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한경직목사

소극적 죄 (마태복음 25:14-30)

새벽지기1 2017. 9. 22. 06:06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25:30)

이 말씀은 집주인이 한 달란트를 받았던 종에게 내린 벌입니다. 이 달란트 비유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압니다. 어떤 부잣집 주인이 먼 곳에 여행을 가려고 할 때에, 종들을 불러서 각각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고, 또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주면서 주인의 명령하신 말씀은 그가 떠나 있는 동안에 이것을 가지고 너희들이 장사하라고 한 것입니다. 금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장사를 잘해서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사람도 꼭 그와 같이 해서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활용하지 아니하고 가만히 땅 속에 묻어 두었었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회계를 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다 두 배 이익을 남겨서 주인에게 바칠 때에 주인이 대단히 기뻐서 잘하였다고 칭찬하면서『착하고 진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이와 같이 충성되니 내가 이 앞으로 큰 일로 맡기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은 땅에 묻어 두었던 그대로 한 달란트를 주인에게 가지고 와서 바치면서『내가 알기에 주인은 대단히 굳은 사람인데 헤치지 않는 데서도 거두고 뿌리지 않은 곳에서 모으는 분인데 내가 이것을 땅에 묻어 두었다가 그냥 가지고 왔으니 본전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을 주인이 들을 때에 대단히 노해서『악하고 게으른 종아 네가 만일 내가 뿌리지 않는 데서도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도 거두는 줄 이렇게 알았다고 하면 어찌해서 이것을 은행에라도 갔다 두어서 이자라도 같이 가져오지 아니 했느냐?』그러면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고, 다시 하시는 말씀이『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이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에게 대한 형벌이 너무 과하지 아니한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그 본전마저 낭비했다고 하면 모르지마는 그대로 본전은 그냥 가지고 왔는데 본전을 빼앗았을 뿐더러 마지막에는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쫓으라는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내렸으니 너무 과하지 아니한가 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공정히 심판할 줄 아시는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죄 가운데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적극적 죄입니다.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는 죄입니다. 도둑질을 하는 것, 협잡을 하는 것, 간음을 하는 것, 도박을 하는 것, 술에 취하는 것, 악한 짓을 적극적으로 하는 죄악입니다. 이런 것을 적극적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소극적 범죄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할 것을 하지 않는 것, 주인의 명령을 받았는데 명령대로 하지 않는 것, 의무를 실행하지 않는 것, 선을 행하라고 하였는데 행하지 않는 것, 등은 소극적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물론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은 때에 적극적인 죄를 먼저 회개합니다. 도둑질하던 자가 도둑질을 금합니다. 술 취하던 자가 술을 금합니다. 거짓말을 하던 자가 거짓말을 하지 아니합니다. 물론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 믿을 때에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던 것을 중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적극적으로 죄악을 짓지 않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과거의 죄를 청산한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가며 그리스도께서 하라고 하신 일을 하는 것, 그리스도의 명하는 모든 선을 행하는 것,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적극적으로 다른 죄악은 짓지 않지만, 소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한 걸음 나아가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소극적으로 그리스도 앞에 죄는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 원리를 깊이 깨닫지 못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을 전에 하던 일, 나쁜 일만 안 하면 그 다음에는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절반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서 하나님의 아들과 딸을 삼으신 것은 우리들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이 세상에서 하실 일이 있어서 우리를 불려서 구원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명령을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는 소극적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훈과 성경의 교훈을 보면, 이 소극적으로 죄를 지은 자에 대해서도 얼마나 중한 벌이 내렸는지 우리가 잠깐만 생각해 보드라도 분명히 깨달아 알 수가 있습니다. 우선 이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을 보십시오. 돈을 때어 먹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쫓으라고 엄히 명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모압 평지에 왔을 때, 그 때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들이 모세에게 와서 부탁하는 말이 자기들은 가축이 많이 있는데 이 지방에 보니까 초장(草場)이 많이 있으므로 요단강을 건너갈 것 없이 이 길르앗 지방에서 살게 해주셨으면 고맙겠다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모세가 곧 대답하는 말은 이렇습니다.『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나아가거늘 너희들은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너희 형제는 이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복지를 전취(戰取)하기 위해서 싸우러 나가려 준비하는 중에 있는데 너희는 이미 이 자리에 왔다고 가만히 이 자리에 앉아 있겠느냐?』『너희도 무장하고 같이 나아가서 요단강을 건너 같이 싸워서 다른 형제들도 다 분 깃을 얻은 다음에 그 다음에 돌아와서 너희 원하는 이 곳을 차지하라. 그러나 이제 그런 말하는 것은 큰 죄가 될 터이니 너희가 만일 그런 죄를 지었다가는 이 다음에는 그 죄가 너를 찾아 만날 때가 있겠으니 그리 알라.』엄히 경계했습니다. 이것은 결국 소극적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경고입니다.


사사기(士師記) 5장을 읽어보면, 거기 유명한 드보라의 승전의 노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거니와 드보라는 이스라엘 가운데 유명한 여 선지자요 또 사사였습니다. 그 때 가나안 왕 야빈과 그 군대 장관인 시스라가 큰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 경내로 침노해 들어왔습니다. 이 때, 여 선지자 드보라가 바락과 같이 다볼산에 모든 이스라엘 청년들을 모아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야빈과 시스라를 요격해서 다볼산에서 내려오면서 무찔러서 이 강한 군대를 헤쳐 버리고 야빈과 시스라를 다 쫓아버려 죽게 했습니다. 그래서 크게 승리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의 승리의 노래는 불렀는데 그 노래 가운데 23절에 내려가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 거듭 그 거민(居民)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다 칭찬하며 감사하다고 노래 불러 내려가다가 무슨 말이 있는고 하니『여호와의 사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메로스를 너희들은 저주하라, 너희들이 메로스에 사는 사람들을 거듭 거듭 저주할 것은 그 사람들은 여호와를 도와서 강한 자를 치러 오지 않은 까닭이니라.』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이 원수를 맞아 싸우려고 나왔는데 메로스 동네에 있는 사람만은 나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협력을 안 했습니다.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하나님의 사자의 말씀이 이 사람들을 저주하고는 것입니다. 이 메로스 사람들이 저쪽에 붙어서 간첩 행위를 했다는 말은 없습니다. 단순히 남이 다 나아가 싸울 때에 싸우지 아니하고 가만히 자기 동네에 있었습니다. 그 까닭으로 저주를 받았습니다. 또 이 저주한 말대로 된 모양입니다. 왜냐 하면 메로스 동네에 대한 기록은 이 곳밖에는 성경에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아주 멸망하고 만 모양입니다.


이런 교훈은 구약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25장 마지막에 유명한 양과 염소의 비유에도 이 교훈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 다음에 인자가 오셔서 모든 사람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다 갈라놓으십니다.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 즉 의인을 향해서 그 인자가 칭찬을 합니다.『너희는 만세 전부터 준비해 저었던 축복에 들어와서 복을 받으라.』그러면서 계속해서 하는 말이『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여러 가지 좋은 일 한 것을 쭉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그들이 언제 주님에게 그렇게 했었느냐고 물을 때에『내 형제 가운데 지극히 적은 이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보세요. 왼 편에 있는 염소와 같은 그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 이렇습니다.『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를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지 아니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들이 마실 것은 주지 아니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너희가 입을 것을 주지 아니했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너희가 와 보지 아니했고, 내가 병났을 때에 너희가 찾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그들도 하는 말이『언제 주님께서 주리를 것을 우리가 보았고, 언제 주님께서 헐벗은 것을 우리가 보았습니까?』 인자가 대답하는 말이『네 형제 중 지극히 적은 이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


자, 여러분, 이 염소 편에서 저주를 받은 사람의 죄가 무엇입니까? 이 사람들이 무슨 도둑질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간음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허랑 방탕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이 사람들의 죄가 무엇입니까? 하지 않은 죄입니다. 적은 자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한 것이 소극적 죄입니다.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아니한 것이 소극적 죄입니다.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아니한 것이 소극적 죄입니다. 병났을 때에 와서 보지 아니한 것이 소극적 죄입니다. 감옥에 있을 때에 와서 심방 하지 아니한 것이 소극적 죄입니다. 할 일을 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는 불에 들어가라고 예수 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이렇게 교훈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행 하셨습니다. 한번은 베다니에서 예수 님께서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에 주리셨습니다. 먼 곳을 보니까 잎이 성한 큰 무화과나무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혹 무화과가 열렸을까 하고 예수님께서 가 보았습니다. 정작 가보니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습니다.『이 앞으로 네 나무에서 열매를 다시 먹을 자가 없으리라.』얼마 후에 와보니 뿌리부터 가지까지 온전히 말랐다고 그랬습니다. 그 무화과나무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지은 죄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무화과나무를 거기 심은 것은 열매를 맺으라고 심었는데 열매를 맺지 아니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소극적 죄를 지은 까닭으로 무화과에 벌을 주었습니다.
두려운 교훈입니다. 이렇게 소극적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주지 않는 생활을 하면서도 자기가 죄짓는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심판대 앞에 가서야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마땅히 해야될 의무를 하니 않으면서도 이것이 죄라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까? 깨닫지 못합니까?
두려운 교훈입니다. 이 교훈을 가만히 생각할 대에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떨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이와 같은 교훈을 여러분에게 솔직히 말할 때에 많이 주저하다가 이 말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이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왜 소극적 죄를 적극적 죄와 같이 엄하게 형벌 하십니까? 그 원인은 적극적 죄악이나 소극적 죄악이나 비슷합니다. 가령 왜 이와 같이 할 것을 하지 않게 되느냐?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첫째는 이기심(利己心)입니다. 이 이기심에 의지해서 우리가 할 것을 하지 못할 때 많이 있습니다. 그 때 르우벤과 갓 자손이 요단강에 건너 갈 것이 없이 그 자리에 머물러 앉아 있겠다고 한 것도 평안하다는 이기심입니다. 또 의뢰심(依賴心)입니다. 왜 메로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은 다 전쟁에 나갔는데 같이 나가지 않았습니까? 다 나아가 싸우는 동안에 자기는 가만있다가 남의 덕에 좀 잘 살아 보자는 의뢰심입니다. 속담에 있는 말대로 굿 구경이나 하다가 덕이나 먹자는 의뢰심입니다.
어떤 때에는 거짓 겸손으로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안 할 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겸손은 우리 기독교의 가장 아름다운 덕입니다. 나를 부족하게 생각하고 다루는 태도가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나를 낮추며 부족한 줄 알면서도 내가 할 의무에 들어가서는 내가 이렇게 부족하니까 온 정성을 다해서 내 의무를 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나서는 사람이 참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거짓으로 겸손한 사람이란『나는 이렇게 부족하고 나는 이렇게 모든 일에 다 능하지 못하니 나야 어떻게 할 수 있나? 난 아무 것도 못해.』하고 뒤로 물러섭니다. 그것은 겸손 이 아니고 비겁(卑怯)입니다. 아마 메로스 사람들도 그랬는가 봅니다.『우리야 뭐 싸울 줄 알아야지, 뒤로 물러앉아야지.』그것은 겸손 이 아니고 비겁 입니다.
어떤 때는 공포심으로 할 일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아마 이 메로스 사람들이 전쟁에 나가지 못한 것은 무서워서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주인이 무서워서 그것을 땅에 파묻어 두었다고 그랬습니다. 공포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 두려워 말라고 성경에 거듭해서 우리에게 권면해 줍니다.『내가 너와 같이 하리니 두려워하지 말라.』『내가 네 하나님이니 무서워하지 말라.』『내가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어 줄 터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믿는 사람이 두려운 마음으로 의무에서 물러가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무를 다 못하는 이유는 태만과 게으른 마음 때문입니다. 아마 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묻어 둔 것은 다른 이유보다도 게으른 탓입니다. 그러기에 주인이 책망할 때에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이 메로스 사람들도 아나 게을러서 전쟁에 참가 못했는데 알 수 없습니다. 남도 다 전쟁에 나온다고 했는데 우리도 나가야지. 내일쯤 나갈까? 모래쯤 나갈까? 모래 가서는 또 글피쯤 나갈까 하는 동안에 전쟁은 다 끝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게을러서 어떤 이들은 일을 하기는 해야 되겠는데 명년에나 해보지, 그 다음 명년 가서는 또 명년에나 해보겠다고 합니다. 전도도 한다. 전도회에도 든다, 십일조도 한다 하면서 그저 세월이 다 지나가고 맙니다. 게을러서 의무를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 믿는 사람으로서 아마 적극적으로 악한 죄를 짓는 사람은 매우 드물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은 그대로 하지 못함으로 짓는 이 소극적 의미에 죄는 누구나 다 지을 줄 압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죄를 짓지 아니하고 적극적으로 내 책임을 감당 할 수가 있겠느냐? 오늘, 여러분께서 들은 이 달란트의 비유를 우리가 마음가운데 깊이 기억하면 될 줄 압니다. 우리는 하나 하나가 다 하나님께로부터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장사하라고 하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앞으로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서 회계할 때가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과 재능과 지식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우리가 물질이 많든지 적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이렇게 받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장사해서 이익을 남기라고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적극적으로 악한 죄를 짓지 아니할뿐더러 소극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의무에서 물러가게 되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실제로 만일 우리가 이 죄를 짓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본래 뜻하신 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아마 우선 우리가 어디 있든지 주님을 일을 해야 될 것입니다. 우선 우리가 교회에 나오면, 교회의 여러 기관도 많고, 여러 단체도 많아서, 어떻든지 협력해서 내가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는 줄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 여전도회는 참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서 회원도 많고 일이 잘 됩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우리 교회의 하나의 부끄러움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남전도 회는 특별히 약한 모양입니다. 이건 특별히 우리 한국 교회의 부끄러움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문과 잡지에서 보는 대로 여러 미국교회 같은 데서는 특별히 과거 10년 동안에 남자 교우들 가운데 평신도 운동이라고 해서 전도하는 운동이 굉장히 일어납니다. 남자들 가운데 가령 호별 방문 전도 단을 조직해서 일주일에 한 번이든 두 번이든 같이 교회에 모여서 기도하고 두 집으로부터 혹은 다섯 집까지 방문할 만한 집을 택해서는 꼭 방문합니다. 남자들이 저녁 시간을 제공해서 전도하므로 교회가 크게 부흥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 한국교회에서 남자들 가운데 이런 호별 방문 전도 단이 조직되었다고 하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만일 우리 하나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본 받아서 좋은 청지기가 되어 우리의 책임을 다 감당한다고 하면, 우리 한국교회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을는지 알 수 없습니다. 교회마다 일군이 적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마다 예산이 부족하지 아니합니다. 오늘날 우리교회서 전도 인을 파송 한다는 것이 절대로 자랑이 아닐 것입니다.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특별히 가을은 추수하는 때입니다. 영적으로 많은 추수를 해서 하나님의 곡간에 들이기 위해서 일군을 부르는 때입니다. 기도합시다. (1959년 9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