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주일, 우리는 예수님이 남기신 그 유명한 말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는 말씀에 얼마나 큰 위로의 능력이 담겨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말씀에 이어지는 2절과 3절의 말씀은 더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필요로 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고 너희에게 말했겠느냐?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이 말씀은 한국 전쟁 당시에 많은 가족들이 겪었던 아픔을 생각하게 합니다. 당시, 북쪽에 살던 사람들 중 많은 분들이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내려 온 경 우도 있었지만, 가장이 먼저 내려와 가족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고 나중에 다시 올라가 모두를 데려 올 계획을 했던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게 계획했다가, 그만 38선이 막히는 바람에 영영 이산가족이 된 가족들도 많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과 3절의 말씀은 이런 상황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마치, 예수님의 아버님은 거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서 새로운 집을 지을 여유 공간이 많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곧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러 채의 집을 지어 놓고 가구를 마련한 다음, 다시 돌아와 제자들을 모두 데리고 그곳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영원토록 함께 살겠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말은 쉬운데,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풀리지 않는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아버지의 집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지구 위 어딘가에 있습니까? 아니면, 지구 외에 다른 별에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그곳에 가셔서 우리의 거처를 마련한다는 말은 또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나라에서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과 같은 집이 필요하다는 뜻입니까? 거처를 마련한 후 다시 오시겠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왜 아직 돌아오시지 않고 계시는 겁니까?’
2.
이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이토록 ‘풀리지 않는 의문들’에 휩싸이는 이유는 이 말씀이 비유(parable or metaphor)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비유’가 뭡니까? 뭔가 다른 것에 빗대어 설명하는 어법입니다.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를 보고, 우리는 "와, 나무에 불이 붙었구나!"라고 말합니다. 재미있게 사는 신혼부부를 보고 "야, 깨가 쏟아지는구나!"라고 말합니다. 이게 비유입니다.
비유는 잘만 들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쉽게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하지만 들을 귀가 없으면, 비유는 이해가 아니라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잘못은 비유를 비유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옆에 있는 사람이 단풍나무를 보고 "와, 불이 붙었구나!"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즉시로 셀 폰을 꺼내어 911에 전화를 한다면, 혹은 신혼부부를 보고 "야, 깨가 쏟아지는구나!"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참깨야 들깨야?"라고 묻는다면, 그는 비유를 비유로 듣지 못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과 3절의 말씀은 비유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는 말도 비유이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는 말도 비유이며,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는 말씀도 비유입니다. 이제 곧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다음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비유를 비유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고, 풀리지 않는 의문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집에는 집 지을 공 간이 많으며, 예수님은 그 땅에 우리를 위해 신도시를 건설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길을 활짝 여실 것이라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셔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여신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간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우리의 죄가 해결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집에 우리가 있을 곳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There is no room for us in God’s Kingdom unless our sins are cleaned away.) 하나님의 영역으로 접근해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그 보혈의 십자가를 지나 거룩한 존재로 다시 지어지고,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활짝 열립니다.
그렇다면 "내가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나에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14장부터 17장까지 계속되는 말씀을 전체적으로 보면, 육신을 입고 오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신 다음, 성령을 통하여 다시 오시겠다는 뜻입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임하셔서,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제자들이 하도록 이끌어 줄 것입니다. 제자들은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을 볼 수 없지만, 그들이 하는 일을 통해서 예수님이 영적으로 자신들과 함께 일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3.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이 말씀은 거의 예외 없이 장례식에서 꼭 한 번은 읽혀지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비유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면, 장례식에 ‘꼭 맞는’ 말씀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죽고 나서 갈 천국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당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여실 것이며, 그 길이 열리면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는 말은 "내가 있을 천당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살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습니까? 빌립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10-11절).
이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예수님은 하나님과 혼연일체가 되어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과 일치했고,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이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과 일치했습니다.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뜻하는 것, 바라는 것, 꿈꾸는 것?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하나였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능력의 근원이었고, 권위의 원천이었으며, 그 무엇도 흔들지 못할 평강과 안식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삶의 상태가 바로 "나 있는 곳"이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하시는 말씀을 계속 보시면,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는 말씀의 뜻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내가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 주겠다. 이것은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12-14절).
여기서 "나를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믿음이 좋다’는 말은 하나님과 일치된 정도가 강하다는 뜻이고, ‘믿음이 약하다’는 말은 그 일치의 정도가 약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일치되어 살아가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예수님이 그러셨듯, 우리도,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고, 느끼는 것이 하나님의 정서와 일치하고, 의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하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와 일치하게 됩니다. 그것이 "나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내가 가서 자리를 봐 둘 테니 죽고 나서 천국에 오도록 하라"는 뜻이 아니라, "이제 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활짝 열릴 터이니, 보혈을 지나 하나님께 이르러, 나처럼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죽음을 당한 사람에게 들려줄 말씀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사람에게 들려줄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오히려, 하루하루의 삶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안에서 참된 생명의 능력을 찾으라’고 권고하는 말씀이며, 물질에만 눈이 어두워 참되고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눈을 뜨라’고 권면하는 말씀이고, 죄책감에 빠져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며 낙망해 있는 사람들에게 ‘보혈의 공로를 믿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오라’고 권고하는 말씀입니다. 죽고 나서 어쩌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당장, 여기서, 태도를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4.
누군가, "우리는 천국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천국을 발견한다"(It is not in heaven one finds God, but in God one finds heaven)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얼마나 옳은 말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대해 혹은 지옥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의문만 생길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에게는 천국이 전혀 의심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천국이 어떤 세계인지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세계가 있음을 믿어 알 수는 있습니다. 내게 부모가 있다면 고향도 있는 법이듯,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에게도 돌아갈 영원한 고향이 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영원한 고향에 대한 믿음은 오늘 이곳에서의 우리의 삶의 태도를 바꾸어 줍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아, 나는 이 땅에서의 삶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나는 죽음에 대해 아무런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천국 같은 거 믿지 않으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은, 저같이 천국을 믿는 사람들을 모두 겁쟁이로 여깁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천국을 믿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혹은, 유치하게도 ‘천국에 있는 파이에 군침을 흘리는’(C. S. Lewis, '고통의 문제', 223쪽) 어린애처럼 여깁니다. 혹은 이 땅에서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쓸 데없는 욕심을 부리는 미숙한 사람처럼 여깁니다.
인정합니다. 그런 사람들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을 믿는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미숙하고 유치하고 겁 많은 사람들은 아닙니다. 더구나, 천국을 믿는 사람들이 모두 이런 이유로 천국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하나님을 만난 결과로서 천국을 소망하게 된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은 현세를 잊고 내세만 쳐다보고 허송세월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그 소망으로써 현실을 새롭게 보고, 새로운 태도로써 현실을 살아가도록 변화시킵니다. 저도 이런 연유로 천국을 믿게 되었고, 천국에 대한 제 믿음은 현실을 새롭게 보게 하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믿는다는 것은 죽은 다음의 일에 대해 믿는 것만이 아닙니다. 참되게 천국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으로써 현실을 새롭게 보고 새로운 태도로 현실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고 나서 천당에 가라" 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천국이 지금 너희 가운데 있다"고, "지금 천국이 너희에게 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은 죽고 나서 가는 곳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경험하고 누리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즉 천국)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롬 14:17)라고 말씀한 적이 있는데, 천국의 본질을 꿰뚫어 표현한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삶을 살면서 의와 평화와 기쁨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천국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천국의 삶을 사는 길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여, 값 없이 주시는 용서의 은총을 힘입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 주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며, 우리에게 성령의 은총을 부어 주십니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우리는 살아계신 참된 하나님과 함께 매일 매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늘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 물론, 예수님이 누리셨던 정도로 높은 수준에 이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일치되어 그분의 뜻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입니다.
5.
T. V. 제작자로 한 때 명성을 날렸던 제라르 스트라웁(Gerard Straub)은 그 유명한 일일극 General Hospital을 제작했던 사람입니다. 한참 잘 나갈 때, 그는 한 주일에 10,000달러 정도의 수입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니며 신앙을 배웠으나, 대부분의 미국 아이들이 그렇듯 대학 생활과 함께 교회 생활을 거의 떠났습니다. 그래도 마음은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있었기에, 대학을 졸업하고 T. V. 제작자(producer)로서 그 유명한 기독교 방송사 700 Club에 입사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해 보겠다는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직접 목격하게 되면서, 신앙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고, 그 공백을 세속적인 성공으로 채우기 위해 분투했습니다. 그의 노력은 좋은 결실을 맺어, 방송국마다 경쟁적으로 그를 데리고 가려 할 정도로 인기 있는 제작자가 되었고, 엄청난 부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남아 있었습니다. 몸은 교회에서 떠났으나, 그의 영혼은 끊임없이 무엇인가 좀 더 근원적인 것을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영화 제작 문제로 로마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 날, 이상하게도 그에게 예정에 없던 여유 시간이 생겼고, 자신도 모르는 힘에 이끌려 로마 시내에 있는 어느 교회로 들어갑니다. 텅 빈 예배당에 잠시 앉아 있다가, 의자에 꽂혀 있던 성경책을 꺼내 듭니다. 얼마 만에 펼쳐 보는 성경인지 모릅니다. 아무 계획 없이 이곳저곳을 들추어 보던 그의 눈길을, 오늘 읽은 시편 63편이 사로잡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을 애타게 찾는 사람의 심정을 그린 것입니다. 그 첫 마디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주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물기 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
이 몸도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제라르 스트라웁은 그 때의 경험을 상기하며 이렇게 술회합니다.
무엇인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 사랑의 느낌에 저는 순간 압도당했습니다. 그 때 저는 일어나 제단에 있는 십자가 상 앞에 무릎을 꿇었고, 마치 전기가 제 몸을 통과하고 지나가는 듯 한 체험을 했습니다"(Something happened. I just felt this presence of God. I just was overwhelmed by this sense of love. And then I remember getting up, and I bowed before the crucifix in the tabernacle and just, like, electricity went through my body.)
이 경험을 통해 그는 무신론을 버리고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영적 여행에 오릅니다. 그리고 이 여행의 여정에서 그는 세속적인 성공과 명성과 부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 헌신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그는 상업 영화를 버리고,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가난과 질병과 재난을 영상으로 찍어, 그 참상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 헌신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그는 PBS와의 인터뷰에서 행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은 당신이 얼마나 소유하느냐에 의해 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나누느냐에 의해 잴 수 있는 것일 겁니다. 제가 보기에, 많이 나누면 나눌수록 더 많은 행복을 얻는 것 같습니다.(Happiness isn't measured by how much you can acquire, you know. I think it's maybe how much you can let go of. The more you let go of, it seems, the more you have.)
한 때, 한 주일에 10,000의 수입을 올렸던 그는 이제 한 주일에 300달러 정도를 벌어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지금 제 집을 잃을지 모를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일들에 대해 걱정해야 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일들이 잘 풀려 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잔돈을 기대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 전체를 원하십니다.(I'm on the verge of losing my house. I mean, I worry about those things, but I do have great confidence that I am doing what I am supposed to do and that things will work out. Christ isn't looking for us to give our spare change. He wants us to give our very lives.)
6.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참되게 만난 사람의 진정한 삶의 변화를 제라르 스 트라웁에게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에게도 여러 가지의 단점과 허물이 있을 것입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과 하나가 되어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는 그의 삶의 방향만큼은, 진정한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길을 가고 있으니, 모든 일이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지리라는 든든한 믿음과 평안을 그의 말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게 하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제라르 스트라웁에게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사셨던 것처럼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히 ‘위로’가 아니라 ‘실재’가 된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님이 계신 곳에 여러분도 계십니까?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성령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그분과 함께, 그분의 길을 따라 살아가고 계십니까? 바로 거기에 참된 평안이 있고, 참된 확신이 있고, 참된 성공이 있으며, 참된 생명이 있음을, 몸으로 체험하여 확인하고 계십니까?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함께 감사하십시다. 그리고 더욱 그분과 가까이 있어 그분의 현존이 우리의 현재 삶을 바꾸도록 더 힘써 그분을 찾으십시다.
아직 그렇다고 말하실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통해 활짝 열어 놓으신 길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께 이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여러분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두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여러분이 그 길을 걸어 그곳에 이르는 것만 남았습니다. 그곳에 이르러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천국의 삶’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 없이는 진정한 평화는 없습니다. 참된 안식도 없습니다. 참된 성공도 없습니다. 참된 기쁨도 없습니다. 그곳에 이를 때, 우리는 오늘 시편 저자와 함께 이렇게 노래할 수 있습니다.
내가 성소에서 주님을 뵙고
주님의 권능과
주님의 영광을 봅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기에,
내 입술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 생명 다하도록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내가 손을 들어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렵니다.
기름지고 맛깔진 음식을
배불리 먹은 듯이
내 영혼이 만족하니,
내가 기쁨에 가득 찬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시 63: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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