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경험 많고 사랑 깊은 농부 하나님" (요한복음 15:1-10)

새벽지기1 2016. 9. 22. 13:37

 

1.

 

인생사는 참 알 길이 없습니다. 웬만큼 잘 되거나 웬만큼 안 되는 경우에는 그저 대충 '뭔가 있으려니!'하고 넘어갑니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기면, 그 사람이 그만한 덕을 쌓았거나,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받았거나, 재수가 좋거나, 여하튼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약간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 사람이 뭔가 잘못을 했거나, 지금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시련을 주시는 것이거나, 혹은 재수가 나빴거나,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딱히 대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설명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웬만큼'이 아니라, 엄청나게 잘 되거나 혹독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럴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하는 일마다 대박을 터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은 아무리 헤쳐 보아도 그럴만한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다시, 또 다시 혹독한 어려움을 당합니다. 이런 경우를 당하면, 해답이 나오질 않습니다. '뭔가 있으려니!' 하고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딱 부러진 대답을 찾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딱 부러진 대답은 없습니다. 그러니 답답하고, 불안하고, 억울하고, 막막할 따름입니다.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면, 과연 인생은 공평한가, 의심하게 됩니다. 선하고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기독교의 믿음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운명이나 팔자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아니면, 그저 모든 것이 우연이고, 재수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할 일은 어떤 방법으로든 액운을 때우고 우연한 사고를 피할 도리를 찾는 것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미신, 점술, 영매술 같은 것들은 바로 이러한 불안감에 기생하여 번식합니다. 선하고 공의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믿다가도, 이런 현상을 마주하고 나면, 당장의 액운을 때워준다는 약속을 더 믿고 싶어집니다. 이런 일을 거듭 당하다 보면, 우리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피해망상적인 생각에 빠지게 되고, 어둠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곳에서 웅크리고 있고만 싶어집니다. 그리고 자신을 그런 지경으로 몰아넣은 알 수 없는 힘에 반항하는 몸짓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퍼붓습니다.

 

2.

 

한 주에 한 번씩 제게 배달되는, 어느 구호 기관에서 보내는 '이야기 편지'가 있습니다. 얼마 전, 그 편지에서 담긴 어느 여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대답없는 질문에 한 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안녕하세요저는 뉴욕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새벽편지는 항상 메일로 접하고 있으면서도 편지를 쓰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너무나도 어이없고 가슴이 아파서 가슴을 움켜쥐고 서러운 마음에 일주일 내내 울다가 이렇게 편지를 써봅니다.

전 어려서 저를 낳아주신 아버지로 인해 부잣집에 팔려갔었습니다. 7살 나이에 뭘 알겠어요. 그 집에 가서 청소며 빨래며 집안일을 했고, 몸은 시퍼렇게 멍들도록 매일 맞았었습니다. 그렇게 지낸 10년간,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한 적도 없었습니다. '나에게도 언젠간 행복이라는 놈이 올 거야'하는 마음으로 꿈을 키우며 살았으니까요 

제 나이 16살 되던 해에 아버지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미안하다며 미국으로 가자는 말과 함께, 이제까지 못해준 행복한 가족의 정을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 자체도 허황된 꿈이라는 건, 미국에 도착한지 3일 만에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는 가게에서 17시간을 서서 일해야 했으니까요. 일요일도 없는 그런 나날... 학교에 보내주고, 배우고 싶은 거 다 해주겠다던 우리 아버지는 결국 저를 일하게 하려고 부르신 것 같았습니다. 학교에 가고 싶다는 말 할 때마다 일주일을 못 일어날 정도로 맞아야 했으니까요. 그런 아버지가 증오스러웠고 너무 미웠습니다. 영어도 못하고 수중에는 돈 한 푼 없었지만, 그래도 더 있다가는 제명대로 못 살 거라는 생각 끝에 집을 나왔습니다.

 

정말 안 해본 일 없이 일만 하며 살았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세탁소에서 일했고, 나머지 시간에는 가게, 햄버거 집에서 일하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 옆도 뒤도 안돌아보고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가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셨다는 소식도 들었고, 그곳에서 새엄마 하고 배다른 동생이 잘 산다는 이야기도 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젠 거의 15년이 흘렀죠. 저희 할머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도 없고 그렇게 아껴주며 같이 산 분도 아니지만, 그래도 할머니이기에 전 장례를 치르러 그곳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아버지는 예전과 달리 저에게 너무나도 잘해주시고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 속에서 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었으니까요.

 

그런데 장례가 끝나고 아버지가 저에게 그러시더군요. "동생 보러 가야지" , "어디 있는데요?" 하고 물었지만, 대답을 안 하셨습니다. 차에 올라타 도착할 때까지 침묵으로 있었지요. 제가 간곳은 병원이었습니다. 그 때 알게 되었지요. 배다른 동생이 당뇨병에 걸려서 눈을 잃고, 이제는 신장까지 나빠져서 이식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을요. 아버지는 저에게 말씀하시더군요. "참으로 불쌍한 아이다. 네 동생은난 너무 늙어서 이식수술을 못해준단다. 형제면 몰라도, 부모는 안 된다더구나."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으로 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이 멀다하고 아버지는 저에게 전화를 합니다. 전 어쩌면 좋을까요.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하게 살려는 사람의 인생이 거듭하여 나락으로 내쳐지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드물지 않게 보곤 합니다. 여러분도 동의하시는 일이겠지만, 특별히 모질지 못하고 착하기만 하고 순진하기만 한 사람들에게 주로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목회 현장에서 저도 그런 분들을 가끔 만납니다. 그런 상황을 마주하고 나면 답답해서, ", 좀 모질게 살지 못합니까? , 그렇게 번번히 당하고만 삽니까?"라고 말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네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헛소리를 하고 있구나"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신은 죽었다"거나, "이 세상에서 신이 철수했다"고 말합니다.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입니까? 그냥 운명에 맡기고 되는대로 살아 보겠습니까? 무당이나 점술가들에게 운명을 맡기겠습니까? 아니면, 집에 보안장치를 설치하듯, 돈의 힘으로 운명의 장난을 막아 보겠습니까? 마치, 언제 어디에서 자살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바그다드처럼, 우연과 재수와 팔자가 교차하면서 예상할 수 없는 사건이 예상할 수 없는 시간에 터지곤 하는 이 인생의 도시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3.

 

오늘부터 저는 다시금 요한복음의 본문으로 돌아가 연속설교 '생명의 복음'을 지속합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얼른 보면 간단해 보이지만, 실은 아주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의 영적 생활에 대해 매우 중요한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의 큰 그림을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소유하시고 경작하시는 포도원이 있습니다. 이 포도원의 주인은 아주 특별한,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포도 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포도나무는 한 없이 가지를 뻗어내는 신기한 나무입니다. 보통 포도원에는 포도 나무를 여러 그루 심어놓지만, 하나님의 포도원에는 오직 하나의 포도나무만 있습니다. 그 포도나무로부터 동서남북으로 줄기가 뻗어, 온 포도원을 덮고 있습니다. 주인 농부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인해 철이 되면 포도나무 가지마다 탐스러운 포도열매를 맺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이 비유를 자세히 살피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묵상해 볼 것입니다. 이 비유의 그림을 머리 속에 두고 묵상할 때, 첫 번째로 떠오른 생각이 이런 것입니다. "그렇지! 나는 하나님의 포도원에 살고 있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겨졌다는 뜻입니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야산이나 들판에 심겨져 있던 포도나무입니다.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재수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좋은 토양에 심겨지면 잘 자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하지만 가꾸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해를 거듭할수록 열매는 부실해져 갑니다. 반면, 좋지 않은 토양에 심겨지면 아무리 애써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게다가 짐승들이 많이 사는 곳에 심겨지면, 열매도 맺기 전에 짓밟히기 일쑤입니다. 한 번 짓밟히면, 다시 희망을 추스르고 일어나는 데 꼬박 일년이 걸립니다. 그것도, 그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가물거나 홍수가 나면, 또 다시 열매 없이 1년을 지나야 합니다.

 

야산이나 들판에 심겨져 있는 포도나무는 이렇듯 우연과 재수와 운명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애쓰고 힘 써 보지만, 그것으로 변화될 것은 별로 없습니다. 어떤 토양에 심겨졌느냐가 중요합니다. 기후가 어떠냐도 중요합니다. 주변에 어떤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지도 중요합니다. 그 지역에 어떤 짐승들이 살고 있는지도 중요합니다. 이 포도나무는 환경과 조건에 속수무책입니다. 악조건에 있는 포도나무는 아무리 헤어나려 해도 되지 않습니다. 반면, 좋은 조건에 심겨진 포도나무는 별 노력을 하지 않아도 금새라도 꿈틀거릴 것 같은 줄기를 자랑하고, 가지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튼실한 열매를 맺습니다. 참 불공평하기 짝이 없지만, 그것이 현실입니다.

 

4.

 

이것이 전부라면 희망은 없어 보입니다. 그냥 팔자 소관이라고 믿고, 혹은 운명에 맡기고, 하루살이처럼 그냥 주어진 시간을 즐기는 것밖에 다른 대안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주신 비유에 의하면, 야산과 벌판을 돌아다니시며 버려진 포도나무들을 찾으시는 아주 좋은 농부가 계십니다. 그분은 좋은 대지에다가 포도원을 만들어 놓고, 그 테두리에 든든한 울타리를 지어 놓으셨습니다. 그 포도원에, 세상에 둘도 없는 포도나무를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부지런히 돌아다니시며 야생 포도나무를 찾으십니다. 수풀 속에 파뭍혀, 포도나무이면서도 앵두만도 못한 열매를 달고 있는 나무를 찾아내시고, 그 가지 하나를 싹뚝 잘라 들고 오십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포도원에 있는 그 신기한 포도나무에 접목시킵니다. 그러면 그 가지는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겨진 그 참 포도나무의 뿌리로부터 줄기로 전달된 수분과 양분을 받아 무럭 무럭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농부는 또 다른 포도나무를 찾아 나가십니다. 세상에 흩어져 있는 포도나무들을 다 찾아 옮겨심기까지, 그분은 쉬지 않고 이 일을 계속하십니다.

 

그 좋은 농부는 접목된 가지가 탐스러운 열매를 맺도록 모든 정성을 아끼지 않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물을 줍니다. 접목된 곳을 정성스럽게 싸매 주고, 그 신기한 포도나무 줄기와 하나가 되도록 모든 노력을 하십니다. 얼마 지나 가지로부터 싹이 나오면 이 농부는 신이 납니다.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가지가 병들지 않도록 잘 보호합니다. 그 가지에서 또 다른 가지를 뻗어내고, 열매를 맺기까지 잘 돌보십니다. 그 농부는 장차 더 좋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 때로는 전지 가위로 곁가지를 잘라 내기도 하고, 부실한 포도송이를 떼어 내기도 합니다. 그 농부는 이미 다년간의 경험을 통하여 그 포도나무 가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압니다. 그는 먼 훗날을 내다 보면서 지금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합니다.

 

희망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야산이나 들판에 심겨져 환경으로부터 오는 혹독한 시련들을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은, 우리를 찾아내어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접목시키시는 경험 많고 사랑 깊은 농부가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그분에게 발견되어 참 포도나무에 접목되었다면, 그 사람은 이제 안전지대에 들어선 것입니다. 참 포도나무에 접목되어 시절을 좇아 탐스러운 열매를 맺고 있다면, 그 사람은 참된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겨진 것, 그것보다 더 큰 희망의 이유는 없으며, 그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야산에 심겨졌으나 요행히 좋은 환경에 처하여 시절마다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 포도나무는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지금 좋다고 해서 언제나 좋은 것이 아닙니다. 정말 좋은 것은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겨져, 좋은 뿌리로부터 영양을 공급받고, 경험 많고 사랑 깊은 주인으로부터 돌봄을 받는 일입니다. 혹은, 앞에서 말한 그 여인처럼, 좋지 않은 환경에 처하여 모진 고난을 거듭 당해야 하는 포도나무가 있다면, 하나님을 찾을 일입니다. 포도나무와 우리 인간이 다른 점은, 포도나무는 농부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릴 방법이 없지만, 우리는 좋으신 농부 하나님을 향해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의 정원에 심겨진다면, 지금 당장은 환난을 당하더라도, 결국은 경험 많고 사랑 깊은 농부의 손에 의해 바로잡힐 것입니다.

 

5.

 

이 대목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분이 계실 줄 압니다. 그분들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아니, 내가 예수를 믿은 지 벌써 몇년인데요? 목사님의 말씀이 맞다면, 저는 지금쯤 그 신기한 예수 포도나무에 든든히 접목되고, 선한 농부이신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아, 시절을 따라 좋은 열매를 맺으며 살만 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믿기 전이나 믿은 후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에게 더 깊이 접목되기 위해 힘쓰고 애쓰지만,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삶은 더 곤고해져 가고, 감당하기 힘든 일은 자꾸만 터지고! 이제는 더 버틸 기력이 없습니다. 제가 예수라는 신기한 포도나무에 접목된 것이 맞나요? 경험 많고 사랑 깊은 농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있는 것이 맞나요? 제가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겼다는 게 사실인가요?"

 

이 말에 공감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사정이 다 다르므로, 한 마디로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그런 대답을 줄 자격이 제게는 없습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도록 만든 그 상황에 아픔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여러분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겨졌다는 사실, 여러분의 존재가 예수라는 신기한 포도나무의 줄기에 접목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마시기를 기도합니다.

 

제게는 농사에 대한 경험이 매우 부족합니다만, 접목된 가지가 대목과 완전히 하나가 되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과정을 직접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 가지가 자라서 달콤한 결실을 맺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 접목된 가지는 마치 죽은 것같을 정도로 말라가다가 다시 소생합니다. 어렵사리 안착하여 곁가지를 낼 때, 경험 많은 농부는 그 가지를 싹뚝 잘라 버립니다. 접목된 가지를 튼튼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가지에서 열매를 맺을 즈음이 되면, 경험 많은 농부는 그 열매 조차도 떼어 버립니다. 어릴 때, 저의 눈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두고 두고 좋은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한 지혜로운 행동임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이 모든 경험을 통해 저는,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겨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당연히, 즉시로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겨진 이후에도 당해야 할 아픔과 환난이 있음을 압니다. 때로는 옮겨지기 전보다 더 큰, 더 심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옮겨지기 전에 당하던 환난은 이유 없이 겪어야 했던 억울한 환난이 많았으나, 옮겨진 이후에 당하는 환난에는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다 알 수 없으나, 나중에는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6.

 

하나님의 정원에 심겨진 이후에도 하나님이 의도하시지 않은 환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웨인 제이콥슨(Wayne Jacobson)In My Father's Vineyard 라는 책에서 자신의 부친이 경작하던 포도원에서 경험한 일들을 이야기하는 중에 '농부의 뒷처리'에 대해 말합니다. 때로 부친은 일꾼들을 사서 포도원 일을 시키는데, 일꾼들은 포도나무에 대한 사랑 없이 눈가림으로 일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에 일을 끝내고 보면, 자르지 말아야 할 가지가 잘라져 있고, 줄기가 꺾여 있고,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포도송이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부친은 언제나, 일꾼들을 다 보내고 나서 뒷손질을 했다고 합니다. 이랑을 하나씩 일일이 점검하면서, 꺾어진 줄기를 바로 잡아 주고, 잘려나간 좋은 가지를 다시 줄기에 붙여주고, 떨어진 열매를 주어 담았다고 합니다.

 

좋은 농부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최선의 방책을 마련합니다만, 그런 일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 농부의 일꾼으로 나선 사람들이 부주의하고 무책임하게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민 교회들을 돌아 보십시오. 그런 일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선한 농부이신 하나님의 마음을 살펴 포도나무 가지 하나 하나를 돌보는 일에 정성을 다하도록 세움받은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들이, 오히려 반대의 일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목회자로서 정신 바짝 차리고 매사에 세심하게 전심을 다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이 포도원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일꾼들은 결국 다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다 가고 나면, 하나님께서 직접 상처를 싸매 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며, 세워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사랑과 연민과 안타까움을 가지고 포도원 이랑 사이를 천천히 걸으시면서, 단 하나의 가지도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으시고, 세심하게 살피시고, 사랑의 손길로 바로 잡으십니다. 그분을 믿고, 우리는 다만 더욱 든든히 예수라는 신기한 가지에 붙어 있어서, 그분으로부터 오는 수분과 양분을 끌어 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상황을 보지 마시고 진실을 보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겨져 있다는 진실, 우리가 예수라는 신기한 포도나무에 접목되었다는 진실, 우리가 경험 많고 사랑 깊은 농부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있다는 진실을 보십시다. 그 진실을 믿으시고 흔들리지 마십시다. 지금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눈물 골짜기를 지나가고 계신다 해도, 이 진실을 믿고 견디십시다. 지금은 도저히 하나님의 포도원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예수라는 나무에서 분리되어 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희망을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포도원 바깥에서 지금 막 잘 나가고 있는 사람들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큰 희망이 있습니다.

 

7.

 

서두에 소개했던 그 기구한 여인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분이 제게 와서 상담을 청한다면, 뭐라고 해야 할까요? 동생에게 신장을 주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결정해야 하는 일입니다. 제가 그 입장이라면 어찌해야 할까,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닙니다.

 

다만,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잊고 살만할 때가 되면 또 다른 방향에서, 또 다른 모습으로 삶을 흔들어 놓고 마음을 찢어 놓는 그의 모진 운명을 두고서는, 함께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분이 믿지 않는 분이라면, 하나님의 포도원 안으로 들어와 보지 않겠느냐고, 예수라는 참 포도나무에 접목되어 보지 않겠느냐고 권면하겠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딸을 이용하기만 하려는 아버지를 바꿀 수 없을지 모르지만, 지금까지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받을 수 있고, 새로운 활력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우리가 무고하게 당하는 시련까지도 마침내 섬세한 손길로 만져주시고 고쳐주시고 바로잡아 주시는 참된 농부의 손에 자신을 맡겨 보라고 청하고 싶습니다.

 

만일, 그분이 어릴 때부터 나름대로 예수님을 믿어 온,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긴, 예수라는 포도나무에 접붙임 받은, 그런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기도하며 교제하면서 그 과정을 이겨내도록 돕고 싶습니다. 지금은 비록 이 모든 '이유없는 폭행'들을 이해할 수 없지만, 경험 많고 사랑 깊은 농부 하나님의 보살핌 안에 있으면, 그리고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든든히 붙어 있으면, 결국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정리하시고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임을 믿고 인내하도록 권면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좋아하는 도종환 시인의 '담쟁이'라는 시를 적어 드릴 것입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 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어떻게 그 약한 담쟁이가 절망의 회색 벽을 푸르게 다 덮고, 결국 그 벽을 넘을 수 있읍니까? 스스로의 의지로, 악으로, 깡으로 그리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대지에 깊이 몸을 담그고 수분과 양분을 빨아 올리는 뿌리와 줄기에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그 모습이 필사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담쟁이는 필사적인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옥한 토양에 뿌리를 두고 수분과 양분을 빨아 올리는 줄기에 든든히 연결되어 있기만 하면, 아무리 거칠고 메마른 벽에 붙어, 불어오는 비바람에 치이고, 따가운 햇볕에 고통을 당한다 해도, 결국 그 절망의 벽을 푸르게 뒤덥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원에 심겼음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 포도나무에 접목되어 있음을, 경험많고 사랑많은 농부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있음을 늘 기억하십시다. 그것을 기억하고 그 믿음대로 살아간다면, 어느 새 우리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뀔 것이며, 눈물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고, 한숨이 찬송으로 바뀔 것입니다. 제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고 인내하며 힘써 볼 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사랑하는 성도님들 모두에게 함께 하기를 마음 깊이 기원합니다.

 

주님,

황량한 벌판에서 저희를 찾아주시고 꺼내 주시어

주님의 포도원에 옮기시고

참 포도나무에 접목시켜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때때로

경험 많고 사랑 많으신 농부 하나님의 보살핌 아래 살고 있다는 사실이

의심될 때가 있습니다.

참 포도나무에 접붙임 받은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주님,

저희를 붙들어 주소서.

이 진실을 잊지 않게 하시고

믿음으로써 이 진실을 매일 경험하고 살게 하소서.

 

주님,

아직 주님께 발견되지 않은,

아직 하나님의 포도원에 옮겨 심어지지 않은,

참 포도나무에 접목되지 않은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그들을 찾아 주소서.

그들을 옮겨 주소서.

그들을 접목시켜 주소서.

주님의 포도원에 심겨져

주님의 능력에 힘 입어 살아가도록

복을 허락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