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은 질문을 하나 드림으로 오늘의 말씀 묵상을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깊으면 어떻게 됩니까? 사랑이 깊어지면 무슨 변화가 일어납니까?
저와 같은 세대에 살던 분들은 이 질문을 듣고, 가물 가물, 잡힐듯 말듯 생각나는 노래가 있을 것입니다. 가수 양희은씨가 불러서 유명해진 '내 님의 사랑은' 이라는, 매우 처량한 노래가 있었습니다. 원래는 Marie Jeon이라는 프랑스 가수가 부른 노래 L'amour De Mon Amoureux라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실연의 상처를 붙들고 씨름하며 "사랑하는 그대여, 내 품에 돌아오라"고 절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절규하다가 마침내 음악이 잦아들면서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마지막 구절이 있습니다.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어떻습니까? 이 대답에 동의하십니까? 사랑이 깊어지면 외로움도 깊어지던가요? 아닌가요? 그러면 여러분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김종제라는 시인은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사랑이 깊으면 미친다." 그 시의 첫 연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미친다
제대로 흐르지 못하고
속으로 속으로 삼키며
고여있다 썩어가는 물처럼
너는 나를 미치게 한다
이 대답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도 혹시, 사랑이 깊어져 미칠 지경이 되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랑'이라는 신열에 온 몸이 불덩이처럼 되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 시절을 생각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그 때, 내가 뭔가에 홀렸었지'라는 생각이십니까? 아니면, '그게 뭐 사랑인가? 집착이었지'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면, 지금도 생각하면 할수록 아쉽고 아프고 외롭고 미칠 것 같습니까?
'사랑이 깊어지면 외로움도 깊어진다'는 대답과 '사랑이 깊어지면 미친다'는 대답의 공동점은, 둘 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혹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을 포기하고 견디려 하면 외로와지는 것이고, 포기하지 않고 그 사랑에 집착하게 되면 미치게 됩니다. 만일 사랑의 상대가 마음을 열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 외로움은 갑자기 증발해 버립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이 내 사랑을 받아주면, 괴로워서 미칠 지경에 있다가 갑자기 좋아서 미칠 지경이 됩니다.
2.
사랑은 마음의 문제(matter of the heart)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내가 움직일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 밖에 없습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나도 때로 내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아무리 애쓰고 힘써도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성 간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반대로, 마음을 아무리 잠재우려 해도, 터져 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경우가 있습니다. 내 스스로를 향해 "너 왜 이러니? 이래선 안 된다. 이러지 말자. 정신 차리자"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잘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방향이 엇갈릴 때, 우리는 어려움을 겪는 것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김종제 시인의 시를 보면, 다음 연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승의 어느 한 순간도
열려본 적이 없는 듯
굳게 닫혀 있는 너
너는 나를 끝없이 절망하게 한다
여기서 시인은 열리지 않는 연인의 마음의 철문 앞에서 절망하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그런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이 그의 절대 권력으로도 열지 못하는 것이 한 여인의 마음의 문입니다. 완력으로 그 여인의 마음의 문을 열려 하다가는 그 여인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됩니다. 상대방의 마음 문을 열게 하는 길은 정성으로 감동시키는 방법 밖에 없는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언제나 마음문이 열리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정복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내 마음을 정복하기도 어렵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정복하기는 더욱 더 어렵습니다. 아니, '정복'이라는 말에 어폐가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정복할 수 없습니다. 그 마음을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주인이 마음의 문을 열어주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마음의 문에는 손잡이가 안쪽에만 있다'고 말합니다.
3.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여기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게 먹을 것이다."
이 말씀은 매우 잘 알려진 말씀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아니, 들어오고 싶으시면 문을 열고 들어오시지, 소심하게 시리, 문 밖에 서서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신단 말인가?'라는 질문을 가져 본 적이 없으십니까? 주님이 누구십니까? 장정 몇 사람이 끙끙대며 옮긴 돌문을 열고 부활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 분이 우리의 마음 문 밖에서 이렇게도 무력하게 서서 손기척(knock)만 하고 계시다는 말입니까? 어떤 사람은 몇 개월, 또 어떤 사람은 몇 년, 또 어떤 사람은 몇 십 년이나, 마음의 문을 두드리면서 열어 주기만을 기다리느라고 밖에 서 계신다는 말입니까? 어딘지,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 보는 예수님의 모습과 모순되어 보이지 않습니까?
사랑하고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꼭 기억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공포에 질려서 그분 앞에 엎드리게 하거나, 신기한 일로써 우리의 얼을 빼어놓아 그분을 추종하게 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마음의 지도(geography of heart)와 마음의 생리(anatomy of heart)를 잘 알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우리의 마음을 얻되, 참되게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침내 그분의 사랑에 감화되고 감동되어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으로 모셔들일 때까지, 밖에 서서 기다리시며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스토커(stalker)처럼 집요하게, 성가시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문득 문득 우리가 홀로 있을 때, 잊지 않을만큼 자주,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며 기다리십니다. 문의 안쪽에만 있는 손잡이로 마음의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참된 사랑이 아니고는, 우리 인간과 하나님이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더욱 더, 마음이 아니고는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육신을 입고 사는 우리 사람들은 마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 없이 만나 시간을 보내고는 '만났다'고 말합니다. 속는 것입니다. 마음 없이 만난 것은 '스친 것'입니다. 물건과 물건이 닿은 것뿐입니다. 참된 인격적인 만남은 마음과 마음의 만남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이렇듯 마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을 열고 그분을 모셔 들이고 사랑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4.
바로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다. 그 의문을, 오늘 읽은 본문 안에서 유다라는 제자가 대변해 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단 안에는 가룟 유다 말고 또 다른 유다가 있었습니다. '유다'는 유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름 중 하나였으니,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 유다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유다의 질문은, '왜 믿는 사람들에게는 당신을 드러내시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드러내시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부활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제기하는 또 다른 질문과 맥을 같이 합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시는데, 그 사람들이 모두 주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도 나타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빌라도나 가야바처럼 당시의 권력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무릎 꿇리셨다면, 그들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겠습니까?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부활하신 주님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셨을까요?
실은, 오늘날 우리 주변을 살펴 보아도 우리는 동일한 질문을 종종 마주하게 됩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보았다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당신을 보여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최근에 그런 경험을 하신 분들이 여럿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하다 보면,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 중에 함께 하시고 역사하심이 너무도 분명한데, 눈을 돌려 신문을 보면 혹은 TV 뉴스를 보면, 그곳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백화점에 가 보아도, 자동차 딜러에 가 보아도, 자동차 면허 시험장에 가 보아도, 학교나 법원에 가 보아도, 어디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왜 이렇습니까? 믿는 사람들이 모인 모임에 가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신 것이 너무도 분명해 보이는데, 그 모임을 떠나면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흔적을 찾을 수 없으니, 왜 이렇습니까?
이거, 참 심각한 질문이 아닙니까? 그러려니 하고 그냥 지낼 수는 없는 문제가 아닙니까? 그 대답의 실마리를, 유다에게 주신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 찾아 보십시다. 23절과 24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리하면 내 아버지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요, 내 아버지와 나는 그 사람에게로 가서 그 사람과 함께 살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 너희가 듣고 있는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주의가 깊은 분들은 아마 이 말씀이 요한계시록 3장 20절의 말씀과 별로 다를 바 없음을 눈치 채셨을 것입니다. 다만, 요한복음에서는 '사랑하면'이라고 했고, 요한계시록에서는 '문을 열면'이라고 말한 차이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것과 문을 여는 것은 같은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마음의 문을 여는 사람 즉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여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고 싶어하시는 주님, 주님의 사랑을 알아차리고 우리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참된 사랑을 나누고 싶어하시는 주님은, 억지로 혹은 완력으로 우리를 정복하거나 위압시키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것은 참된 사랑을 얻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만남은 아무 유익도 없기 때문입니다.
5.
그렇다면 위에 제기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어느 정도 발견된 셈입니다. 유다는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우리에게는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사랑 때문이다. 마음 때문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여 자신의 마음 문을 열어주지 않는 사람에게 들어갈 수가 없다. 아니, 들어가도 소용이 없다. 그래가지고는 참된 관계가 맺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느냐? 너희의 사랑이 깊을수록, 너희는 나와 함께 더 깊이 사귀어 살아가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질문 즉,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오늘의 말씀은 답변을 해 줍니다. 예수님의 대답을 상상해 본다면 이렇게 됩니다. "사랑 때문이다. 마음 때문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여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 사람에게 나를 드러내지 않는다. 설사, 억지로 나를 드러낸다 해도, 그들은 나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알아 보더라도, 놀라거나 두려워할 뿐이다. 참된 믿음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나를 사랑하여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오늘 우리의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또 다른 질문,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오셨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데, 믿는 사람들 중에는 성령의 역사가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것 같은데, 왜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하나님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오늘의 본문은 답을 줍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 같습니다. "사랑 때문이다. 마음 때문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여 마음의 문을 여는 사람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마음의 문을 부수고 침입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 그것은 참된 사랑을 얻는 길이 아니다. 그러니 나는 그들의 마음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어주기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혹시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활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혹시나,믿지 않는 사람들의 세상에 내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속지 말아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만큼이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나는 그들에게도 함께하고 있다. 다만, 그들이 마음을 열고 나를 사랑할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6.
남녀 간에 사랑이 엇갈리면, 사랑이 깊을수록 외로움만 깊어질 수 있습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미칠 수도 있습니다. 때로, 엇갈린 사랑이 깊어지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길에 있어서, 사랑이 깊으면 사귐이 더 깊어지고, 위로가 더 깊어지고, 기쁨이 더 든든해집니다. 사랑이 깊은만큼 하나님은 더 분명히 보입니다. 사랑 속에서, 주님은 당신 자신을 더 분명히 드러내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감정적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랑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의지적 사랑, 주님만을 위하는 사랑, 일관된 주님 사랑은 우리에게 그분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실 것입니다. 오직 사랑을 통해서만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과거의 오심을 기억하며, 미래의 오심을 기대하고, 지금 우리에게 더 깊이, 더 가까이 다가오는 주님의 오심을 열망하는 이 강림절에 두 가지를 기억하십시다. 하나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더 깊어지도록, 주님께 대한 우리의 마음이 더 활짝 열려지도록, 영적 생활에 더 열심을 내십시다. 우리 중에 계시는 주님의 활동 모습이 더 분명해지도록, 더 사 랑하십시다.
다른 하나는, 아직 주님께 마음 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 분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음을 아직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분들, 아직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그 주님의 현존을 그들도 볼 수 있도록, 주님께서도 이미 노력하고 계시지만, 우리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우십시다. 물이 바다에 넘치는 것처럼, 주님을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넘치기를 소원하며, 더 사랑하여 사랑 속에서 주님과 함께 살아 나아가십시다.
주님,
저희 마음을 엽니다.
오셔서
마음의 중심에 자리 잡으소서.
마음 전체를 다스려 주소서.
마음 속속들이 스며들어 주소서.
주님께 대한 저희 사랑이
깊어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주님을
육안으로 보는듯이
손으로 만지는 듯이
분명히 보며
친밀히 사귀어 살아가게 하소서.
사랑이 깊어져
주님을 아는 지식이
더 분명해지게 하시고
물이 바다에 넘치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넘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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