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근심의 이유" (요한복음 14:1-14)

새벽지기1 2016. 8. 24. 07:35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참, 귀에 익은 말씀입니다. 장례 예배를 드릴 때, 거의 어김없이 듣게 되는 말씀입니다. 때때로 슬픔에 빠진 분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 말씀을 읽어드릴 때면, 저는 불편한 마음을 완전히 떨쳐 버리기 어렵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분들이 혹시나 속으로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나 아닐까, 싶은 생각 때문입니다. "목사님, 당신이 무엇을 아십니까? 당신이 내 슬픔과 내 아픔의 한 조각이라도 아십니까? 그 말씀으로 내 마음을 위로하려 하시는 겁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참혹한 슬픔과 아픔을 별로 겪어보지 않은 저로서는 그런 상황에 처한 분들을 마주하는 것이 얼마나 큰 도전인지 모릅니다. 때론 두렵습니다. 마치, 무기 없이 전쟁터에 내세워진 병사처럼, 저는 무력감에 빠지곤 합니다.

 

제가 얼마 전 여러분들에게 추천해 드린 도널드 맥컬로우 (Donald McCullough)의 '모자람의 위안'(The Consolation of Imperfection)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직 못 읽어 보신 분들이라면, 이 가을에 꼭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책에 보면, 저자인 도널드 맥컬로우 목사가 신학대학원에서 1년 공부를 마친 다음, 여름 방학 기간 동안, 워싱턴 주에 있는 어느 작은 교회에서 임시로 봉사할 때 겪었던 경험담 하나를 읽을 수 있습니다.

 

신학교 수업을 막 시작한 이 젊은 전도사는 열정이 흘러 넘쳤고, 원기 왕성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했고, 어떤 일이 닥쳐도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그렇게 충만한 자신감으로 목회 사역을 시작하고 나서 몇 주일 지났을 때, 어느 교우로부터 죽은 남편의 장례식을 집전해 달라는 전화를 받습니다. 첫 번째 장례식을 마주하는 흥분감에 마음이 부풀어 올라 당장 그 집을 방문합니다. 거실에 마주 앉자, 이 전도사는, "그래, 남편께서 어떻게 세상을 떠나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다음 순간, 부인의 대답에 이 전도사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공황 상태(dumfounded)에 빠집니다. "음, 우리 둘이 좀 싸웠어요. 그런데 남편이 밖으로 나갔다가 얼마 후 방으로 다시 들어오더니, '잘봐!'라고 말하며 권총을 자기 관자놀이에 대더니, 그냥 당겨 버렸어요." 그 때를 회상하며 저자는 말합니다. "갑자기 누군가 내 머리에 총을 대고 있는 기분이었다." (145쪽).

 

그러면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라고 유가족들을 초토화시키고 있는 이 분노와 비애의 해일을 막아낼 방파제로 자처했단 말인가?" 저도 때때로, 이같은 역할로 저를 몰아세우시는 하나님을 탓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저는 하나님께 이렇게 호소합니다. "아, 하나님, 제가 누구라고,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이러한 상황에 저를 마주 세우십니까? 저 자신에게도 답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답을 주라는 겁니까? 저보고 무슨 말을 하라는 겁니까?" 이런 호소와 함께 땅으로 꺼지고 싶은 순간이, 목회 여정에 가끔 발생합니다. 그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제 자신의 말로는 도저히 뭐라 할 수 없을 때,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읽어 드리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읽어 드리면서도, 자신이 없습니다. "이게 무슨 위로가 될까?"하는 의심이 드는 것입니다.이 얼마나 큰 아이러니입니까? 근심에 빠진 분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고 위로해 주면서, 저는 속으로 근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2.

 

그런데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저와 다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 계셨습니까? 근심거리로 말하자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많은 근심거리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12장 27절에 보면, 예수님은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여야 할까?"라고 탄식하십니다. 13장 21절을 보면, 가룟 유다가 배반할 것을 예고하시면서, "마음이 괴로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차 당하실 고난과 고문과 십자가형을 생각할 때, 그분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사랑하는 제자 가룟 유다가 결국 그릇된 선택을 하고 멸망에 빠질 것을 생각할 때는, 또 어떠했겠습니까?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흥분하는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하고 비참하게 무너질 것을 생각할 때는, 또 어떻구요? 위험 앞에서 뿔뿔이 흩어질 제자들과 그들의 앞으로의 운명을 생각할 때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마음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요소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자면, 그분의 마음 안에는 '근심케 하는 생각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근심에 눌려 있었습니다. 그들은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혼란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근심스럽습니다. 걱정은 대개,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생깁니다. '지금' 내 몸에 암 세포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근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 암 세포가 '장차' 어찌될지 몰라서 근심합니다. '지금' 가난하기 때문에 근심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 가난 때문에 '장차' 어찌될지 몰라서 근심합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미래가 불확실하게 보였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근심이 그들의 마음을 압도했습니다.

 

예수님이나 제자들이나 근심거리를 가지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니, 근심케 하는 요소들로 따지자면, 예수님이 훨씬 더 많이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근심거리들로 인해 고통을 당하기는 하셨지만, 그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습니다. 14장 1절의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너희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라" (Do not let your heart be troubled)가 됩니다. 마음이 아픈 것과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큰 차이입니다.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은 마음이 여린 (soft-hearted) 사람들이며, 마음이 여리면 많이 아파하게 됩니다. 많이 아파할수록 많이 사랑할 수 있고 더 뜨겁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괴로워하셨다는 말은 당신에게 그리고 제자들에게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며 아파하셨다는 뜻입니다. 아파하며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분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제자들의 마음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근심에 빠졌습니다. 근심은 믿음을 증발시킵니다(evaporates). 생각을 마비시킵니다(debilitates). 삶을 온통 뒤흔듭니다. 삶에 필요한 기본적인 기능들을 마비시킵니다. 잠이 오는 것을 방해하고, 입맛을 잃게 만들며, 소화 기능을 마비시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게 만듭니다. 때로는 밤새도록 거실을 오락가락하게 만듭니다. 잠시도 앉아있을 수 없게 만듭니다. 그렇게, 근심으로 마음을 숯검댕이처럼 바싹 태워도, 변화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불안한 미래 앞에 선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에 아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이 말씀 앞에서, 누가, "당신이 근심에 대해 뭘 아십니까? 당신이 내 마음의 아픔을 얼마나 알기에 나를 위로하려는 겁니까?"라고 질문하겠습니까? 예수님, 그분은 우리가 당할 수 있는 아픔 중 가장 큰 아픔을 아신 분이고,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고난 중 가장 극심한 고난을 겪으신 분이며,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근심 중 가장 큰 근심을 마주했던 분이며, 우리가 당할 수 있는 유혹 중 가장 이겨내기 힘든 유혹을 당하셨던 분입니다. 그런 분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이 말씀에서 강한 힘과 무게를 느낍니다.

 

3.

          

여기서 예수님은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 혹은 근심을 떨쳐버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는 말씀에 그 해답이 담겨 있습니다.

 

'믿는다'라는 말을 많이들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믿는다'는 말은 '신뢰한다, 의지한다'(to trust, to rely on, to depend on)는 뜻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어떤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서 신뢰하고 의지한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한 번 믿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의지한 상태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분에게 미래의 일을 맡기고, 하루하루 그분의 인도를 따라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믿으면, 우리는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근심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감에서 옵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미래의 일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한계 의식(awareness of limitedness) 때문에 생깁니다. 그래서 미래의 일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상인들(business people)은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상품을 개발해 냅니다. 각종의 보험 상품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고안되고 팔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식(stock)과 부동산(real estate)에 투자하는 것도 미래를 어떻게든 통제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그런 것이 어느 정도 마련된 사람들은 비교적 근심이 적습니다. 하지만 근심거리가 전혀 없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돈으로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근심거리가 전혀 없는 사람은 이 땅에 하나도 없지만, 많은 근심거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놀라운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평안의 뿌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그 '기적 같은 평안'(miraculous peace) 을 보여 주십니다. 외적인 조건으로 따져 보면, 지금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위로가 필요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마치 아무 근심도 없는 분처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고 제자들을 위로하고 계십니다. 그 평안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9절)고 말할 정도로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했던 믿음?바로 이것이 그분의 평안의 근원이었습니다. 현재는 인간의 땅이지만, 미래는 하나님의 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그분이 이끄시는 길을 가는 사람은 근심거리 속에 있으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은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사고를 당할 수 있습니다. 질병을 앓을 수도 있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평생을 짊어지고 가야할 마음의 상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 현실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을 감당할 수 있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 (고전 10:13)

 

우리가 당하지 못하는 것은 현실에서 겪는 고난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안감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아무리 지식이 많은 사람도, 아무리 능력 있는 의사라도,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라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견디지 못합니다. 진실로 미래를 붙들고 있는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맡기고 살아가기까지는, 결코 평안은 있을 수 없습니다.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든든한 믿음 안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야말로 현재를 바꿀 수 있고, 현재를 바꿈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게 됩니다.

  

4.

 

지난 주 어느 날, 저는 감격스러운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쏟아 놓았습니다. '쏟아 놓았다'는 표현 그대로입니다. 제 마음에 용솟음치는 감사를 주체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쏟아 놓았습니다.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작년, 고민과 기도 끝에 뉴저지에서 버지니아로 이주한 다음, 저희 부부의 가장 큰 근심거리는 아이들이었습니다. 10학년이 되는 딸과 11학년이 되는 아들을 전학시켜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부담이었습니다. 다행히도, 두 아이 모두 이사하는 것에 대해 동의를 해 주었습니다. 그 아이들의 동의를 받고 오기는 했지만, 느슨한 학업 환경에서 지내던 아이들이 빡빡하기로 전국 최고인 Northern Virginia의 학교 환경에 잘 적응해 줄지 몰라, 마음 졸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와싱톤한인교회에서 제가 사역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께서 아이들의 문제도 돌보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습니다만, 때때로 아이들이 힘들어할 때마다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학업을 따라가기 힘들어 하는 아이들에게, "공부로 성공하지 않아도 좋으니, 건강하고 밝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위로하곤 했습니다.

 

그럭저럭 적응해 가는 중에, 아들아이에게 큰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정말 '큰'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부모님들께는 이제 말씀드리는 제 아이의 일이 별로 커 보이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디, 일이 커서 큰일입니까? 자라는 아이들에게는 아주 작은 일도 잘 못 하면 큰 일이 되어 버립니다. 용서하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아들아이가 새 학교의 축구 대표 팀에 지원하여 선발되기는 했는데, 2년 전부터 대단한 활약을 했던 골키퍼가 있어서, 주전 경쟁에서 밀려, 경기 때마다 벤치에 홀로 떨고 앉아 있는 겁니다. 이런 사람을 영어로 '벤치 워머'(bench warmer)라고 합니다. 차가운 철제 벤치 위에 앉아서 따뜻하게 덥혀 놓았다가, 교체되어 들어오는 선수에게 그 따뜻한 자리를 내 주는 것이 '벤치 워머'가 하는 일입니다. 뉴저지에 있을 때는 9학년 때부터 종종 대표 팀에서 뛰면서 지방 신문에 사진이 날 정도로 잘 나갔습니다. 뉴저지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대표 팀에서 펄펄 날았을 텐데, 새로운 학교로 전학 온 바람에, 차가운 벤치를 엉덩이로 덥히느라고 발발 떨고 있으니, 본인은 얼마나 마음 상했을 것이며, 그것을 보는 저희 부부는 또 얼마나 가슴 아팠겠습니까? 저는, 아이가 당하는 고통이 마치 제가 강요한 것 같아서 참 보고 있기 어려웠습니다.

 

저러다가 애가 비뚤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기도밖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습니다. 저는 마음을 다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이 아픈 경험이 아들아이에게 두고두고 좋은 교훈으로 남도록, 이 과정을 잘 소화하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렇게 되도록, 저와 제 아내가 이 기간 동안 아이를 잘 돌보게 도와주옵소서. 이 과정에서 아이가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던 중, 하루는, 차가운 벤치를 데우느라고 몸과 정신이 모두 축 쳐져 있는 아이를 경기장에서 데려 오면서, 차 안에서 진지하게 한 마디 했습니다. "네가 주전으로 뽑혀 신나게 경기하는 것보다 벤치를 지키는 것이 너의 전체 인생으로 볼 때는 더 유익할 수 있을 거다. 네가 앞으로 살 아가면서 이보다 더 큰 실패를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견디고 극복하는지를 이번에 배워 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주전 경쟁에서 밀려났다고 심술부리거나 투정하듯 행동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 상황에서도 밝고 긍정적으로 행동하도록 노력해 보아라. 그렇지 않으면 네 자신이 더 초라해 진다. 어떤 상황에 처해도 즐겁게 네 할 일을 하다 보면, 하나님이 너를 마침내 높여 주실 것이다.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아이들이 귀담아 듣습니까? "또 잔소리 하는구나! 또 설교 하는구나!"라는 식의 태도로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아이는 골키퍼가 아니라 공격수로 뛰어 보겠다는 의지를 코치에게 내보였고, 코치는 대표팀(Varsity)이 아니라 준대표팀(Junior Varsity)으로 아이를 내려 보내어 뛰게 했습니다. 그렇게 나머지 시즌을 보내고 간신히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리고는 그 사건은 기억에서 점점 잊혀져 갔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주, 대학 지원서(application)를 준비하던 아이가, 자신이 작성한 에세이를 좀 읽어 달라고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그 에세이를 읽고 도움을 주는 동안, 마음속으로 "주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응답하시는군요!"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이가 에세이에서, 바로 그 아픈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을 적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낯익은 학교에서 낯선 학교로, 스타플레이어에서 벤치 워머로, 대표팀에서 준대표팀으로 강등되는(demote) 경험을 통해,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 요지였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앞으로 대학에서 또 다시 벤치 워머로 전락하는 경험을 하면 어떻게 할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그런 역경(adversity)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썼습니다.

  

제가 기뻐하고 감사한 것은 에세이를 잘 썼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문가도 아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는 다만, 약 8개월 전에 쓰린 마음으로 드린 기도가 응답된 것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감격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제 믿음대로, 새 학교로 전학 오자마자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는 기적보다, 벤치 워머로 전락하여 웅담(bear's gall)을 씹는 듯한 몇 주일을 보낸 것이 아이에게 더 유익한 경험이 되었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일에도 실패하지 않는 아이가 아니라, 실패를 다룰 줄 아는 아이로 훈련시켜 주신 것을 확인하고, 감사 드렸던 것입니다. 제 근심을 맡아 주시고, 제 기도를 들어 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진실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근심할 이유가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감사드렸습니다.

 

5.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우리 자신보다 더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근심을 맡길만한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이끌어 가시는 대로 맡기고, 그분의 사랑을 믿고, 그분의 능력에 의지하여, 하루하루 살아가면 됩니다. 그 날 그 날 당하는 고난은 우리가 능히 견딜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일입니다. 모레입니다. 글피입니다. 그것 때문에 불안해지고 근심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의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저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서두에서 고백했듯, 가끔 마음이 흔들려 믿음이 온 데 간 데 없어지는 순간을 마주하곤 합니다. 가끔이지만, "이거, 큰 일 났다"는 생각에, 심장이, 마치 고무줄에 묶인 물주머니마냥, 축 쳐져 내릴 때도 있습니다. 자주는 아니라 할지라도, 때로 저도, 겁에 질린 원숭이처럼 제 자리에서 서성거리는 저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제가 여러분에게 무슨 자격으로 믿음에 대해 말씀 드릴 수 있겠습니까?

 

다만, 감사한 것은, 그것보다는 더 자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믿음을 통하여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경험하곤 한다는 사 실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말씀드린 것 같은 경험을 할 때마다, 과거보다는 좀 더 자주, 과거보다는 좀 더 진실하게, 과거보다는 좀 더 깊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미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그분을 의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을 선대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더 강해집니다. 실패와 낙망과 실망과 아픔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어둠 속에서 더 가까이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즘 여러분의 삶이 어떠십니까? 마음에 근심이 있으십니까? 그 근심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근심의 뿌리를 환히 아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들으시고, 여러분의 근심의 이유를 따져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아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여러분, 참된 믿음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을 여리게 하고 예민하게 하며 더 깊이 아파하게 하는 믿음, 그러나 미래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결코 흔들리지 않는 평안을 이끌어 오는 믿음, 그 믿음에 늘 거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오늘 주제는 나와 상관없네?"라는 생각으로 듣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근심과 걱정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평안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일, 여러분의 평안의 이유가 돈이라면, 보험이라면, 자식이라면, 부동산이라면, 혹은 건강이라면, 그렇다면 그 평안을 의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평안으로는 십 리도 가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결국 그 평안에 의해 배반 당할 것입니다. 우리를 끝내 배반하지 않는 참된 평안의 이유를 하나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14장 후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27절). 이 유별난 평화, 이 특별한 평화, 이 흔들리지 않는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늘의 기도는 인터넷에 떠다니는 한 기도문을 약간 수정하여 드리겠습니다.

 

주님,
많이 넘어지겠습니다.
많이 절망하겠습니다.
많이 실패하겠습니다.
많이 좌절하겠습니다.
많이 낙심하겠습니다.
많이 실수하겠습니다.
많이 슬퍼하겠습니다.
많이 쓰러지겠습니다.
많이 아파하겠습니다.
많이 무너지겠습니다.
많이 답답해하겠습니다.
많이 힘들어하겠습니다.
많이 괴로워하겠습니다.
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계시므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