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은 우리가 자동차 운전 기술을 배우듯이 몇 가지 요령을 체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신학적 사유를 배워야 한다는 데에 어려운 점이 있다.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의 근원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삶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그렇지 못한 것처럼 신학적 사유는 우리가 만만하게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신대원이나 석사과정을 통해서 현대신학의 조류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현대신학의 논점들을 훤히 꿰뚫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에 체화되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소로우가 ‘월든’에서 철학 선생들은 많지만 철학자는 별로 없다고 말한 것처럼 신학의 정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신학선생은 많지만 그 신학을 그대로 삶으로 끌어가는 신학자는 별로 없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 신자들에게 설교를 할 수 있는 목사는 많지만 그 하나님을 자기 삶의 토대로 삼는 목사는 드물다. 이 말은 곧 신학 지식이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는 도구가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세계밖에 머물러서 그것에 대해 알기만 하는 정보차원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외면상 신학을 정보로 인식하고 가르치는 것과 삶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가르치는 것 사이에 차이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두 차이는 너무나 엄청나다. 목사가 신학이나 성서를 정보로만 아는 가운데서 설교와 목회를 하는 경우와 그것의 진리 속으로 들어가서 하는 경우가 완전히 다른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차이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아마 제 삼자가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논쟁을 보았다면 별로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을 통해서는 소유차원과 존재 차원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신앙은 말이 아니라 그 능력에 있다고 본 것처럼 신학도 그럴듯한 말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의 능력에 있다. 이 차이가 외면적으로 발견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극과 극이다. 우리에게 영적인 실체를 풀어낼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은 결국 그 동안의 신학작업이 정보수집 차원에 머물렀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어떻게 하면 신학을 정보로서가 아니라 영적인 실체를 담아낼 수 있는 인식론적 틀로서 소화해낼 수 있을까? 그 출발은 ‘신학적 사유로서의 신학작업’에 있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구체화하기 위한 도구를 확보하는 작업이다. 우리의 경우로 말하자면 이 도구가 곧 현대신학이다. 현대신학자들과 그들이 제시하는 주제들을 세밀하게 검토함으로써 우리가 현대적 시각으로 신학적 사유를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 제공되며,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영적인 실체인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세계에 들어가는 일련의 순서로 신학활동이 이루어진다. 이 시간에 우리는 신학의 대상인 영적인 실체와 그 대상을 현대적 시각으로 해명해 보려한 현대신학 방법론 사이에 있는, 바로 신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며 기능이라 할 ‘신학적 사유’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려고 한다.
일전에 티브이에서 세계 석학과의 대담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는데, 거기서 이런 말을 들었다. 교육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생 동안 배울 수 있는 능력을, 또는 배우고 싶다는 동기를 키워주는 데 있다고 말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건 신학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되었다. 신학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생 동안 이 세상을 신학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신학정보를 획득하는 게 아니라 신학적 사유 능력을 키운다는 사실이다. 정보와 능력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을 했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짤막하게 보충하겠다.
내 가까운 사람이 피아노 선생이라서 피아노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어느 정도 안다. 학생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또는 리스트의 곡을 연습한 다음에 선생 앞에 와서 교정을 받는다. 소위 피아노 레슨이다. 그 학생은 박자나 느낌을 선생의 지도에 따라서 바꾸면서 음악을 완성해 나간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레슨과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선생과 학생이 이런 레슨과정을 통해서 무엇을 성취해나가는가에 달려 있다. 상당한 경우에 학생은 레슨을 받고 있는 곡을 원활하게 연주하는 것으로 레슨이 끝나버린다. 이런 학생은 다른 곡을 연습한 다음에 똑같이 레슨을 받는다. 전혀 처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어떤 학생은 레슨을 받는 곡을 얼마나 완벽하게 연주하는가에 중심을 놓는 게 아니라 음악경험에 놓는다. 음악적 사유를 중심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이런 학생은 새로운 곡을 레슨 받을 때마다 음악 경험이 깊어지기 때문에 앞의 곡을 레슨 받을 때 거쳤던 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 앞의 학생은 선생의 생각을 단순히 따라갈 뿐이고, 그래서 결국은 피아노라는 기계를 완벽하게 다룰 줄 아는 기술자가 되는 것이고, 뒤의 학생은 비록 기술은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음악적 경험과 사유세계에 들어간다.
우리가 성서신학을 공부하는 이유도 단순히 성서의 역사비평이나 본문비평을 원활하게 전개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성서기자들과 같이 이 세계 문제와 하나님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을 배우려는 것이다. 교회사를 배우는 것도 그렇다. 교회의 연대기를 완벽하게 꿴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런 역사를 관통해 나가는 역사의 근본 의미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시론이나 종말론이라는 조직신학의 주제를 공부하는 이유도 역시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사안들을 신학적으로 사유하려는 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