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강대식목사

부활, 그 증거와 의미 (행 2:22-33)

새벽지기1 2017. 1. 28. 07:22


오늘 사도행전 2장의 본문은 베드로의 첫 설교이다.

그가 오순절날 성령의 세례를 받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제일 먼저 증거하는 것이 무엇인가?

(행2:23-24)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증거 내용은 이렇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자신을 내주었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다.

 

이 부활은 이미 다윗이 시편 16편에서 예언한 사실이다.

(행2:27)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베드로 설교의 결론은 이렇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임하심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부활하신 주님이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주신 것이다.

이 성령이 임한 사람들의 특징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증거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에겐 성령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성령이 임하면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도, 증거할 수도, 없다.


바울도 성령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들을 받지 않는다고 증거한다.

(고전2:12-14)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 엊그제 목포에 가서 92세의 존경하는 어른을 뵙고 왔는데 그분은 안병무의 친구분이시다.

요즘 읽고 너무 좋아서 두 번이나 읽었다고 한 책을 주며 일독을 권했다.

옆에 있는 조카딸도 그 책을 읽고 예수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했다.

그것은 바트 어만이 쓴 “예수 왜곡의 역사”라는 책이었다.

어만은 무디 신학교와 프린스턴 신학교를 나온 사람이었는데 한참 변질된 사람이었다.

대충 훑어 보니, 성경비평학을 근거로 성경과 기독교의 역사가 예수를 왜곡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니, 예수를 왜곡한 것은 성경과 교회 역사가 아니라,

그가 성경과 교회 역사를 왜곡하고, 예수를 왜곡하고 있었다.

그가 성령이 없으니, 성령이 기록한 예수의 역사적 사실과 성령이 인도하신 교회의 역사를,

자기의 짧은 지식과 간교한 세치 혓바닥으로 잘난 척하며 왜곡하고 있었다.

이 책이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로 팔리고 우리 나라에서도 많이 팔리고 있다.

그만큼 성령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를 왜곡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신앙생활, 교회생활은 하기 싫고 마음에는 걸리고 할 때 이 책들은 그들을 안심하게 해준다.

 

유명하다는 예수전들을 보면 하나같이 예수님의 신성과 관련된 부분들을 부정, 왜곡한다.

나도 성령이 없이 살 때는 르낭의 예수전들을 읽고 예수를 더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했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성경이 증거한 예수가 아니고 그들이 완전히 인간화한 예수이다.

민중 해방자로, 자기의 진리를 위해 목숨까지 던진 자로, 가르침이 훌륭한 성자로 사랑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을 부인한다.

그들은 요한복음을 믿지 않고, 성경을 인간의 작품으로, 종교왜곡의 역사로 본다.

그들은 부활도 그 의미만을 각색해서 받아들이고자 한다.

 

역사적 사실과 교리를 인정하지 않는 신학은 인간이 만든 철학일 수는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경적 신학은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정직한 철학적 신학자들은 ‘신학은 인간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이 양을 탈을 쓰고 진리에 무관심한 다수의 교인들을 노략질하고 있다.

(마7:13-15)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예수를 사랑하는 것은 성경대로 사랑하든가, 아니든가 둘 중의 하나일 뿐이다.

내 속에 성령이 있는가 없는가의 시금석은 당신이 성경과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가에 있다.

안 믿어지면 믿을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성령을 구하시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 주님은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의심은 눈녹듯이 사라지고 마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성경의 일점일획도 다 믿어지고, 그 증거들이 역사적 사실임이 믿어지게 된다.

예수는 내가 결단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믿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십자가의 죽음을 목격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보았고 증거하였다.

만일 아니라면 신약성경은 사기군들의 책이 될 것이고

2천년 교회 역사는 사기의 역사가 될 것이고, 현재 그리스도인들은 사기군이 될 것이다.

 

바울은 그가 그토록 핍박하던 예수님의 부활하신 영광의 모습을 보고 3일동안 눈이 멀었고

아나니아의 안수로 성령 충만한 다음에 이 예수님의 종이자 사도가 되었다.

디모데에게 하는 그의 고백이다.

(딤전1:12-13)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한다.

(고전15:3-8)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사도행전은 1장에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이렇게 기록한다.

(행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행1:11) (천사들이)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그 부활을 믿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제일 중요한 부활의 의미는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의 확증’이라는 것이다.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죽음은 그저 한 죽음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유월절 어린 양의 죽음이었다.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적 형벌적 죽음이었다.

부활은 예수님의 몸을 속죄제물로 화목제물로 하나님께서 만족하게 받으셨다는 확증이다.

 

주님이 무덤을 깨치고 나오심으로 이 신학적 의미가 확증되고 증거된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대속적 형벌적 죽음을 증거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긴밀하고 밀접한 관련이 있다.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창 3:15의 최초의 복음이 완성되고 성취된 것을 보여준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부활),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십자가 죽음).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과 지옥의 세력을 정복한 사건이고 마귀의 머리통을 박살낸 사건이다.

(행 2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고전15:54-57)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을 삼키고 이기신 사건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주범은 사실 사망의 세력이다. 그 배후에 마귀와 악한 천사들이 있다.

(엡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예수님의 부활을, 성경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되었음을 증거한다.

(엡1: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예수님의 부활을,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되었음을 증거한다.

(롬6:4)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아버지의 능력과 영광으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은

부활이 사망과 지옥과 마귀의 세력을 멸하는 사건이었음을 말해준다.

사도 요한의 증거이다.

(요일 3: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사망 권세를 깨트리고 승리하신 이 부활의 의미는 곧 우리의 신앙 생활과 직결이 된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고 그분의 승리는 곧 우리의 승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한 몸이기 때문이다.

그분이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이다.

 

성경은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창세 전에 이루어졌음을 증거한다.

(엡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의 구원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서의 연합으로 이루어진다.

그 증거가 엡 2장이다.

(엡2:4-6)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에 있을지라도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과 항상 영원히 함께 있다.

그리스도는 항상 우리를 품고 있고 함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예수를 믿는 순간이다.

그 연합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뗄레야 뗄 수가 없는 영원한 것이다.

그래서 그 연합은 영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영원후로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우리는 죄와 허물로 영적으로 죽어 있었다. 지금 세상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 특징은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고, 공중의 권세잡은 악한 영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사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

 

그것이 앞으로가 아니고, 현재 우리의 영적 신분이고 특권이고 영광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말씀을 믿으시기 바란다.

빌 3:20)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에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신다.

땅에 것을 찾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 하시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 하신다.

우리가 땅에서 필요한 것을 구하되, 그 목적은 하늘을 향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는 것은 떡없이 산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떡은 필요하지만 그 떡은 하나님의 말씀을 살기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라는 것이지, 더해 주는 모든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목적과 우선권이 어디 있느냐가, 동기가 무엇이냐가, 중요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네 보물 있는 곳에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은 심히 부패되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부활은,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사는 것을 의미한다.

(롬 6:8-11)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가 새 생명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하신다.

(롬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고 함께 새생명으로 살기 위함이다.

새생명으로 사는 것은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성취도 중요하지만, 성취를 구하는 동기와, 그 성취를 이루어가는, 과정과 목적이 중요하다.

 

각자 사명에 따라 각 분야에서 일하되, 우리 마음의 숨은 동기와 탐욕을 조심해야 한다.

사람은 속아도 하나님은 속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둘 것이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다.

 

이제, 우리가 확신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겪는 어떤 사망과 지옥 같은 고난도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부활로 주님은 사망과 지옥과 마귀의 세력을 이기셨고,

그 승리는 곧 우리의 것임을 확신하시기 바란다.

(롬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는 그분과 연합하여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함께 고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롬8:17-18)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받고 있는 고난은 아무리 길고 어렵다 할지라도

앞으로 우리가 받을 크고 영원한 영광에 비한다면 잠시이고 가벼운 것임을 믿으라.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영광을 바라고 고난 중에도 즐거워하시기 바란다.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믿으시기 바란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아니하면 거둘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 주님의 부활을 믿고 부활을 사는 자세이다.

(잠 24:10)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