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기갈한 심령에게 (이사야 55:1-9)

새벽지기1 2017. 9. 11. 07:1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옛날이나 오늘이나 물이 귀한 가나안 지방 거리에는 대대로 물 장사하는 사람들이 물을 지고 다니면서『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이와 비슷한말로 외친다고 합니다. 여기에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영적으로 기갈을 느끼는 모든 인류를 향해서 외친 말씀이올시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먼저 여기 목마른 자들은 어떤 이들을 가리킨 것입니까? 둘째는, 여기 물이란 말이 있고 포도주란 말이 있고 젖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또한 셋째로, 돈 없이 값없이 와서 사 먹으라고 말씀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말씀을 통해 은혜 주시는 가운데 한 가지씩 생각하시기를 원합니다. 


『먼저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목마른 자들을 불렀습니다.「목마르다」하는 말은 흔히 간절한 마음의 욕망 혹은 욕구를 가리켜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인간은 사교적 욕망이 있습니다. 대부분 고독을 싫어합니다. 친구를 사귀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를 원합니다. 사랑을 주기를 원하고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혹 사랑에 목마르다고 하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인간은 지적 욕망이 있습니다. 무엇을 좀더 알고자 하고 좀더 배우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향학열 혹은 지적 기갈이라고 하는 말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술적 욕망이 있습니다. 할 수 있으면 모든 것을 좀더 아름답게 하기를 원합니다. 말도 좀더 아름답게, 글도 좀더 아름답게 쓰기를 힘씁니다.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소리, 좋은 음악,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기를 원합니다. 집을 지어도 좀더 아름답게, 거리를 말들어도 좀더 아름답게 만들기를 원합니다. 이와 같은 것을 우리가 예술적 기갈이라고 일컬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의 깊은 심령 속에는 창조적 욕망이 있습니다. 새 것을 만들려는 간절한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것을 찾아보려고 힘쓰고, 새 것을 만들어 보려고, 발명하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욕망 혹은 연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여러 방면으로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좀더 잘 살고, 좀더 아름답고 좀더 선하게 살며, 좀더 문화적으로 살려고 하는 욕망 혹은 갈망이 그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와 같은 모든 욕망이 인간에게 다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우리 인간은 여기에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가령 어떤 분이 좋은 집을 가졌고 좋은 가정을 이루고 좋은 사업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모든 것이 뜻대로 잘되어 나아갑니다. 그렇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마음속에 참된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정녕 인간은 이런 욕망들 이외에 이름 모를 다른 욕망이 또 있습니다. 비록 모든 것이 다 있다고 할지라도 어딘가 빈 것을 느끼는 것이 우리 인간의 체험인 것입니다.


몇 주일 전에, 미국의 한 실업가가 여기 와서 간단히 간증도 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좋은 가정과 집과 사업과 좋은 차를 가져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을 만한 생활을 하였지마는 어딘가 모르게 자기 속 깊은 어느 곳에 빈 것을 느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인간이 인간 된 소외입니다. 이것을 영적 기갈이라고 말합니다.
시편42편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나니.』우리 인간의 심령 깊은 곳에는 이 여러 가지 세속적 욕망 이외에 이와 같은 깊은 영적 욕망, 영적 기갈이 잠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잠재」라고 하는 말을 쓰는 까닭은 어떤 분은 이와 같은 기갈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시인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갈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갈은 여러 가지 다른 변태적인 욕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다른 욕망만 가득히 채우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알지 못하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좀더 육신에 관한 모든 향락을 탐구하거나, 육신의 온갖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 모든 세속적인 욕망을 충만히 채워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만족은 없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물질적 방면에 심혈을 기울여서 물질을 좀더 축적하고, 좀더 얻고, 어떤 분들은 세상의 지위나 권세의 방면에 머리를 좀더 기울여서 좀더 높은 자리, 좀더 힘있는 권세를 얻기를 힘씁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었다고 해서 거기서 만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좀더 지적 방면에 마음을 기울입니다. 좀더 나은 지식과 좀더 나은 지혜를 탐구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많은 곳에 근심이 많아지고 쓸데없는 교만만 많아져서, 전도서에 있는 말과 마찬가지로 거기에서 참된 만족을 얻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치 파선한 수부가 바다 위에 표류하면서 심히 목이 마르니까 기갈을 멈추기 위해 짠 바닷물을 마십니다. 바닷물은 마실수록 기갈이 더 심해서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사람들이 이 영적 욕구를 알지 못하고 이 기갈을 채우려고 다른 방면에서 구하면 구할수록 영적 기갈은 더욱 심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있는 체험을 보면『오, 하나님이시여, 주님께서는 주님을 위해서 우리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내가 주님 안에 돌아와 안정을 얻을 때까지 내 심령 속에는 안심이 없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지 못한 이들은 이 기갈 한 심령을 멈출 길이 없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에 자기를 위해서 지으신 까닭으로 우리 인간이란 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찾아 그 품속에 돌아와서 그 영혼이 안기기 전까지는 그 심령의 깊은 속에 있는 답답한 마음, 갑갑한 마음, 즉 영적 기갈을 멈출 길이 없습니다.『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나오기 전에는 이 영적 기갈을 멈출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것은 다만 인간이 인간 된 까닭입니다.


둘째로,「물로 나오라」혹은「포도주를 사라」「젖을 사라」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한 것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모든 영적 은혜를 통괄해서 이와 같은 상징으로 우리에게 깊은 영적 진리를 표현하여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 47장을 읽어보면, 선지자가 이상(理想)한 가운데 보니 하나님의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생수가 흘러나오기를 시작합니다. 흘러내릴수록 그 생명의 강이 점점 커집니다. 내려 갈수록 더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마침내 그 강물 속에는 여러 가지 어족이 성합니다. 그 강 죄 우편에는 아름다운 나무로 무성하게 됩니다. 가 나무는 달마다 열두 종류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 나무의 잎사귀들은 인간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에스겔의 이 이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후로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압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오셔서 일찍이 부르짖으시기를『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다 네게로 와서 마시라.』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생명 샘이 되어 영생토록 솟아나리라.』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영적 은혜를 물에 비교해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물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물이 있는 곳이라야 어떤 형태의 생명이든지 생명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물은 새롭게 합니다. 물은 깨끗하게 합니다. 물은 새로운 힘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 심령에 미치는 영향은 물이 지구 위에 주는 것과 같은 영향을 줍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은 죽은 가운데서 살아서 생명을 얻습니다. 더럽던 심령이 새로워집니다. 깨끗하여 집니다. 연약하고 피로하였던 심령이 새로운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또 여기 포도주란 말을 썼습니다.『포도주를 사서 마시라.』고 이것은 의미가 심장(深長)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실 때에 제일 먼저 가나 혼인 잔치에 참여하셔서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기독교는 포도주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포도주는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새로운 복음의 종교는 심령을 즐겁게 하려는, 인간에게 참된 만족, 참된 행복, 영에 배부른 것, 흡족한 은혜를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가장 행복 된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올시다. 오는 세상에서도 가장 축복을 받을 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올시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만족한 축복이라는 의미에서 포도주라고 하는 말로 상징을 삼은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젖을 사라고 하는 말을 역시 사용했습니다. 젖이야말로 모든 음료 중에 가장 영양이 많은 음료입니다. 사실 한 가지 음료만 먹고 살 수 있는 것이라 이 젖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아기들이 젖만 먹고삽니다. 젖만 먹고 큽니다. 사실 어른들도 다른 음식 다 없어도 우유만 계속해서 먹고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이 젖 가운데는 우리 육체에 필요한 모든 영약의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전분도 있고, 지방질도 있고, 단백질도 있고, 뼈와 이를 만드는 칼슘도 있고, 피를 맑게 하고 더 힘있게 하는 여러 가지 광물질도 있고, 사람을 자라게 하는 비타민도 많은, 말하자면 이 한 가지 음료, 즉 젖 가운데는 우리 육신에 필요한 모든 영양의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는 이 같은 복음 한 가지 밖에 없지마는, 이 복음 가운데는 우리 영적 영양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복음 가운데 인간의 가장 높은 지력을 만족시킬 만한 모든 아름다움이 여기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는 영적 생활에 필요한 영양소가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목마른 자들은 물에 나와서 물을 마시고 포도주와 젖을 사서 마시라고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을 향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한 가지 더 말씀 드리는 것은 여기 이상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기는 사라고 하면서도 돈 없이 값없이 사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돈 없는 자도 오라는 것입니다.『돈 없이 값없이 와서 젖과 포도주를 사서 마시라.』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도 조금만 생각하면 과히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받는 이 큰 축복은 돈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세상에 살 때에 돈만 있으면 무엇이나 살 줄 그렇게 압니다.
그러나 사실 깊이 생각해 보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도 많습니다. 특별히 살 수 없는 것은 이 신령한 축복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은과 금이 필요가 없습니다. 또 사람의 지혜나 지식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의 머리 속에 있는 그 지혜, 그 지식 얼마나 귀합니까? 말하자면 심리적 금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가지고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축복을 사지는 못합니다. 사실 이 축복은 세상의 어떤 높은 지위를 가지고도 살 수 없고, 아무리 권세가 많을지라도 그 권세를 가지고도 살수가 없습니다.
또 무슨 공덕, 선행, 우리의 행실을 착하게 하고, 우리가 무슨 좋은 사업을 많이 해서 이런 공덕과 선행을 가지고 이 축복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아무리 사람 보기에 선해서 성자란 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볼 때에는 다 더러운 옷 밖에는 입을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어떤 선한 일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을 다 했지만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것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사람의 선행으로나 사람의 공덕으로도 이 축복을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실 어떤 이가 있어서『나는 지식이 있으니, 나는 돈이 있으니, 나는 이와 같은 선행이 있으니, 나는 공덕이 있으니, 내가 이 축복을 살 수 있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이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이올시다.
값없이 사라는 말은 온전히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것도 없고, 내 무엇으로 조금도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깨닫고, 온전히 빈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겸손히 이 은혜를 그냥 받는 그 사람에게는 이 은혜를 돈으로 어떤 값을 주고도 살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값없이 사라고 했는데 사실 그것도 뜻이 있습니다. 사실 이 은혜는 값이 없습니다. 사실 웬만한 것, 작은 것에는 값을 매길 수 있지만 아주 엄청난 것에 값을 매길 수 있습니까? 여러분!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서울에 땅 한 평에 어떤 비싼 곳에는 70만 환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작은 땅값은 매길 수 있어요. 그러나 큰 것을 값 매겨본 사람이 있습니까? 이 지구덩이 값 내본 사람이 있습니까? 저 태양 값이 얼마나 가는지, 그 값 내본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가 늘 마시고 사는 이 공기를 어느 누구 값 매겨본 사람이 있습니까? 여름마다 하나님께서 풍족히 주시는 이 비를 어디 누구 값 매겨본 사람이 있습니까? 모든 하나님의 크신 축복은 값이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 인간의 심령을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는 십자가의 공로를 값 매길 수 있습니까? 누가 감히 평가할 수 있습니까? 값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돈 없이 값없이『나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죄인이올시다. 그러나 나는 목이 마릅니다. 주님 앞에 나아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내 기갈 한 것을 깨닫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사람에게는 그냥 주십니다. 값없이 돈 없이 그저 신령한 이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냥 준다면서 또 왜 산다는 말을 썼습니까? 그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냥 주면 그냥 준다고 하지, 왜 산다고 하는 말을 썼습니까? 조금 생각해보면, 아마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산 것은 자기 것처럼 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그것은 내가 샀으니 내 것이야. 남이 그냥 준 것은 아니지.』이것은 내 것이 꼭 되었는지 분명하지 못한 생각이 더러 들어 올 때도 있지만 내가 산 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내가 샀으니 이것은 내 집이야. 이 밭도 내가 샀으니 내 것이지.』하고 샀다고 하는 관념이 들어가는 데는 내 것이라고 하는 관념이 있습니다. 아마 그 뜻이 여기 포함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냥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받지마는 실상은 하나님께서 알기를 원하는 것은『네가 산 줄로 생각해라, 이것이 꼭 네 것으로 알아라.』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 은혜를 받는 사람은 내 것으로 압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여호와는 나의 방패(防牌)시오, 여호와는 나의 피란처(避亂處)시오, 여호와는 나의 산성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救主)시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시오, 하늘의 나라는 내 아버지의 집이오, 내 집입니다. 누구든지 온전히 자기의 영적 기갈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겸손히 이 은혜를 받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아주 주어서 그 사람의 것으로 만듭니다. 내 구주가 됩니다. 내 하나님이 됩니다. 내 천당이 됩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빛이오, 나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축복을 다 받으셨습니까?『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이와 같은 생명 강이 흐르는데 아직까지도 기갈 한 심령, 그대로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얼마나 가련합니까? 얼마나 불쌍합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어떤 사람 하나라도 기갈 한 심령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없이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근심하며 걱정하며 염려하며 민방하고 답답한 가운데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왜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로 비극이 생기고, 여러 가지로 참혹한 뉴스가 나타나고, 매일 자살하는 사람이 몇 건이나 생기고, 여러 가지로 추악한 범죄가 일어납니까? 요컨대, 그 심령 속에 기갈이 있습니다. 이 기갈에 만족을 받지 못했습니다. 생명수를 찾지 못했습니다. 생명수를 찾아서 원만한 생활, 만족한 생활, 흡족한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입니다.
우리 가운데 오늘 아침 한 분이라도 기갈 한 심령을 품고 나온 이가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이 시간에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하나님이시여, 내 심령은 목마릅니다. 나는 아무 무슨 구할 공로가 없습니다. 그저 빈 손 들고 아버지 앞에 나왔으니 생명수로써 나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간절히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와 같은 심령 위에 새로운 축복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기도하십시다. (1959년 8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