가복음 3:1-6)

새벽지기1 2017. 9. 15. 07:01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의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막 3:4-5)

예수께서 일찍 회당에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든지 안식일을 당하면 예배당에 가시는 것입니다. 거기는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모인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한 편 손 마른 사람도 역시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이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시는가, 안 고쳐 주시는가, 엿보고 책잡기 위해서 온 바리새교인 들도 몇 사람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 가운데 예수님께서 들어 가셔서 손 마른 사람을 향해 하시는 말씀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분부한 대로 그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무리를 향해서 물어보았습니다. 모든 무리는 대답도 없이 잠잠히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한 대로 그 때에 바리새인들의 마음이 매우 완악(頑惡)한 것을 근심하셔서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 마른 사람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그의 손을 내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자기의 마른손을 그냥은 내밀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명령만 듣고 내밀 때에 말랐던 손이 회복되어서 새로운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본 많은 무리들은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린 줄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더욱 분이 가득해서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어떻게 죽일 까 하고 모의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날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오셔서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신앙을 시정하셨습니다. 또 하나는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서 온전히 성한 손으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주님께서 같이 참여하신 줄 믿습니다. 땅 끝까지 우리와 같이 계시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일지라도 내가 너희 가운데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께서 오늘, 이 시간, 이 예배당 안에서 모인 우리에게 역시 두 가지 일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이 바리새인에 대한 그릇된 신앙을 시정하셨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얼핏 생각할 때에 이 사람들은 아주 악한 사람이고 나쁜 사람이라는 희미한 관념만을 가지고 있는 이도 많이 있습니다. 꼭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 이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열심히 읽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데 보통 사람이상으로 열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되 문자 그대로 모든 계명을 엄격히 지키기를 힘쓴 것입니다. 가령 안식일을 지킬 때에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넷째 계명을 그대로 꼭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 날은 일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남종이나 여종이나 막론하고 일을 시키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심지어 문에 유하는 객이라도 일을 시키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되 문자 그대로 절대 무슨 일을 하지 않고 지키기를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고 안식일을 지키고 있을 때에 예수 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을 걸어가다가 시장하니까 밀 이상을 비벼 먹었습니다. 다른 사람 밭의 밀이라도 이삭을 비벼서 먹은 것만은 율법이 허락해 주니까 죄로 인정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문자주의자(文字主義者)인 바리새인의 눈으로 볼 때에는 이삭을 비비는 것은 곧 타작을 하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아니냐? 어찌해서 예수의 제자들은 안식일에 일을 하면서 안식일을 바로 지키지 않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들의 이론이었습니다.


문자의 뜻만 알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그 근본 원리는 물론 깨달아 알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문자주의적인 이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불쌍히 여겨 병을 고치는 것도 율법을 범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날도 많은 사람 가운데 한 편 손 마른 사람이 왔으니까 오늘도 예수가 과연 안식일을 범해서 저 사람의 병을 고쳐주나 보자고 했습니다. 고쳐 주면, 이야말로 안식일 규칙을 범한 것이니까 그들이 정죄할 수밖에 없는 이단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와 같은 선입주견(先入主見)을 가지고 예수의 하시는 일을 자세히 주목하여 본 것입니다.


여러분, 율법을 읽되 문자에 표현된 그 뜻만 깨닫고 그 뒤에 있는 율법의 정신을 잊어버리는 그 주의를 보통으로 문자주의라는 말을 씁니다. 문자 적으로 일하지 말하고 하는 그 말 하나만 깨달았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일하지 말라고 하며, 무슨 까닭으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제정해 주셨으며,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할 만한 일이란 무엇인지를, 못 깨달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모든 계명 배후에 있는 보다 더 깊은 원리와 근본 정신을 이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여기에 바리새인들이 잘못되기 시작한 점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문자 적으로만 해석해 가면서 누구든지 그대로 쫓지 아니하고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다 잘못된 사람인 이단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우리의 의견이 꼭 옳고 우리의 생각이 꼭 옳고 우리의 해석은 절대로 틀림이 없는데….』이런 사상적 경향을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독선주의(獨善主義)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self-righteousness라고, 나만 옳다고 하는 생각, 자기의 의견이 꼭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독선주의를 가지고 결국은 예수 님의 하는 일도 이단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결과는 이 바리새인들도 안식일을 지키는 근본 정신을 잊어버렸을 뿐더러,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 그 불쌍한 사람의 병을 고쳐준 것에 대해 기쁘다는 생각은 하나도 없고, 안식일에 일했다는 그 생각에만 사로 잡혀서 예수를 정죄한 것입니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곧 그 자리에서 나가서 헤롯당과 의논을 했습니다. 해롯당은 근본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대부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무슨 의논을 했는고 하니, 예수를 죽일 모함을 했습니다. 바로 안식일에 그런 의논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 이런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안식일에 했습니다.
이렇게 조그마한 일로 이런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안식일에 이런 의논을 하였습니다. 더욱이 율법을 믿지도 아니하는 헤롯당과 공모해서 죽이기를 의논하는 그 자체가 얼마나 안식일을 범하는 큰 죄악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문자주의는 독선주의를 낳았고, 독선주의는 맹목적 신앙을 낳아서 그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 하여졌습니다. 결국 그들의 신앙은 도덕까지도 무시하여 사람을 죽이려고 음모하는 신앙 생활을 하게끔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처음 시작한 말씀을 기억하세요. 바리새인들이 처음에는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해서 열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열심의 방향이 잘못 정하게 되어서 문자주의로 화하고, 문자주의가 독선주의로 화하고, 독선주의가 맹목적 신앙주의로 화해서, 심지어 도덕까지 무시하는 신앙으로 들어가게 될 때, 그 인자하신 주님도 그런 사람을 근심해서 노하심으로 보셨습니다. 네 복음을 보면 가장 철저히 책망하고 공박한 대상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라는 것이 이와 같이 외곡(猥谷)되고 잘못된 길로 나아가면 그야말로 자기 자신을 망칠뿐더러 그런 사람이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가 되면 민족과 교회를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누룩을 삼가라고 말씀했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 주셨습니다. 신약 외경(外經)가운데 히브리인의 복음이 있습니다. 이 복음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이 손 마른 사람은 본래 석수쟁이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른 손이 말라 버렸습니다. 신경이 죽고 혈액이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는 석수(石手)일을 할 수 없으니까 빌어먹을 수밖에 없는 불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 오른 손을 고치기 위해 회당에 들어왔다고, 좀 더 자세히 기록했습니다. 그 내용이 얼마나 사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을 가지고도 쓰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사람의 손을 고쳐서 온전한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주님께서 회당에 오셔서는 언제든지 이와 같은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체가 보배롭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마는 특별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손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이 손 없이는 거의 아무 것도 못할 지경입니다. 농사하는 사람은 손으로 밭을 갈고, 손으로 씨를 뿌리고, 손으로 김을 매고, 손으로 추수를 합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손으로 물건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합니다. 주산을 놓고 문부(文簿)를 하는 것도 손으로 합니다. 공인(工人)에게는 말할 것도 없이 손으로 벽돌을 쌓고, 손으로 담을 바르고, 손으로 나무를 깎아야 합니다. 의사는 손으로 수술을 합니다. 간호원은 손으로 붕대를 싸맵니다. 미술가는 손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음악가는 손으로 악기를 연주합니다. 손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손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석공의 손이 하나 말라버렸습니다. 쓸 수가 없습니다. 보기에는 괜찮지만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만 이 사람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에는 얻어먹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을 불쌍히 여겨『네 손을 내 앞에 내 밀어라.』명령할 때에 그 명령을 순종하고, 순종할 때에 그 손이 새 힘을 얻어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여러분, 아마 제 생각에 여러분 가운데 실제로 손이 마른 이는 계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령한 견지에서 내 손이 마르지 아니하였는가, 늘 스스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버지가 두 아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아들아, 오늘 포도 원에 가서 일하라.』말씀하셨습니다. 예수 님께서 다른 데 비유하실 때에는 우리를 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비유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포도원과 같습니다. 이 하나님의 교회에 들락날락하는 사람은 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원에서 일하는데 쓸만한 손을 가졌습니까? 손은 있지만 일할 수 없는 보기에 마른손과 같은 이런 손을 가졌습니까? 과연 신령한 의미에서 내 손이 주의 일을 하며, 다른 사람을 봉사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까? 신령한 일을 위해서 내 손이 마른손입니까, 힘있는 손입니까? 내가 주를 위해서 힘있게 일하는 손을 가졌습니까, 힘없는 손을 가졌습니까? 


주를 위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 주를 위해서 교회를 받드는 일,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일, 성가대를 돕는 일, 주를 위해서 심방 하는 일,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며 병자를 방문하는 일을 내 손이 능히 할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까? 영적으로 마른손을 가진 분은 없습니까? 손은 일과 봉사의 상징인데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내 손이 어떤 일과 어떤 봉사를 합니까? 어떤 분은 해방 전에는 튼튼한 손을 가지고 일을 잘했지마는 해방 후에 그 손이 말라버린 이는 없습니까? 어떤 이는 청년 시대에 그 손을 가지고 주의 일을 잘했지마는 장년 시대가 되고 사업이 커지자 그만 그 손이 말라버린 이는 없습니까? 몇 해 전까지는 주의 일을 잘했지마는 금년에 와서는 그만 손이 말라빠진 이는 없습니까?
마른손을 회복하는 오늘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자리에 계셔서 여러분의 손을 보십니다. 여러분의 손이 말랐는지, 주의 일을 하여 튼튼한지 여러분의 손을 보십니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마른손을 가지고 이 자리에 온 이가 있으면『네 손을 내밀라.』하십니다. 마른손을 주님 앞에 내어 밉시다. 그래서 주님의 새로운 은혜와 새로운 능력을 받아서 일할 수 있는 손, 봉사할 수 있는 손을 회복해 가지고 이 자리에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또, 손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기도하는데 많이 사용했습니다.『내가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부르짖나이다.』이런 말씀이 시편에 종종 나옵니다.『주의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들고 부르짖나이다.』그 뜻은 옛날 사람들은 기도할 때에 손을 들고 했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광야로 인도해 나올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싸웠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군대를 거느리고 아말렉과 싸울 그 때에 모세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두 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너무 손이 피곤해서 손을 내리니까, 아말랙 사람이 이기고 이스라엘 사람이 쫓겨오게 되었습니다. 다시 손을 들어 기도하면 여호수아의 군대가 이기고 아말렉 사람이 쫓겨갔습니다. 마지막에 손이 너무 피곤하게 되니까 아론과 홀이 그 옆에 가서 모세의 두 손을 부축해서 계속해서 손을 들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에 이스라엘 군대가 완전한 승리를 얻은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기도할 때에 합장해서 기도합니다. 손은 기도의 상징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기도를 위해서 항상 손을 들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혹시 마르지 아니했습니까? 여러분이 기도를 위해서 여러분의 손을 항상 드십니까? 지금이야말로 모세가 두 손을 내릴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오늘날 한국의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글자 그대로 두 손을 내릴 수 없습니다. 왜? 우리도 전쟁 가운데 있습니다. 아말렉과 싸우는 중에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정전하였다고 하지마는 공산당과 지금도 싸우는 중에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냉전 가운데 있습니다. 무신론과 싸우고 유물론과 싸우고 남한에 있는 여러 가지 죄악의 세력과 싸우는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손을 내릴 수가 없을 때입니다.
아침과 저녁으로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하나님 보좌를 향해서 올라갑니까? 새벽에 일어나서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하나님을 향해서 올라갑니까? 삼일 기도회 시간에 여러분의 손이 하나님을 향해 올라갑니까? 가정 기도회로서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올라갑니까? 구역 기도회에서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하나님을 향해서 올라갑니까? 여러분의 기도의 손이 어떻습니까? 기도의 손이 마르신 분은 없습니까? 전에는 기도회가 힘이 있어서 바로 손이 올라갔지마는 지금은 다 맥이 빠져서 말라빠진 그런 기도의 손은 없습니까? 여러분은 아십니다. 우리 주님은 보시고 아십니다. 그런 손을 향해서도 예수님께서 오늘 아침에도『네 손을 내밀라』하셨습니다. 주님 앞에 그 손을 내미십시오. 그리고 새 힘을 얻으십시오. 지금은 졸 때가 아니고 기도할 때입니다. 깨어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의 마른손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손은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데 씁니다. 갈라디아 2장 9절을 읽어보면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있는 지도자들과 같이 의논할 때에 그 경험을 기록하면서 이런 말씀으로 기록했습니다.『예루살렘에 있는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 들이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전의 번역에는 오른 손을 주어서 교제를 하였다고 되었고, 새 번역에는 교제의 악수를 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제의 악수, 성도들이 서로 가까이 사귈 때에 그 표로써 서로 악수를 합니다. 손에 손을 잡고 악수를 합니다. 이 손은 성도의 가까운 교제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락방에서 기도하실 때에 간절히 기도한 제목 가운데 하나는 주를 믿는 사람이 다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분열되지 말고 싸우지 말고 주를 믿는 사람이 다 아버지와 주 예수께서 하나가 된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4장에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굳게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 주도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아버지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우리의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성령이 하나 되게 할 것을 굳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언제든지 손에 손을 잡고 주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교제의 손이 마른 분은 없습니까? 내가 다른 사람과는 다 악수는 하면서도『아무개는 보기도 싫어, 말도 안 할 테야.』라고 교제의 손이 마른 분은 없습니까? 오늘날 심히 섭섭한 것은 어떤 이들 가운데는 이 성도가 서로 주안에서 하나 된 것을 잊어버리고 이 성도의 교제를 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염려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한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주안에서 손에 손을 잡고 하나가 될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비록 교파는 다르지마는 다른 교파라고 세계 어느 곳에 있든지 참으로 주를 믿는 성도들과 서로 연락하고 교제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이 교제의 손을 끊는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이 아닙니다. 교제의 손이 마른 분은 없습니까? 저는 모릅니다. 여러분은 아시고 주님께서는 이 자리에서 다 보시고 아십니다. 우리 가운데 한 분이라도 성도의 교제의 손이 마른 분이 있으면 그 손을 이제 주님 앞에 내 미시기를 바랍니다. 상한 영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멀어진 우리를 가깝게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교제의 마른손을 회복하는 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손은 일과 봉사의 상징입니다. 이 방에 마른손이 있으면 곧 주님 앞에 나아와서『주님이시오, 내 손을 내 밉니다. 내 손에 새로운 힘을 주어서 주를 위해서 일할 수 있는 내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시다. 내 기도의 손이 그 동안 말랐었습니다. 이제 이 시간부터 주를 항해서 들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합시다.『성도와 교제를 끊는 이가 있습니다. 이제 이 마른손을 내미오니 이 마른손에 힘을 주시어 모든 성도들과 주안에서 하나가 되게 해주시옵소서.』우리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1958년 8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