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하나님의 산은 너무 높다" (요한복음 14:6-11)

새벽지기1 2016. 9. 2. 07:38

 

 

1.

 

"예수만이 유일한 길인가?" "기독교만이 유일한, 참된 종교인가?"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는 사탄의 종교인가?"

 

한 번 쯤, 여러분 마음에 떠올랐을 법한 질문일 것입니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이 질문을 붙들고 씨름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어떤 방향으로든 이미 나름대로의 입장을 정하고 살아가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속 시원한 답변을 얻지 못하고, 미결된 숙제로서 마음 속에 묻어두고 사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46절 이하의 말씀에 그 대답이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에 이어지는 말씀, "나를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는 말씀은, 분명히 "예수 외에는 길이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설교 중에 던진 또 다른 유명한 말씀,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사도행전 4:12)에서도 분명한 대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문제는 대답이 없다는 데 있지 않고, 그 대답을 수긍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왜 수긍하지 못합니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 중 하나는, 지난 역사 속에서 기독교회가 자기만이 구원의 종교라고 주장하며 저질러 온 수 많은 폭행에 있습니다. 지난 날, 기독교회가 금력과 권력과 군사력을 독점하고 있을 때, 그 힘으로 다른 종교들을 무참히 박해하고 박멸시키려 했던 역사를 보면서, 그리고 지금도 때때로 일어나고 있는 근본주의자들의 만행을 보면서, 그에 대한 역반응으로서, 성경에 나와 있는 이 대답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고 도리질을 치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어느 교우께서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발언이 문제가 될 때, 대개의 경우, 그 발언의 내용 때문에 문제가 되기보다는, 발언한 그 사람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Almost always it is the person who delivers the message, not the message, that stirs up the controversy.) 저는 이 말씀이 오늘날의 기독교회에도 똑 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기독교회가 예수님과 그 제자들처럼 혹은 초대 교회 교인들처럼, 폭력과 금력과 권력에 호소하여 다른 종교들을 박멸하려 하지 않고, 반대로 낮은 자세에서 겸손하고 온유하게, 박해와 폭행과 모욕을 견디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가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며 선교하고 전도했다면, 요한복음 146절이나 사도행전 412절을 읽을 때, "맞아, 저 사람들이 걷는 길이야말로 진리의 길일거야!"라고 동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그것을 '교회가 하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혹은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성경 말씀의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 말씀에 수긍할 수가 있겠습니까? 문제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바로 믿는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2.

 

그렇기는 하지만, 지난날의 혹은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부끄러운 모습에 대해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리가 비진리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읽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는 우리가 귀 기울이고 마음에 새겨야 할 진리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한 번쯤은 진지하게 묻고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믿는다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범해 온 잘못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읽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는 말씀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종교는 모두 같다." 이런 주장을 펴기 위해 사람들은 종종 '산 정상(summit)에 이르는 여러 종류의 길'을 비유로 듭니다. (God)을 산의 정상이라고 비유하고, 구원을 산 정상에 오르는 것이라고 비유한다면, 모든 종교들은 그 정상에 오르는 여러 종류의 길과 같다는 것입니다. 길의 모양과 길 주변의 경치와 길의 상태는 각각 다를지 모르지만, 결국은 동일한 목적지를 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기독교가 하나님에게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저도 이 비유를 처음 접했을 때는 아주 솔깃했었습니다. 아주 차원 높아 보이고, 교양이 있어 보이고, 편협하지 않아 보여서, 그 입장에 끌린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보이는' 것처럼 실제로 이 비유가 진리를 전하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몇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종교는 모두 같다"는 말은 때로는 무책임하고 때로는 매우 위험한 말입니다. 종교 중에는 인간의 내면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생겨난 '미신'(superstitions)이 있고, 사람들을 현혹시켜 불의한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 만 들어진 '사교'(evil religions)가 있고, 처음에는 건강했는데 중도에 정도를 벗어나 사람들을 패망으로 이끄는 '사이비 종교'(cults)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 내가 말하는 종교에는 그런 것들이 포함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만, 때로는 '그런 종교'를 구분하는 일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 구분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면, 최근에 세 번째 결혼으로 화제가 된 배우 톰 크루즈(Tom Cruise)와 여러 할리우드 배우들이 믿고 있는 '싸이언톨로지'(Scientology)가 어디에 속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기존 종교를 대치할만한 좋은 종교라고 믿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그것을 '사이비 종교'로 규정하며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두고 '편협하다', '독선적이다'라고 말하겠습니까?

 

미신이나 사교나 사이비 종교를 제쳐 두고, 소위 고등 종교(enduring religions)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시다. 이 경우 에는 "모든 종교가 다 같다. 종교는 모두 신에게 이르는 여러 종류의 등산 길과 같다"는 말이 통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제가 말하기 보다는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의 윤호진 교수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한국 불교계의 유명한 학승인 윤호진 교수는 '불교인이 본 기독교'라는 논문에서 기독교의 여러 가지 교리들을 분석한 후,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이 글을 준비하기 전에 이미 예상했던 일이긴 했지만, 그러나 막상 좀 더 가까이에서 기독교의 교리를 대하면서 놀랐던 것은, 불교인들에게는 기독교 교리가 처음서부터 끝까지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것은 감정의 문제라든지, 편견, 몰이해와 같은 이유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도 어느정도 작용했겠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불교가 기독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바탕을 가지고 있는 종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보듯, 종교가 다 같지 않다는 말은 '독선적인' 기독교인들만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종교를 제대로 연구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3.

 

종교는 다 같은 것이 아닙니다. 실은, 다 다릅니다. 같은 면만 보자면 같은 면도 많습니다만, 그것 가지고 "모든 종교는 다 같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가령, 신에 대한 입장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불교는 신을 인정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신을 인정하지 않으니 불교는 나쁜 종교다'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정확한 사실을 말씀 드리는 겁니다. 앞에서 인용한 윤호진 교수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불교인들은 교리적으로 절대자로서의 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신에 대해서 말하면, 그것은 이미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인간의 수도 정진을 통해 해탈과 열반(nirvana)에 이르도록 이끄는 종교입니다. 석가모니상을 세우고 그 앞에 예불을 드리는 것도 고다마 싯다르타(Godama Shitarta)가 불교를 창시한 이후 3백 내지 4백년이 지난 다음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불교가 전파되면서 토착 미신과 결합되어 변질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말하는 '구원'과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가 보여주는 산의 정상과 불교가 보여주는 산의 정상이 같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에 대해 불교는 관심이 없습니다. 불교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제안한 것과는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길이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하고, 그 길을 통해 마침내 이르게 될 목적지가 어떻게 다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두 길이 똑 같으려니!"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설교가 강의로 변질될 위험 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 외에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간단히 말씀 드리고 말겠습니다. 유교를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고려 시대에 불교가 유교를 얼마나 박해했는지, 여러분은 아시지 않습니까? 또한 조선 시대에는 유교가 불교를 얼마나 박해했습니까? 두 종교가 같다면, 그런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불교인들이 보기에 유교는 '다른 길'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유교인들이 보기에 불교는 자신들과 다르기에 그렇게 했을 것 아닙니까? 이슬람교, 힌두교, 유대교 등, 모든 고등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처럼 신을 믿는 종교라 해도, 그 신에 대한 이해가 다 다릅니다. 그 신에게 이르는 길이 다릅니다. 종교마다 제시하는 '구원'이 서로 다르고, 그 목적지에 이르는 길이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씀드린 산의 비유를 약간 고쳐서 생각해 볼수 있을 겁니다. 각각의 종교는 동일한 산 정상으로 통하는 여러 종류의 길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산을 오르는 길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길은 관악산으로 통하고, 어떤 길은 북한산으로 통하고, 어떤 길은 남산으로 통하는 것처럼, 각각의 종교는 서로 다른 길과 서로 다른 목적지를 제시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북한산과 관악산이 ''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듯, 모든 고등 종교는 '종교'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현재 겪는 문제들의 원인을 찾고, 그 원인을 해결하여, 좀 더 온전한 인간이 되도록 변화시켜, 참된 행복에 이르게 하며 인류 사회를 더 평화롭게 하고자 하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라고 불려집니다. 그 점에서는 모든 고등 종교는 같다고 할 수 있고, 마땅히 존경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을 이루는 과정과 방법에 대해서는 북한산이 관악산과 다른 것만큼이나, 불교는 유교와 다르고, 기독교는 이슬람교와 다릅니다.

 

4.

 

모든 종교가 동일한 산 정상에 이르는 여러 가지의 길이라는 비유에 대해 동의할 수 없는 두 번째의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암시하듯, 하나님께 이르는 산은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제게는 산행(mountain climbing)을 무척 좋아하는 선배가 있어 가끔 산을 찾곤 했습니다. 서울 근교에 있는 산들은 휴일에 한 나절을 이용하여 올라갔다가 내려 오기에 아주 적당합니다. 그런 산을 올라갈 때는 간단한 차림이면 충분한 준비가 됩니다. 길도 별로 험하지 않고, 오고가는 사람들도 많아서 길을 잃을 위험도 별로 없습니다. 산 정상도 그렇게 위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울 근교에 있는 산을 오를 때면 산책하는 마음으로 나섭니다.

 

하지만 설악산이나 지리산 같은 경우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등산을 위한 준비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 대학 2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설악산 정상을 오른 적이 있는데, 그만 시간 계산을 잘 못하고 음식 준비를 잘 못하는 바람에, 내려오는 길에 큰 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 어둠을 더듬어 내려와 안전한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저희가 얼마나 무모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높고 험한 산을 오를 때는 이렇듯 준비가 중요합니다. 잘만 준비하면, 설악산이나 지리산 정도는 몇 번 등산해 볼만한 곳입니다.

 

그러면, 에베레스트(Everest)나 마칼루(Makalu) 같은 높고 험한 산은 어떨까요? 비록, 많은 돈을 내면 경험 많은 등산가들이 안전하게 안내를 해준다지만, 그리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정상에 올라갔기 때문에 안전한 등산로가 확보되었다 하지만, 저의 체력과 기술과 정신력과 경험으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입니다. 안내자가 없다면 저는 그 정상으로 이르는 길을 찾지도 못할 것이고, 그 길을 안다 해도, 그 길을 걸어 정상까지 이르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제가 전문 산악인으로 변신하여 오랜 훈련과 실습을 거쳐 도전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등산은 살아 돌아올 것을 보장할 수 없는 아주 위험한 길입니다.

 

참된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이 남산이나 관악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면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낼 수 있고, 인간의 수도와 노력을 통해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을 남산이나 관악산 정도로 낮추어 보는 것이며,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한 나절 올라 갔다 내려올 수 있을 정도의 쉬운 길로 보는 것입니다. 오르려는 산에 대해 별로 연구하지도 않고, 그냥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정상에 이르겠지'라는 안이한 태도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라는 산이 관악산이나 쉐난도(Shenandoh)가 아니라 히말라야와 같다면 어쩔 것입니까? 신과 인간 사이의 엄연한 차이를 생각해 보면, 인간인 제가 신에게 이르려는 것은 마치 등산에 초보인 제가 히말라야 정상에 이르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처럼 무모한 일이 아닐까요? 산 정상에 이르는 길을 훤히 알고 있는 안내자가 도와준다고 해도, 그 등정에 성공하여 정상에 오르는 맛을 경험하는 것은 극소수의 선택된 사람의 몫입니다. 마찬가지로, 인류 역사에 위대한 구도자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그들이 만나고 찾은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비유하자면, 그 들은 인류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유명한 산악인(mountaineer)과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만나 구원에 이르는 길이 우리 스스로 더듬어 찾아 올라가는 등산길과 같다면, 그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설사 가능하다 해도, 극소수에 불과할 것입니다.

 

5.

 

모든 종교가 동일한 산 정상으로 통하는 여러 종류의 길과 같다는 비유에 대해 느끼는 세 번째의 문제는, 예수님이 제시하는 길(Jesus' way to salvation)은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이라는 산을 기어오르는 등산로(ascending way)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인간의 편으로 내려오신 하강로(descending way)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가 기독교의 구원의 길과 다른 종교의 구원의 길이 달라지는 결정적인 부분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는 말씀에서 보듯, 예수님이 여신 길은 그분이 "아빠!"라고 부르셨던 그 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히말라야 정상에 이르는 것처럼 길고 험하고 높은 길이 아닙니다. 원래는 그런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곁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노래의 후렴처럼 혹은 교향곡의 주선율처럼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들려지는 메시지입니다. 114절은 요한복음 전체의 중심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마태복음 123절에서는, 예수님이 태어나실 것을 요셉에게 예고해 주면서, 아들이 태어나면 '임마누엘'이라고 부르라고 하십니다. 히브리말로 '임마누엘''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God with us!)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오셨고, 그분을 통해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오늘 읽은 말씀 속에서,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7)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이번에는 빌립이 예수님께 반문합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8). 7절의 은유(metaphor)를 빌립이 오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눈으로, 깨달음으로, 영의 눈으로, 예수님을 통해 그들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을 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립은 그 말씀을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말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답답해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하고 말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그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깨닫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삶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 그분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성령님을 통해 우리 곁으로 오셨고 당신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있어서 우리로서는 뛰어넘을 수 없는 죄의 장벽을 예수님께서 치워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열어 주셨습니다. 이 점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인간을 통해 인간 편으로 다가오셔서 당신을 드러내셨고, 그 택하신 분의 희생을 통해 인간의 죄를 해결해 주심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활짝 열었다는 교리는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른 종교의 길은 '아직 얻지 못한 구원'에 이르는 길이지만, 예수의 길은 '이미 얻은 구원의 길'이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길'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다른 종교의 구원처럼, 오랜 수도와 정진 끝에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선물로 받는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감으로 구원을 지금부터 누리며 심화시키는 길입니다.

 

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는 요한복음 146절이 거부감 없이 여러분의 마음에 다가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신 이유를 수긍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길은 없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셨음을 믿었기 때문이며, 인간의 죄의 문제가 당신의 희생을 통해서는 해결될 것을 믿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다른 길도 있다"고 말하셨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도, 우리가 그분을 더듬어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다른 길도 있다"고 말하셨을 겁니다. 아니, "다른 길도 많다"고 말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자녀로 회복되어 이 땅에서부터 그분과 함께 사귀며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인간의 편으로 낮아지셔서 당신을 드러내시고,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만 한다면,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어난 일이므로, "다른 길은 없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바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마십시다. 우리가 걷는 '이런 길'은 달리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이 "아빠"라고 불렀던 그 하나님이 실제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과 삶을 보고 "저 사람은 실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인정하신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얼마나 복된 길에 서 있는지 새롭게 깨달아 아십시다. 그리고 "나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함께 사는 이 길에 나서라"는 예수님의 간절한 초청을 들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응답하시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흔들리지 말고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길을 걷는 사람들은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이 길로 안내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참된 생명의 길이라고 믿는다면, 생명의 길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에게 이 길을 소개해야 마땅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웃 사랑을 강조하셨는데, 이웃 사랑 중에서도 가장 큰 사랑은 이 길을 소개하고 안내하는 일입니다. 이 노력을 '선교'(mission) 혹은 '전도'(evangelism)라고 부릅니다.

 

이 노력에 있어서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해 두려움 없이, 열린 마음으로 대하여 사귐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배척하고 멀리해서는 안됩니다. 그들과 사귐을 나누면서 우리가 걷는 길을 겸손하게 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걷는 길에 대해서도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종교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배우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실로 진리를 믿고 따르는 사람의 자신감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종교인들을 경계하고 배척하고 박멸하려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믿는 바에 대해 자신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예수님의 길에 대한 믿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다른 종교인들에 대한 관용심 (tolerance)도 커집니다. 제가 작년 이때 즈음에 여러분에게 추천한 바 있는 리차드 마우(Richard Mouw)'무례한 기독교'(Uncommon Decency)에 보면, 기독교인이 다른 종교인과 만나서 대화하는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진리(the Truth)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종교 전통에 속한 사람들과 대화할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만일 그들이 하는 말에서 어떤 진리를 발견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붙잡기 위해 믿음 안에서 과감하게 발을 내디뎌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의 팔이 우리를 붙들어 주실 것이다. (118)

 

이 말에는 예수님에 대한 매우 깊은 믿음이 배어 있습니다. 이 생각을 뒤집어 보면, 이런 얘기가 가능합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과 대화할 때, 그들이 진실로 진리를 추구하려는 구도자들이라면, 우리가 굳이 그들을 개종시키려 하지 않아도,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그들이 진리를 발견하고 진리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교와 전도는 개종시킬 것을 목표 삼기보다는, 그들이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참된 하나님을 만나도록 인도하는 것을 목표 삼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7.

 

저는 얼마 전, 한국 기독교 역사에 가장 아름다운 그리스도인 중 한 사람으로 살았던 분으로 기억되고 있는 장기려 박사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분을 추모하는 싸이트가 있기 때문에 그분이 직접 쓰신 글도 몇 편 읽어 보았습니다. 이분은 여러 가지로 유명합니다. 훌륭한 의사로 살았던 장기려 박사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청십자 무료 병원을 운영했고, 정부가 의료보험 제도를 시작하기 10년 전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청십자 의료보험을 시작했으며, 한국 전쟁 당시 북에 두고 온 아내를 생각하며 돌아가실 때까지 40년이 넘게 홀로 살았습니다.

 

저는 그분에 관한 글과 그분이 직접 쓰신 글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참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예수님 외에는 달리 없다고 굳게 믿고, 그 믿음대로 헌신적으로, 진실하게, 청렴하고 정의롭게, 그리고 고결하고 순결하게 살았던 분입니다. 자신의 묘비에 '오직 주님만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써 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그분은 예수님 한 분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사셨던 장기려 박사는 자신과 신앙의 노선을 달리 하는 사람 혹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우정 깊은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인류를 돕는 일이라면 종교와 종파를 초월하여 협력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어려움에 빠진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끌어안아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랬기에 이제 그분이 가신 후, 시간이 지날수록 그분을 그리며 그분에게 감화받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장기려 박사와 같이 살아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만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며, 그분과 함께 깊이 사귀어 살아, 제가 그분의 성품 안에 참여하고, 제 삶이 그분에 의해 변화되어 가기를 빕니다. 그 믿음에 있어서 조금의 의심도 없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어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면서도, 장기려 박사처럼, 모든 사람을 넉넉히 품어 안을 수 있는 품을 가지고 싶습니다. 제가 믿는 진리를 믿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며, 그분들에게 우정의 손을 내밀고, 겸손하게 제가 믿는 바대로 살아가며 그 믿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그분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진리로 느껴지는 것이 있으면 받아들여 내 것을 삼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를 나누고 싶습니다. 참된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아는 사람답게 그렇게 자신 있게, 그러나 결코 교만하지 않게, 그리고 무례하지도 않게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주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성령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신 하나님은, 오늘, 믿는 우리를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주님!

제게 이 기적을 허락하여 주소서.

저에게만이 아니라,

진실한 믿음을 추구하는 모든 분들에게

이 기적을 내려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