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갈라디아 6:1-10)

새벽지기1 2017. 9. 19. 06:38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디모데 후서 3장 13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오늘,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선이라고 하는 말은 꼭 자선이라고 하는 뜻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좋은 일을 가리켰습니다. 성신으로 심는 일, 그러니까 착한 행실, 복음전도, 교회봉사, 일반사회에 대한 봉사, 이와 같은 모든 착한 행실과 일들을 가리켰습니다. 이와 같이『좋은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여기 낙심이라고 하는 말은 좀 너무 뜻이 과하게 번역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아마 피곤해지지 말라, 혹은 맥이 풀리지 말라는 뜻이 좀더 원문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을 하다가 맥이 풀리지 말라는 뜻입니다.『그리고 피곤하지 아니하면』이란 말은 사실 낙심하지 아니하면 하는 그 뜻이 좀더 있겠습니다.『낙심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두리라.』하는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성신으로 심는 생활, 선한 씨를 뿌리는 생활인데 선한 씨를 뿌리다가 맥이 풀이지 말라 하는 그 말입니다. 맥이 풀리지 아니하고 그냥 계속해서 낙심하지 않고 뿌리면 반드시 때가 올 터이고, 때가 오면 거둘 것이라 하는 그 교훈을 여기에 거듭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 2장 10절에는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기록하였습니다.『우리는 하나님의 만드신 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사 선한 일을 하려 하셨으니…』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새로 지으신, 말하자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영적 작품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 사람으로 지으신 것은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은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신의 씨를 뿌리는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작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참된 신앙에 들어와서 성신으로 심기를 시작한 사람들, 선한 사람들, 선한 씨를 뿌리기를 시작한 사람들, 선한 씨를 몇 해 동안 혹은 여러 해 동안 계속해서 뿌리는 사람들을 향해서, 그런 사람들로 중심해서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직까지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온전한 새 사람이 되지 못하였으면, 물론 그런 이들의 첫째 할 의무는 온전히 회개하고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새 사람으로 하나님의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그런 자리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하면 그이의 생활은 지금도 육신만을 심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의 씨를 뿌리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생활은 매일 매일 살아가는 것이 씨를 뿌리는 생활인데 성신으로 선한 씨를 뿌리지 못하면 마음으로나 말로나 행실로나 육신의 씨, 곧 악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까지 이와 같은 새로운 성신의 씨를 뿌리는 생활에 들어오지 못한 이는 그 첫 단계가 우선 이와 같은 생활에 들어오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러한 생활에 들어와서 성신으로 여러 해 동안 심고 선한 씨를 뿌리는 사람을 향해서 여기 특별히 권면하는 말씀은 그렇게 선한 씨를 뿌리는 생활을 하다가 맥이 나지 말라 하는 그 말입니다. 선한 씨를 뿌리다가 맥이 나서 낙심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이와 같은 이들을 중심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면하십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선한 씨를 뿌리다가 낙심하게 되는 원인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어떤 때에는 큰 환난을 만나게 될 때에, 갈수록 산악이 중첩되는 것과 같이 역경과 난관을 겹쳐서 당하게 되면 그만 맥이 나서 낙심하는 자리에 이르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 나서 성신으로 심는 사람이 되었거나, 선한 씨를 매일 뿌린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는 환난이 아주 떠났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와 같은 약조는 성경에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도 환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건강의 실패가 오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사업의 실패를 당하기도 하고 가정에 우환과 질고(疾苦)가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눈물의 사자가 그런 가정을 방문할 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 가운데『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받으나……』환난 받지 않는다는 약조는 없습니다. 환난 받겠다고 그랬습니다.『환난을 받으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시고 우리에게 미리 경고하여 주었습니다. 이런 때에 우리가 선한 씨를 뿌리다가 낙심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 욥의 경우를 잠깐 회상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욥의 생활에 그렇게 난데없는 환난과 재난이 겸해서 이르게 될 때에, 만일 욥이 맥이 풀리고 낙심이 났으면, 어떻게 오늘날 우리가 아는 욥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환난 가운데서도 맥이 나지 아니하도록 우리가 힘을 써야 될 것입니다.


또 어떤 때에는 도덕적 우주에 대한 회의심에서 맥이 풀릴 때가 없지 않아 있을 수 있습니다. 시편 73편을 한 번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의 저자는 이 우주를 도덕적 견지에서 살펴 볼 때에 큰 의심이 마음가운데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가만히 잠깐 살펴보니 악한 자들이 하는 일들이 다 형통하여 보입니다. 그들로 말하면 교만으로써 눈이 솟아 나왔고 강포(强暴)로써 옷을 입듯이 그런 생활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은 권세가 더 많아지고 몸도 오히려 건강하고 더욱 재산까지도 늘어가니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바른 생활을 하고 옳은 일을 하려고 애쓰는 데 내 하는 일은 이렇게 잘 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이 불행한 가운데 빠지게 되었고 이렇게 곤궁한 자리에 있게 되었으니 이래서야 어떻게 하나님을 계속해서 공경하며 일할 수 있습니까? 이 시인이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이 내가 하마 트면 미끄러질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이 이 시인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고요히 묵상할 때에 갑자기 깨닫게 되었습니다. 악한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 성하는 것 같지마는 아침에 풀이 자라다가 갑자기 베임을 당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사람들에게 내리는 그 원리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이런 의심 가운데서 일으켜 주신 것을 감사한 노래가 시편 73편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세상을 단편적으로 볼 때, 그와 같은 의심 가운데서 맥이 풀리기 쉽습니다. 나 혼자 선한 씨를 뿌려서 무엇하나, 아무리 이렇게 살아야 무엇하나, 별 것이 있나 하면 맥이 풀리기 쉽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보면 옛날 요셉도 이와 같은 시험을 받았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있을 때에 청년으로서 이기기 힘든 시험까지 담대히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칭찬과 상을 받지 못할망정 오리려 벌을 받아서 깊은 형무소에까지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보통 청년 같으면 그런 자리에서 맥이 풀려지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가운데서도 낙심하지 아니했습니다. 성신으로 심는 생활, 선한 씨를 뿌리는 생활을 그냥 계속해서 감옥 가운데서도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자기가 예상했던 것 이상의 큰 축복을 마지막에 받은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도덕적으로 일어나는 회의심 가운데서 낙심하면 아니 됩니다.


또한 셋째로는, 냉정한 사회에 직면하게 될 때에, 나의 하는 일에 대하여 동정과 격려가 도무지 없이 스스로 고독을 느끼게 될 때에, 잘못하면 낙심하기 쉬운 것입니다. 나는 아무리 이렇게 애쓰되 눈 한번 거들떠보는 사람 있나? 나는 아무리 애써서 수고하고 좋은 일을 하느라고 힘쓰지마는 세상에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 있나? 이런 생각이 들어 올 수 있습니다.『나는 아무리 교회 봉사를 잘하고 심방도 열심히 잘하고 하지만, 교역자나 장로가 누구 하나 칭찬하는 때가 어디 있나?』『나는 아무리 양심적 공무원이 되기 위해서 애쓰고 빈궁과 다투면서 내 자리를 지키지마는, 내 이 사정 알아주는 상관 누구 있나? 그저 빽이 있어야 윗자리로 올라가지.』이와 같은 고독을 느낄 때에 맥이 풀리기 쉬운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힘써 나오던 사람 가운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 시험에 빠져서 낙심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와 같은 시험이 마음가운데 들어올 때에 고요히 생각해야 됩니다. 사실 우리가 남의 얼굴이나 보고 선을 행해서야 그것이 무슨 선입니까? 남의 칭찬하는 말이나 듣고 그 말에 격려를 받아서 우리의 선한 씨를 뿌리는 생활을 계속해서야 그것이 무슨 참된 선한 씨의 파종자(播種者)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옛날부터 내려오는 성현의 말씀가운데도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란 말이 있습니다.『덕은 외롭지 않은지라 반드시 이웃이 있다.』고, 장차 때가 되면 세상 사람도 알아줄 때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알든지 모르든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는 아시는 것입니다.
컬럼버스를 생각해 보십시오. 컬럼버스가 제일먼저, 그냥 서 편으로 항해해 가면 직선으로 인도 곧 동양에 갈 수 있다고 하는, 지구가 둥글다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그것을 경영할 때에 도와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마지막 선반아 왕족의 후원을 받아서 배를 지어 가지고 출항하여 서편을 향해 갔지마는 아무리 가도 육지가 보이지 아니할 때에 심지어 같이 가던 선부들도 반항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컬럼버스의 뜻을 알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컬럼버스는 계속해서 낙심하지 아니하고 그냥 노를 저으라고 하여 끝까지 나아갈 때에 인도까지 오지는 못했지만, 인도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아서 새로운 대륙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노를 젓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기 이상의 큰 축복으로 우리에게 마지막날 주는 것입니다.


넷째로, 세상 사람들이 몰라줄뿐더러 옳게 하고 바른 씨를 뿌린다고 해서 세상이 나를 비난하고 나를 오해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핍박하고 배은망덕의 생동을 나에게 감행하고 오히려 내가 기른 개가 내 발꿈치를 무는 격으로 이와 같은 일을 당할 때도 세상에는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때 잘못하면 우리의 맥이 풀리고 낙심하기 매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우리가 낙심하면 아니 됩니다. 모세의 생활을 보십시오, 그이의 신앙이 얼마나 크고, 그이가 얼마나 참된 애국자며, 그이가 얼마나 위대한 지도자였습니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40년 동안 광야를 지나서 나오는 동안에 얼마나 모세를 비난했으며, 얼마나 모세를 오해했으며, 마지막에는 반기를 드는 일도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의 형 아론과 누이까지도 비난할 때가 없지 않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낙심하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한 후에는 새로운 힘을 얻어서 그냥 나간 것입니다. 비난과 오해와 핍박이 있다고 해서 낙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생활을 생각해 봅시다. 얼마나 많은 비난과 오해와 핍박을 받았습니까? 예수 님께서 친히 또한 말씀하시기를『너희도 내 이름으로 핍박을 받고, 욕을 먹도 악하다고 하는 거짓말을 들으면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그랬습니다. 옛날 선지자들도 그와 같은 일을 당하였을 뿐 아니라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고 예수 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아무리 애써도 무슨 성과가 되어지지 않을 때에 조금 잘못하면 낙심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선한 씨를 뿌려도 무슨 특별한 열매 맺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아니합니다. 이럴 때에 그만 낙심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낙심하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이 말을 첨가했습니다.『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때가 이르겠다고 그랬습니다. 때가 이르면 반드시 거두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거둔다고 해서 봄에 뿌려서 그 이튿날 곧 거둡니까? 기다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옛날 맹자의 말 가운데 있는, 제 나라 어느 사람처럼 곡식을 심어 놓고 빨리 크지 않으니까 너무 급해서 얼른 커서 열매를 맺으라고 하루아침에는 나가서 전부 고개를 뽑아 놓았답니다. 너무 그렇게 급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때는 사람의 때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때가 올 때에는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어떤 것은 내가 심고 거둡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둡니다. 어떤 경우는 이 세대에 심은 것을 이 세대에 거둡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이 대에 심은 것을 다음 세대에 가서야 거둡니다. 어떤 것은 이 세상에서 심어서 이 세상에서 거둡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이 세상에서 심은 모든 것을 하늘 나라에서 거둘 때가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거둘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곧 무슨 성과가 나지 아니한다고 조급한 마음으로 낙심해서 안 될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과 같이 떡을 물위에 던지면 오랜 후에 그 떡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때가 있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제가 지난주간 잠깐 시간 있어서 그 주 타임 잡지를 펼쳐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일본 북해도 어느 해변에서 된 일인데 그 해변가에 아이들 네 형제가 함께 사는 집이 있습니다. 제일 큰 아이가 열 네 살, 그 다음이 열 두 살, 그 다음이 열 살, 아홉 살 된 남자 네 형제가 그 해변가에서 살았습니다.
어부의 아들이니까 몰론 헤엄도 잘 칠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날이 밝아 헤엄치려 가자고 하면서 제일 큰애가 먼저 헤엄을 쳐서 한 50야드밖에 있는 바위를 향해서 헤엄쳐 갑니다. 그러니 또 둘째 놈이 따라가고, 셋째 놈이 따라가, 넷째 놈까지 연달아 따라 헤엄쳐 갔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제일 큰 애가 보니까, 저 편에서 큰 상어 한 마리가 마주 옵니다. 상어를 사람까지 잡아먹는 놈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가 얼른 돌아서면서,『야 상어 오는데 빨리 도망하자.』소리 질렸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일제히 돌아서서 언덕으로 헤엄쳐 돌아갔습니다. 조그만 아이들은 언덕에서 조금 갔었으니 까 곧 언덕으로 올라 왔습니다. 그러나 큰애는 미쳐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그 상어가 거의 가까워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어가 사람을 물때에는 가까이 와서 뒷다리를 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와서는 오히려 물 속으로 들어갔다가 올라오면서 배를 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보니까 이 놈이 따라오다가 물 속으로 들어가더랍니다. 경험 있는 아이였기 때문에 얼른 향해서 가다가 뒤로 돌아섰습니다. 돌아서 보니까 상어란 놈이 자기 앞에 와서 공중으로 입을 벌리고 헛 물고서는 옆으로 나가 자빠졌습니다.
그 때 이 아이는 얼른 가서 상어 옆을 붙잡았습니다. 상어를 잡아 탄 것입니다. 타고서는 이것을 놓으면 죽겠는데 놓겠습니까? 꼭 붙어 안고는 상어하고 싸웁니다. 그것을 세 아이가 보다가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전부 물 속으로 따라 들어가서는 넷이 모두 상어를 붙잡았습니다. 지금 바다가운데서 싸웁니다. 그런데 계속 그대로 싸웠으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마침 큰물결이 바다에서 밀려오면서 상어나 상어를 붙잡은 아이들이나 전부 물 얕은 곳으로 내밀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전부 다 물이 한길밖에 안 되는 얕은 곳에 밀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어란 놈이 물이 얕은 곳에서는 옴짝달싹 못합니다.
네 아이가 그 옆에 있는 돌멩이를 들고 돌멩이로 때려잡았습니다. 그 이야기 제목을「자이언트 킬러스」(giant killers)즉, 거물을 죽이는 사람들이라고 붙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가만히 읽어보니 이 아이들이 자기의 힘에 넘치는 악한 상어와 지금 싸우는 중입니다. 단단히 붙잡았기에 자기들이 죽지 않았지, 놓았으면 죽을 뻔했습니다. 단단히 붙잡고 싸웠습니다. 그러나 단단히 붙잡고 싸운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아마 이기지는 못했겠지요. 결국은 큰 물결이 와서 전부 얕은 곳으로 밀어내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작은아이들이 일곱 자나 되고 백 팔십 파운드나 되는 큰 상어를 잡았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에 어떤 때에는 악의 세력이 너무 커서 이 어린아이들이 상어를 붙잡고 싸우는 것과 같은 이런 느낌이 우리 마음 가운데도 들어올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악의 세력을 붙잡고 싸울 때에 낙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붙잡고 싸우면 하나님의 큰 권능의 물결이 우리를 도와줍니다. 그래서 악의 세력을 온전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말합니다. 남한에 악의 세력이 얼마나 많은가, 북한에 공산당이라고 하는 악의 세력이 얼마나 많은가.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는가.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악의 세력이 커 보이지마는 단단히 붙잡고 놓지 아니하고 계속해 싸우면, 하나님의 큰 권능의 물결인 역사의 파도가 반드시 우리를 도와 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 한데 편지할 때에 이런 말씀을 기록했습니다.『전에와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尊貴)되게 하려 하노니……』「전에와 같이 이제도……」전에 젊었을 때와 같이 바울이 비록 나이 많았어도 시종 여일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바울의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아니했습니다. 낙심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1959년 9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