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학단상

신학은 길이다

새벽지기1 2017. 1. 13. 15:55


우리가 신학적으로 사유한다고 할 때 그 사유라는 사건이 도대체 무엇인가? 예컨대 바르트와 브룬너의 ‘자연신학’ 논쟁을 통해서 우리의 신학적 사유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그 이외에 수많은 신학적 사유를 공부했다는 것이 과연 우리의 신학적 사유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여기에도 또 하나의 함정이 놓여 있다. 우리가 칼빈의 예정론을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이 곧 신학적 사유는 결코 아니다. 지난 2천년 역사에서 아무리 뛰어난 신학자가 제시한 신학적 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완성된 길은 아니다. 그것은 곧 그의 길이었지 우리 모두의 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간 길을 배움으로써 우리도 길을 가야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신학공부는 충분하다. 따라서 신학적 사유를 배운다는 것은 어떤 신학 대가와 똑같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유하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 사유할 수 있게 된다는 데에 핵심이 있다.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이 문제를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앙교육과 연결해보자. 목사가 신자들을 신앙적으로 지도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정보를 제공한다기보다 그들로 하여금 신앙적으로 사유하도록 돕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는 신앙적 사유를 차단시키고 어떤 고착된 기독교 정보에 눈을 가리게 만든다. 이런 신자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들은풍월만 읊조리며 살아갈 뿐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 열광주의자가 되든지 아니면 냉소주의가 되어버린다.    


다시 우리의 주제로 돌아와서, 여기서 신학적 사유는 일반 학문과 단절되어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만 한다. 즉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엉뚱한, 비현실적인, 자기 폐쇄적인 곳이 아니라 보편적인 곳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예컨대 자살이라는 주제가 우리 사회에 현안으로 등장했다고 치자. 설교자나 신학자는 이런 주제를 비켜갈 수는 없다. 어떻게 접근해야만 하는가? 물론 우리 사유의 밑바탕에는 생명의 창조자인 하나님과 그 생명의 궁극적 리얼리티인 부활 신앙이 놓여 있으며, 또한 무의식중에 자살은 죄라는 의식이 고착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일방적인 시각으로만 이런 문제를 재단할 수는 없다. 물론 우리의 신앙이라는 틀 안에서 어떤 것을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보편적 타당성을 확보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다른 시각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생명과 죽음의 관계, 존재, 시간, 역사 등등, 이런 여러 시각을 종합하면서 성서와 기독교 역사가 말하려는 바를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주변의 인문학이나 물리학 등에 대한 조예가 반드시 깊어야만 한다는 말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사유의 폭과 깊이와 방식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주변의 여러 노력들과 더불어 어떤 사안을 신학적으로 풀어내려는 사유방식을 우리가 갖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 신학은 길이다. 이 길은 신작로가 아니라 아무도 가보지 않은 숲길이다. 신비한 방식으로 우리의 생명을 이끌어 가는 영에 이르는 길이다. 하이덱거가 철학자는 도상의 존재라고 했는데, 신학자야말로 길을 가는 사람이다. 특히 ‘현대신학 세미나’에 참여한 우리는 너무 빨리 변해서 그 흔적을 찾아내기도 힘든 ‘현대’라는 숲에서 영적 실체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나서는 순례자들이며, 이런 면에서 일종의 도사(道士)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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