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해, 홀로 계시던 어머님의 장례를 치루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그 아드님이신 장로님께서 제게, "이젠 제가 고아가 되었네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때까지 고아’라는 말을, 부모 없는 어린 아이들에게만 사용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그 말이 꼭 어린이들에게만 적용되어야 하는 법은 없겠다 싶었습니다. 일흔이 다 되어가는 어른도 부모가 없으면 고아인 셈이지요. 부모의 의미는 어린이에게나 어른에게나 별로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고아’라는 말은 참 아픈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 실제로 고아’로서 자라면서 어려움을 당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19절)고 하셨기에, 이 단어를 잠시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그 장로님 말씀대로, 마침내는 고아가 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 말을 구성하고 있는 한자의 고’(孤)는 외롭다’혹은 홀로이다’라는 뜻입니다. 아’(兒)는 ‘어린이’라는 뜻을 가지지만, 사람’이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전적으로 말하자면, 고아는 부모 없는 어린이를 가리키지만, 넓게 보자면 홀로 사는 사람들 혹은 외로운 사람들을 다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아’에 해당하는 헬라말 ‘오르파노스’(orphanos)는 부모를 잃은 자녀뿐 아니라 자녀를 잃은 부모에게도 쓰이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의 상태를 고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의지하고 따르던 선생이 사라지고 나면, 제자들은 고아와 같은 심정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갑작스러운 공황 상태를 만나게 됩니다. 삶의 방향도 잃고, 삶의 의미도 잃고, 막 살아가기 쉽습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그리고 자식에게 있어서 부모는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중심축 같은 것 아닙니까? 딸 하나를 키우며 살아가시는 어느 교우께서 어렵게 그 딸을 얻은 과정을 말씀하시면서, "그 때 심정으로, 아이라도 없으면 막 살 것 같아서 아이를 낳았습니다"라고 고백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딸이 지금껏 가장 큰 생명의 에너지가 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 모두에게 진실인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그런 비유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식에게 부모가 있다는 사실은 혹은 부모에게 자식이 있다는 사실은, 마치 풀밭에 내다놓은 염소가 줄에 매어 있다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는 비유입니다. 그 줄이 없으면 그 염소는 제 마음대로 다니다가 길을 잃고 맙 니다. 그 줄이 너무 바짝 매어 있으면 행동반경이 너무 좁아 구속을 받습니다. 적당한 길이로 매어 있는 염소의 목줄은 염소의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안전’을 보장해 줍니다. 그렇듯, 사랑의 줄로 서로 매어 있는 부모와 자식의 줄은 서로에게 자유와 안전을 보장해 주는 아주 든든한 안전 줄입니다.
이것은 스승과 제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는 더 이상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직 교사와 학생만이 있습니다. 제자를 자식처럼 사랑하고 돌보는 스승도 보기 어렵고,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존경하고 따르는 제자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오늘 읽은 예수님의 말씀에 배어 있는 느낌을 우리가 다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사랑하고 믿고 따르던 스승이 죽고 없을 때, 제자들이 얼마나 심한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될 지, 우리는 상상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염소의 목에 걸려 있던 줄이 끊어지고, 허허 벌판에 홀로 내버려진 것과 같습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곧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 사람들은 더 이상 육신의 눈으로는 그분을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19절에서 "조금 있으면, 세상이 나를 보지 못할 것 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라고 믿고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얼마 후에 예수님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성령을 통해 영적으로 그들에게 돌아와 함께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19절 후반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육신의 눈으로만 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볼 수 없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영적인 눈으로 그분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는 말씀은 재림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하여 다시 오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계시게 하실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다른 보혜사’라고 말씀하시는데, ‘다른 보혜사’라는 말은 ‘원래 보혜사’가 있다는 뜻입니다. ‘보혜사’라는 말은 ‘변호사’ 혹은 ‘ 보호자’라는 뜻의 특별한 헬라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구하여 ‘ 다른 변호사’ 즉 ‘다른 보호자’를 보내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원래 변호사’ 혹은 ‘원래 보호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변호자였고 보호자였습니다. 이제 잠시 후면 성령께서 오셔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지속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다시’ 오신다는 뜻입니다. 한 번 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늘 오신다는 뜻입니다. 늘 오신다는 말은 ‘왔다 갔다’를 반복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함께 계셔서 우리와 늘 교통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육신적으로 보면 고아와 같이 내버려진 상태에 있지만, 영적으로는 늘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게 됩니다. 그분이 ‘늘',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께 마음 문을 열고 기다리면 그분이 더 깊이, 더 가까이, 더 압도적으로, 더 철저하게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교회력으로 강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강림절은 예수님의 ‘이미’ 오심을 기억하고, ‘앞으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며, ‘오늘’ 더 깊이, 더 가까이 오심을 감사하고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 더 깊이 다가오시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열고 그분을 맞아들이는 일입니다. 이것이 성탄일까지 우리가 해야 할 영적 훈련입니다.
유명한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강림절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 주님이 다시 오실 거라고들 말합니다. 그 말은 진실입니다. 하지만 ‘다시’라는 말에 문제가 있습니다. ‘또 한 번’이라는 말로 오해할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영원한 거처로 정하신 인간의 실존을 주님은 결코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거라는 말은 여전히 진실입니다. 주님이 이미 저희에게 오셨다는 사실이 더욱 더 분명하게, 끊임없이 드러나야 하겠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주님이 오십니다. 주님의 오심은 과거도 미래도 아닙니다. 바로 지금, 주님의 오심은 충만히 이루어집니다. 지금은 하나의 강림절, 이 계절에 주님이 진실로 오셨음을 저희가 알게 될 것입니다. 오실 하나님, 저에게 은혜를 주시어 지금, 강림의 한 때를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영원히 당신 안에, 그 복된 영원한 때를 살게 하소서." ('사귐의 기도를 위한 기도선집', 596-67쪽)
3.
강림절은 특별히 고아와 같은 심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계절입니다. 주님의 깊이 다가오심을, 새롭게 다가오심을 기다리며 감사하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누가복음 1장에는 또 다른 의미의 고아 즉 ‘오르파노스’가 나옵니다. 바로 사가랴와 엘리사벳입니다. 이들 부부는 둘 다 제사장의 가문에서 출생한 ‘진골’ 종교인이었습니다. 핏줄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건 생활과 사회생활에 있어서 흠 잡을 데가 없었습니다. 이 글을 쓴 누가는 이 부부를 이렇게 칭찬합니다. 1장 6절입니다. "그 두 사람은 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어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흠잡을 데 없이 잘 지켰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에서 누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엘리사벳이 임신을 하지 못하는 여자이고, 두 사람은 다 나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었다"라는 이 말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눈물과 한과 기도와 아픔이 담겨 있는지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에 의하면, 자녀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징계의 표시였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제사에 정성을 다하고 십일조를 정확하게 바치면, 어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게 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녀의 축복, 재물의 축복, 건강의 축복 등 만사형통의 축 복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누가복음 1장 6절과 7절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모순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마땅히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야 할 만큼 고결하고 성결하고 거룩하고 흠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자녀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당사자들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자식이 없어서 겪는 외로움과 허전함은 오히려 견디기 쉬웠을 것입니다. 자신들로서는 정성을 다해 율법을 지키고 성결하고 거룩하고 의롭고 흠 없이 살려고 애쓰고 있 는데,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뒷담화를 나눕니다. "아니, 겉으로는 아무 흠도 잡을 것이 없는데, 왜 자식이 없대, 그래. 뭔가, 하나님만 아시는 죄가 있나 봐? 그렇지 않고야, 자식이 없을 수가 있어? 제사장들이라니, 다 그 모양이란 말이야!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면서, 속으로는 더러운 죄로 가득한 위선자들!" 이런 수 군거림을 느끼고 있었다면,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참, 사람이라는 존재들이 때로는 이렇게 잔인합니다. 생각 없는 말로써 사람의 생명을 질식시키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십니다. 사가랴가 당번이 되어 성전에 분향하러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그를 찾아오십니다. 사가랴가 두려움에 사로잡히자, 천사가 말합니다. 13절입니다.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네 간구를 주님께서 들어 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여라."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엘리사벳은 처음부터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몸이었고, 정상적인 여자라도 이제는 더 이상 잉태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미 부부 관계가 끊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하늘을 보아야 별을 따지요! 하늘을 본다고, 다 별을 땁니까? 별이 떨어져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아들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얼마 후,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하늘을 보았고, 떨어지는 별을 받아 안았습니다. 엘리사벳의 태에 생명이 들어앉았습니다. 그 아이가 나중에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입니다.
강림절은 이렇듯, 스승을 잃은 제자들 같이 공황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특별히 의미가 있는 계절이며, 사가랴와 엘리사벳처럼 외롭게 사는 사람들에게 각별한 계절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을 확인하고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너희를 고 아처럼 버려두지 아니하고,너희에게 다시 오겠다"고 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통해 메시야를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수 없이 반복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금새 이루어지지 않자,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자기들 힘으로 메시야를 만들어 옹립하려는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국 수 백 년이 지나 그 메시야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어김이 없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또 다른 약속들을 믿습니다. 특별히,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믿습니다. 장차 재림하실 것도 믿지만, 성령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더 깊이, 더 철저히, 더 친밀하게 오시겠다는 약속을 우리는 믿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분을 끌어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오시는 겁니다. 억지로 오게 할 수 없습니다. 우 리는 다만 그분이 오실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기다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을 더 깊이 만나고 더 친밀히 사귈 수 있습니다.
4.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깊이 오실 조건이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4장 21절에서 우리는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서 지키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드러낼 것이다." 이 말씀 속에, 주님이 더 깊이, 더 가까이 우리에게 오시도록 준비하는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냥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입술로만이 아니라, 삶 전체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배우고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삶 전체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면 그분이 당신을 드러내 보여 주신다는 겁니다.
함께 사는 부부가 어떻게 서로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까? 사랑함으로써 그것이 가능합니다. 더 깊이 사랑할수록 상대방을 더 잘 알게 되고, 아는 만큼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부부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더 가까이, 더 친밀하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미 우리 곁에 성령을 통하여 오신 주님께서는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십니다. 더 가까이 오시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고아처럼 버려져 있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찾아오신 때가 언제였습니까? 하나님을 억지로 끌어당기려 하지 않고, 그분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며, 너무나도 늦어졌다고 생각될 그 때 조차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며, 경건한 삶을 살며,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며, 흠 없이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준비하고 기다리는 마음에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오시는 것은 오시는 분의 자유입니다. 주시는 것도 주시는 분의 자유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오시는 분의 뜻에 맡기고 하루하루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갈 뿐입니다. 받는 사람은 주시는 분을 믿고, 주실 때까지 기다리며, 하루하루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가기를 힘쓰는 사람입니다. 아니, 우리는 받을 것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이 오실 것을 기다리고 그분이 주실 것을 기다립니다. 혹시 오시지 않아도, 주시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다만, 우리는 오시리라는 그분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오시리라고 기대하며 기다립니다. 주시리라는 그분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주시리라고 믿고 기다립니다. 때가 너무 늦었다 싶었을 그 때, 사가랴와 엘리사벳에게 오셔서 약속을 행하신 것처럼, 혹은, 모든 것이 끝났다 싶었을 그 때, 열 한 제자들에게 오셔서 약속대로 성령의 선물을 주신 것처럼, 그렇게 약속을 지키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그분을 기다립니다. 이미 성령을 통해 리에게 와 계신 분께서 이 강림절 기간 동안에 더 깊이, 더 가까이, 더 분명하게 당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기를, 우리는 기다립니다. 망연히 그렇게 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더 많이 읽고, 더 깊이 묵상하고, 더 돈독히 실천하면서, 그 말씀 속에서 그분을 친히 만나 보기를 기다립니다. 그럴 때, 그분은 약속대로 당신을 환히 드러내실 줄로 믿습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내가 고아와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외롭고 두렵고 허전한 분이 계십니까? 제가 좋아하는 흑인영가 "Sometimes, I feel like a motherless child" 의 가사처럼, 때로 고아와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까?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자식이 없어서 그런 분도 계시고, 부모가 없어서 그런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국땅에 홀로 떨어져 있어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자식이 있다고는 하나, 없는 것과 진배없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오늘부터 성탄절에 이르는 네 주간은 바로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와 계신 주님을 더욱 친밀히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더 자주 머물러 앉아 기도하고, 더 자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더 많이 봉사하십시다. 그렇지 않고, 상업 광고에 들떠서,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사들이고, 더 많이 돌아다니다가는, 문득 고아와 같이 버려진 느낌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 찬송가 487장 ‘죄 짐 맡은 우리 구주’의 원래 제목은 ‘What a Friend We Have in Jesus’입니다. ‘예수님 같은 친구가 어디 있나’라고 번역하면 좋을 것입니다. 이 제목을 우리 상황에 맞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What a Lover We Have in Jesus’ (예수님 같은 애인이 어디 있나?) 혹은 ‘What a Teacher We Have in Jesus’(예수님 같은 스승이 어디 있나?) 혹은 ‘What a King We Have in Jesus’(예수님 같은 왕이 어디 있나?) 혹은 ‘What a Comforter We Have in Jesus’(예수님 같은 위로 자가 어디 있나?)등과 같이 바꾸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강림절에, 여러분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주님을 더 깊이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주님 안에서 이웃들을 새롭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결코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참 좋으신 주님을 더 깊이 만나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중, "아, 다행히 나는 그렇지 않아. 자식들은 모두 효자 효녀들이고, 친구들도 많지. 나는 고아처럼 느껴지는 적이 한 번도 없어!" 라고 생각하며 안심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정말, 그렇다고 느끼십니까? 정말 그렇다면, 그것이 언제까지 가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눅 6:25)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웃는 그 웃음, 지금 느끼고 있는 그 만족감이 불원간 여러분을 배반할 것입니다. 그것에 배반당하지 않는 길은 예수님 안에서 참된 친구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새로이 발견하는 것입니다.
6.
이제 파티(party)의 계절이 옵니다. 파티는 우리의 외로움과 고독감을 치료하기는커녕, 그것을 더욱 깊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파티는 고독감을 잠시나마 잊고자 하는 몸부림입니다. 수많은 모임과 파티와 소음에 지치도록 시달리면서도, 돌아서 홀로가 되면, 다시금 마음을 압도하는 외로움과 고독감을 피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 없는 존재의 실상입니다. 그 병이 깊으면, 친구들과 어울려 웃고 즐기는 동안에도 문득 문득 고독이 씹힙니다. 그리고 그 고독의 끝은 철저한 무의미요, 텅 빈 허무감입니다. 이 질병을 치료하는 길은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님과 사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지금도 우리에게 와 계시며, 또한 계속 오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 계절이 파티의 계절이지만,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기다림의 계절이요, 주님의 오심에 우리의 마음과 삶을 준 비하는 계절입니다. 세상 문화와 반대로 행동해야 하는 계절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빠지는 것만큼, 우리는 한가해 져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소비를 늘리는 것만큼, 우리는 소비를 줄여야 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일을 더 많이 하는 만큼, 우리는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며 이웃을 향해 손길을 뻗치는 일을 더 많이 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더 가까이, 더 친밀하게 그리고 더 깊이 오실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선물은, 알고 보면, 달리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이 은총이 가득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주님,
지금도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기 원하시는 주님,
저희의 마음을 다스려 주소서.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게 하시고
사랑 속에서 주님을 더 깊이 만나게 하소서.
주님을 만나,
더 깊이, 더 자주 사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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