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을 신에 대한 학문이라고 할 때 굳이 ‘현대’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신학을 꾸미다보면 자칫 신학이 시대적 조건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신학은 신학일 뿐이지 고대신학이 따로 있고, 중세신학이 따로 있고, 근대, 또는 현대신학이 따로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관점은 두 가지 면에서 설득력이 있다.
첫째, 신학의 대상인 신은 발전되거나 변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에게 너무 명확한 사실이기 때문에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연구에 따라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가변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존재이유를 확보하고 있는 절대이기 때문에 현대라는 범주로 재단할 수는 없다.
둘째, 실제적으로 현대신학이라는 작업이 고대신학에 비해서 전혀 새로운 것을 발견해낸 것은 거의 없다. 바울과 어거스틴이 말하지 않은 것 중에서 현대신학자가 새롭게 발견해낸 것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학이 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는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바울이 이 궁극적인 사실을 훨씬 정확하게 인식했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의 우리가 아무리 현대의 인식론적 틀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어거스틴에 비해서도 하나님에 대한 더 나은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신학만이 아니라 자연과학에서도 역시 고대인에 비해서 현대인이 훨씬 철이 많이 들었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물리학의 정보를 상대적으로 많이 확보하고 있을 따름이지 물리학적 근본 사유라는 점에서는 고대인들보다 조금도 낫지 않다.
어쨌든지 이런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현대신학’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무언가를 생각하려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비록 신학의 중심 주제는 고대나 현대나 여전히 삼위일체 하나님과 계시, 종말, 구원 같은 것들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시대에 따라 변했기 때문에, 즉 신학방법론적 실용성을 위해서 신학을 현대와 연결시켜서 생각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신학을 공부해야 할 사람을 염두에 둔 관점이다. 인간의 인식론적 범주와 그 틀이 변화되고 다양화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상응하는 접근방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둘째, 신학의 주제가 그 은폐성을 이미 우리에게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학의 현대성 문제를 제기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현대는 단지 연대기적 시간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학의 종말론적 성격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 있는 신학은 종말이 이르러야 온전히 드러나게 될 그 하나님의 계시를 향해서 시종일관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현대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학이 현대적 감각을 유지하고 있어야만 신학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다거나 하나님을 좀더 깊이 인식할 수 있다는 게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종말론적 성격 앞에서 인간이 견지해야 할 인식론적 한계 때문에 ‘현대’라는 사유 방식이 필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