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길을 찾은 기쁨과 감사" (요한복음 14:1-7 시편 107:1-7)

새벽지기1 2016. 8. 31. 07:41

  

1.

          

Happy Thanksgiving! 이 감사절 기간에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빕니다. 오고 가는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오랜 만에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기쁨과 행복이 넘치기를 빕니다. 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자녀들의 방문을 받으시는 어르신들께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빕니다. 자녀들의 방문을 통해 마음 깊은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되기를 빕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만의 기쁨’에 빠져서, 다른 사람의 아픔에 무감각해지는 잘못을 범하지 않기를 빕니다. 내 기쁨이 큰 만큼, 그런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더 예민하게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작은 것이라도 나누는 기간이 되기를 빕니다. 모두가 행복해 하는 기간이어서 오히려 더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을 잊지 말기를 빕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라 믿습니다.

   

아울러, 감사절 기간에 벌어지는 ‘눈 먼 낭비’ (blind waste of resources)에 대해서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누릴 권리’(right of enjoying)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삶을 누리며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누릴 권리’가 ‘낭비의 권리 ’(right of waste)는 아닙니다. 흩어졌던 가족들이 오랜 만에 모여 좋은 음식을 함께 하고, 좋은 선물을 나누고, 좋은 시간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실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지나친 낭비로 흐른다면, 하나님께서는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20세기 초반에 살았던 미국의 경제학자 스캇 니어링 (Scott Neering)은, 미국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 낭비의 정신에 저항하는 몸짓의 하나로서, 미국인들이 흥청망청 즐기는 축제 기간에는 늘 단식을 했다고 합니다. 실로, 가정마다 혹은 식당에서마다 버려지는 음식 쓰레기를 생각해 보면, 때로 저도, 식음을 전폐하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습니다. 부디, 우리 교우들의 가정에서는 이런 ‘눈 먼 낭비’가 일어나지 않기를 빕니다. 함께 모여 누리고 즐기되, 건강하고 절제된 식탁이 되기를 빕니다. 그리고 이번 감사절을 지내고 나면, 우리 모두에게, 두고두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줄만한 감동적인 이야기가 하나 정도는 만들어지기를 빕니다. 그 이야기가 이 감사절에 우리 각자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이 되기를 빕니다.

 

2.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한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적인 조건으로 따지면 감사의 조건이 가장 많은 나라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나라는 불평과 불만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삶의 만족도 (degree of satisfaction in life)가 가장 낮은 나라 중 하나라는 말씀 입니다.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우리가 경계하고 방비해야 할 바이러스는 감기 바이러스가 아니라, 이 나라의 국민들을 오염시키고 있는 ‘불평불만의 바이러스’ (virus of complaints)입니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그 무엇도 그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세상을 다 가지고도 여전히 불만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미 나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여기고,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저는 미국에 오자마자 이 바이러스에 감염될 뻔 한 경험이 있습니다. 2002년에 연구년 휴가를 받아 뉴저지로 왔을 때의 일입니다. 미국에 도착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선배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선배는 미국 생활이 벌써 30년이 넘어가는 분이었고, 부부 모두 미국 사회에서 나름대로 성공하여, 자랑스럽게 살아가는 분들이었습니다.

    

그 댁을 방문했을 때, 그 선배의 부인께서 저희 부부를 앉혀 놓고 미국 생활에 대한 가이드를 하셨습니다. 그분의 조언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모든 겸손(virtue of humility)과 겸양의 미덕을 버리고, 당신들의 장점을 선전하고, 권리를 주장하며, 끊임없이 불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이 진리로 통하는 곳이 미국이라는 겁니다.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신경을 써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주 작은 불만이라도 크게 확대해서 끊임없이 불평하면, 결국 그것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국에서 자리 잡고 성공하려면 한국 생활에서 몸에 밴 겸손(humbleness)과 침묵(silence)과 중용(goden mean)의 미덕을 버리라고 충고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말씀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말씀 안에는 한인 1세 이민자로서 미국 사회 안에서 자리 잡고 인정받기 위해 지난 30년 동안 분투하면서 겪었던 차별과 모멸감과 눈물이 담겨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분은 지금도 성공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꼭 그렇게 하는 것만이 성공은 아님을 믿고 있으며, 미국 사회라고 해서 겸손과 침묵과 중용의 미덕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고도 믿지 않습니다. 아니, 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언제나 투덜거리며 불평하며 보채대는 모양으로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 때, 하마터면, 저는 ‘불평불만 바이러스’에 오염될 뻔했습니다. 아마도, 그 바이러스에 오염되어 그 선배의 부인처럼 살았다면, 저는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더 큰 것을 얻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의 마음은 여전히 만족을 모르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았기에,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이 분에 넘치며, 제가 처한 상황이 제게 벅차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제가 저를 알기에, 그 무엇도 제가 잘 나서 얻은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이 제단에서 눈을 감고 기도 드릴 때마다, "주님,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하고, 그 말로써 기도를 마무리합니다. 의무감이나 형식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저절로 감사가 터져 나와서, 그렇게 합니다.

 

3.

          

그렇습니다. 눈을 뜨고 살아갈 때는, 우리 눈에 보이는 많은 물질 때문인지, 감사의 조건보다는 불평불만의 조건이 더 많이 눈에 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눈을 감은 채 잠잠히 머물러 있다 보면, 갑자기 진상(reality)이 마음의 눈에 펼 쳐집니다. 그 동안 당연시 여기던 것들이 얼마나 감사하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눈을 뜨고 생각할 때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우리가 힘써 노력해 얻은 것처럼 느껴졌는데, 눈을 감고 돌아보니,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하루 살아있는 것조차도, 당연하게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값없는 선물입니다. ‘값없다’는 말은 ‘헐값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너무 비싸서 값을 매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눈을 감고 자신의 주변을 살펴보면, 값을 주고 사기에는 너무도 비싼, 귀한 선물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감사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며 그분의 자녀로 회복되어 그분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으며, 그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고, 성령의 선물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활짝 여셨고, 하나님의 품에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천국의 삶을 여기, 이곳에서, 지금 누리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에서, 저는 잠시 예수님과 도마의 대화를 살펴보려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에 가서 제자들이 있을 곳을 마련한 후에 다시 와서 데려가 갔다고 말씀하신 다음, 제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말씀을 던지십니다. 4절입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2절부터 3절까지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유(metaphor)로 받아들이면, 4절의 의미는 분명해 집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의 길을 걸어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가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는 멀리 떨어진 어느 곳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그들과 함께 있습니다. 다만, 그분에게 이르는 길이 우리의 죄로 인해 막혀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으로써 그 장애물을 치우실 것입니다.

 

그런데 도마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유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마치 먼 데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로 가실 예정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는 말씀을 듣고 아연실색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그리로 가는 길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말씀에 혼란스러워하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의문이 많기로 유명한 도마가 질문합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그 유명한 말씀,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을 예수님 앞에 무릎 꿇게 했던 그 말씀을 던지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6절).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길은 ‘ 하나님께 이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그 길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통해 지금 하나님께서 그들을 만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하나님께 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멀리 계셔서도 아니고, 그분에게 이르는 길이 감추어져 있어서도 아닙니다. 제자들이 지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자신들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며, 그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보았다."

 

이제 남은 것은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막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입니다. 그 장애물만 치워진다면,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천국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제 곧 십자가의 길로 걸어 올라가실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제자들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제자들의 자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그분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예수님을 통해 활짝 열린 것입니다.

  

4.

 

길은 찾은 기쁨! 길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분들은 그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알 것입니다. 낯선 곳에서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분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아무리 둘러보아도 물어볼만한 집이나 가게도 없을 때, ‘얼마 가다 보면 Gas Station이나 Mall이 나오겠지’하고 기대하고 한참을 갔는데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 그 때 우리는 얼마나 당황을 합니까? 그러다가 인내심의 한계 즈음에 다다랐을 때, 낯익은 길 이름을 발견하거나, 불빛 환한 Mall을 발견하게 되면, 얼마나 큰 위안과 평안을 얻 습니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운전에서도 이렇다면, 하물며 우리의 인생길에서 길을 잃고 방황한다는 것은 얼마나 불안한 일인지 모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불안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해서 생기는 불안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므로 하나님께 돌아가기까지 참된 평안과 기쁨을 얻지 못합니다. 시인 구상 선생은 ‘삶과 죽음 2’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태초부터
이 우주만물과 더불어
비롯함도 마침도 없는 님의
그 신령한 힘으로 태어났다.

이제 이 지구란 별에 와서
육신이란 옷을 걸치게 되었지만
마침내 우리는 또다시 그 님의 품에
되돌아가야 한다.
(후략)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우리가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귀소본능’(homing instinct)이 있듯,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그 열망은 다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과 하나 될 때에만 그 열망은 채워지며, 그렇게 될 때, 그는 진정한 평화와 안식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죽고 나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일은 우리가 죽고 난 후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길을 내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살아생전에, 이 지구라는 별에서 육신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 그분과 하나 되어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바로 그 길입니다. 그분을 믿고 의지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살 수 있습니다.

 

5.

  

예수를 믿는 것은 곧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길을 찾은 것입니다. 그 길 위에 서서 살아가면, 다른 길들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운전할 때는 길을 잃어도 큰 상관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30분 혹은 1시간 손해 보는 것뿐입니다. 진실로 큰 문제는 인생의 길을 잘못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의 길은 하나님 안에서 비로소 제대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찾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만 이루면 다른 문제는 해결됩니다.

 

감사 시편으로 유명한 시편 107편은 "주님께 감사드려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라는 후렴구를 반복하면서, 여러 가지의 감사의 조건을 나열합니다. 그 중, 가장 먼저 노래하는 것이, 길을 찾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4절부터 7절까지,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떤 이들은
광야의 사막에서 길을 잃고,
사람이 사는 성읍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으며,
배고프고 목이 말라,
기력이 다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 고난 가운데서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바른 길로 들어서게 하셔서,
사람이 사는 성읍으로 들어가게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어떤 이들’은 누구를 말합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면서 방황하던 저와 여러분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 사는 성읍’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의 나라, 참된 생명이 있고, 참된 기쁨이 있는 천국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없이 살아갈 때, 우리는 배고프고 목이 말라 기력이 다 빠지는 경험을 해 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이 살아가면서 지치고 기진해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신 것 아닙니까?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 그분과 함께 ‘사람이 사는 성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여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신 것 아닙니까? 운전하다가 길을 잃고 헤맬 때, 낯익은 표지판을 보고, "옳지! 이제는 길을 찾았다!"고 말하며 기뻐하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옳지! 이제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찾았다!"고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가진 감사의 조건 중,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길을 여셨다는 것, 그리고 그 길을 통해 지금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사귀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사귐 속에서 우리가 그분이 원하시는 길을 찾고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것만큼 더 큰 감사의 조건이 또 무엇일까요?

 

6.

 

제가 가까이 알고 있는 어느 분의 이야기입니다. 성경 공부 시간에 이미 이 이야기를 들으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감사에 대한 가장 좋은 예화라가 생각하기 때문에 자주 말하게 됩니다.

 

한 번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운동을 하다가 다쳤습니다. 학교에서 전화가 와서 달려가 보았더니, 학교 양호 선생님(nurse)이, 아래턱이 부어오르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병원으로 가야겠다는 겁니다. 이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X-ray를 찍었습니다. 잠시 후, 턱뼈에 금이 갔는데, 금이 간 곳에 staple을 박는 수술을 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아들을 수술실에 들여보낸 이 어머니는 남편에게 연락을 해 보았으나,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생각나는 대로 몇 사람에게 연 락을 해 보았으나, 아무도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그 어머니는 할 수 없이 병원에 있는 예배당을 찾아가 아들이 수술을 받는 3시간 동안 기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다들, 한 두 번의 경험은 있겠지만, 그렇게 불안하고 마음이 산란할 때, 막상 기도하려고 앉으면 기도가 됩니까? 그저, "주여!"라는 말밖에는 더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아무리 반복하여 외쳐 보아도, 불안은 가시지 않습니다. 여전히 가슴은 떨리고, 두려운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달리 방도가 없습니다. 그냥 앉아서 안 되는 기도라도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얼마를 지냈는지요! 그 어머니의 마음에 문득, "아, 이럴 때, 내가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다면, 어떻게 이 시간을 지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에게는 하나님을 찾을만한 아무런 공로가 없지만,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고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는 것이, 갑자기 큰 감동으로 밀려오더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나를 대신해 돌아가심으로 하나님의 집에 나를 위해 이토록 ‘넉넉한 자리’를 마련해 두신 것이 감격스럽더라는 겁니다. 이런 생각이 마음을 압도하면서, 그 어머니는 비로소 평안을 찾고, 안식과 위로를 얻었으며, 감사의 기도로 나머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는 말씀에는 이토록 큰 위로와 평안과 안식이 담겨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요한복음 14장 6절이 그동안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사이에서의 논쟁에서 자주 인용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이 담고 있는 그 엄청난 능력을 보지 못하고 지날 때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 구절이 가장 사랑하는 구절이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가장 싫어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기독교의 독선과 배타주의(exclusivism)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해 참되신 하나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천국의 삶을 살도록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 "도마, 네가 찾고 있는 그 길이 나요, 네가 구하고 있는 그 진리가 나에게 있으며, 네가 갈구하고 있는 그 생명이 내게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나를 보라. 여기, 너희가 찾아 헤매던 길,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있다.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나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 안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그분 안에서 생명을 얻으라"고 위로하며 초청하는 말씀입니다. "그 초청에 응답하여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 사귀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위에서 이야기한 그 어머니와 같은 감사와 감격이 주어질 것입니다.

 

7.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올 한 해, 어떤 감사의 조건을 받으셨습니까? 저는 어릴 때, 찬송가 489장을 참 싫어했습니다.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는 가사가 매우 유치하고 기복적인 신앙의 표현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 "세어 보아라"고 번역해 놓은 말이 꼭 "돈을 세어 보아라"는 말처럼 들려서 거북했습니다. 게다가, 4부로 화음을 맞춰 부르면 듣기가 더 거북해집니다. 후렴에 가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 엇박자로 노래하게 되는데, 잘못 들으면 ‘보글보글 보글보글’ 소리만 들려서 더 이상합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저는 이 찬송을 흥얼거리는 저 자신을 발견하며 놀랐습니다. 이미 받은 복을 헤아려 보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헤아려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았더라도, 조용히 머물러 앉아, 육신의 눈을 감고, 찬찬히 지난날을 돌아보면, 고비고비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이끌어 오셨음을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감사절’을 지키는 이유는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좀 더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며 받은 복을 세어 보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고, 그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보자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조건들이 아무리 많아도, 예수 그리스도 께서 우리에게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에 대한 감사가 없다면, 그 감사는 속이 텅 빈 껍데기 감사로 끝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감사할 조건이 없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열어놓으신 길을 걷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감 사하고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감사가 있을 때, 제가 좋아하는 다음의 찬양이 우리 마음에 깊이 메아리칠 것입니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J. A. Hultman)

 

1.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로운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로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2.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헤쳐 나온 풍랑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 못 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3.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 꽃 가시 감사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