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지금은 갈 수 없다" (요한복음 13:31-38 18:15-18, 25-27)

새벽지기1 2016. 8. 18. 07:58

 

1.

 

오늘은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베드로로 말하자면, 유다보다 나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2천 년 전,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예수님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나눌 때, 그는 유다만큼이나 심각한 잘못을 범할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예수님과 유다 사이에, 당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오고 간 후, 유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베드로는 유다가 예수님을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팔아넘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뭔가, 그들이 모르는 계획이 마련되어 있고, 유다가 예수님의 명을 받고 그 일을 하러 갔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전과 달리, 유다가 허둥대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기는 했으나, 그리 크게 의심할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다가 방을 나간 후, 예수님은 유다가 사라져 간 쪽을 향해 눈길을 두고는, 남은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께서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몸소 인자를 영광되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렇게 하실 것이다.(31-32)

 

베드로는, 이 말씀을 듣고서야, 유다가 무엇을 하러 갔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의 귀에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 곧 그분이 로마 정부를 뒤엎고 영광스러운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것이라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는 말씀은 "이제 하나님께서 나를 왕의 보좌에 앉혀 주실 것이다"라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암호 같은 말을 주고받다가 어둠 속으로 황급히 사라진 유다는 바로 이 거사를 준비하러 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베드로는 멀미할 때와 비슷한 마음의 울렁거림을 느낍니다.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그의 마음을 뒤흔듭니다. '드디어 여명이 밝아 오는구나! 드디어 하나님께서 행동을 시작하셨구나! 마침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의 간절한 기도와 호소를 들어 주시는구나! , 침묵하는 것 같은 하나님을 끝까지 붙들고 씨름한 보람이 있구나. ,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인 줄, 제가 진작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제 믿음이 옳았군요. 역시 하나님은 저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는군요.’

 

2.

 

베드로도 민족 해방의 꿈을 품고 살기는 유다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가룟 유다는 하나님이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그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이고, 베드로는 민중보다는 하나님께 더 큰 희망을 두었습니다. 집결된 민중의 힘이 얼마나 큰 지야, 베드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잘 조직되고 잘 무장되었다 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결국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설사 성공한다 하더라도, 민중 혁명은 또 다른 독재자를 배출시키고, 그 독재자 밑에서 민중은 다시금 고통당하리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목적으로 보면, 가룟 유다나 베드로나 다를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다만, 그 목적을 이루는 방법에 있어서 입장 차이가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민중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의지했다고 해서, 그를 가룟 유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무슨 목적을 위해서든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만 있으면 그 사람이 잘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잘 믿는 나라가 있다고 하십시다. 그 나라의 지도자들이 옆에 있는 나라를 공격하기로 작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칩시다. 이 경우, 하나님을 믿고 있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모든 계획이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한 신앙은 오히려 가증스러운, 혹은 혐오스러운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목표로 두고, 하나님께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 목표를 이루어 가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베드로도, 가룟 유다처럼, 목표에 있어서 빗나가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민족 해방이라는 목표가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목표 자체는 좋은 것일 수 있으나, 예수님이 추구한 목표와 상관이 없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만, 베드로가 유다와 달랐던 점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의 힘에 의지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그 차이는 실제로 무의미합니다. 베드로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면, 좀 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리고, 그가 지향하고 있는 목표가 과연 옳은 것인지를 따져 보아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그는 예수님이 지향하는 목표를 향해 자신의 진로를 수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던 열망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 열망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 했다 할 수 있습니다.

 

3.

 

다시, 그 때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드디어 민족 해방의 때가 왔다는 기쁨에 심장이 터질듯 했지만, 베드로의 마음의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섭섭함과 시기심이 합하여 불같이 타오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중요한 순간을 위해 자신이 아니라 유다를 택해 준비시켰다는 것이 섭섭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일인데,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제쳐 놓고 유다를 택해 거사를 도모하시다니! , 유다에게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배신감과 시기심을 느꼈습니다. ‘유다, 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나를 제쳤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갑자기 풍랑 만난 갈릴리 호수처럼 요동쳤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감정으로 마음이 혼란할 때, 예수님은 또 다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번에는 제자들을 둘러보시면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33)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이란 말입니까? 가룟 유다를 당신 앞에 먼저 보내 놓고서, 나머지 열 한 제자들은 그곳에 갈 수 없다니! 그러면 이제까지 따라다닌 다른 제자들은 들러리였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다른 제자들이 그곳에 갈 수 없다는 말입니까? 그들의 자격이 부족하다는 말입니까? 용기가 부족하다는 뜻입니까? 물론,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로마 군인들에게 그들이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두 말이 필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전쟁의 승패가 어디 무기와 전술에 의해서만 결정되던가요? 더 많은 경우, 사기(morale), 신념이, 태도가, 결의가 더 중요하지 않던가요? 그들의 무기는 초라하고 전투 기술은 부족하지만, 그들의 사기는 높고, 신념은 돌처럼 강했으며, 생명을 바칠 결의와 태도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직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베드로는 적잖이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섭섭함도 컸습니다. 그래서 따져 여쭙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36). 도대체 어디로 가시는데, 우리보고 올 수 없다고 하시는 겁니까?

 

그랬더니 주님은 베드로를 똑바로 쳐다보시고는,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36) 라고 대답하십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는, 누구보다도 주님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뱃사람으로서, 오랜 세월 동안 거센 파도와 비바람을 거쳐 연단된 사람입니다. 그의 히브리 이름은 시몬’(Simon)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강인함을 보시고는, 히브리말로 바위라는 뜻의 게바’(Cephas)라는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베드로’(Peter)라는 이름은 게바라는 히브리식 이름을 헬라 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헬라말도 역시 바위를 뜻했습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돌쇠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영어로 하자면 Rocky가 될 것입니다.

 

강인함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지기 싫었던 그에게, 주님은, "베드로, 지금의 자네로서는 내가 가는 곳에 갈 수 없네. 하지만 나중에 자네는 그곳에 올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니 기다리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화를 터뜨리면서,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37)라고 대답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윽한 눈빛으로 베드로를 바라보십니다. 그 순간, 베드로의 눈에서 끓고 있던 분노의 불꽃들이 그분의 깊은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갑작스럽게, 베드로는 그분 앞에서 무장 해제된 듯, 얼어붙고 맙니다. 그렇게 서 있는 베드로에게 그분은,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8)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마치 쇠방망이로 그의 정수리를 내려치듯, 베드로를 무너뜨립니다. 그의 자존심과 만용과 교만과 분노가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버립니다. 베드로는 아무 말도,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었습니다.

 

4.

 

이 때로부터 베드로는 근심과 수심에 잠긴 채, 다락방 한쪽 구석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웅크리고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분은, 마치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유언을 남기듯, 비장하고도 무게 있는 말씀들을 계속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귀에는 하나도 접수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그 불길한 예언 때문에 마음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다 마치신 예수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십니다. 제자들은 일제히 명령이라도 받은 듯 그분의 뒤를 따라 걸어갑니다.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으나, 그것을 묻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동안 하신 말씀과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이제 뭔가 큰 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은 다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민족 해방을 위한 거사였으면 좋으련만, 예수님의 말씀과 태도로 보아서는 그럴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그렇다면 뭘까?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시는 것일까?

 

마침내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가곤 하셨던 감람산의 한 자락에 도착하여 발을 멈추십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따로 두시고 홀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정말, 뭔가 심각한 것이 오고 있음에 분명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중무장한 군사들이 그들에게 들이닥칩니다. 제자들은 민첩하게 예수님을 둘러싸고 방어 자세를 취하지만, 어둠 속에서 드러나는 군사들의 위용에 질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납니다. 그러는 사이에 가룟 유다가 나타나 예수님에게 다가가 입을 맞춥니다. 그것이 신호였던지, 군사들은 일제히 예수님을 덮쳐 포박합니다. 군사들의 주의가 예수님에게 집중된 사이, 베드로와 동료들은 모두 달아나 버립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의 법정으로 끌고 갑니다. 잠시 몸을 피했던 베드로와 요한은 용기를 내어, 몰래 대제사장의 법정으로 잠입해 들어가, 예수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봅니다. 딱히 어쩔 계획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숨어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예언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법정에서 진행되는 일들을 보면서, 베드로는 무척 혼란스러워 합니다. 이제 희망은 없어 보였습니다. 대세는 이미 기울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정했고, 이제 로마 총독의 재가만을 얻으면 되었습니다. 진리와 정의를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이권을 위해 변신하는데 빨랐던 로마 총독 빌라도는 유대인 지도자들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 뻔해 보였습니다. 이제 곧 주님은 로마 군인들의 손에 넘겨져 가혹한 고문을 받고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며칠 전, 다락방에서, 유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마자, "이제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31)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오판하여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결국, 주님은 이렇게 무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 무리들의 모든 기대와 꿈을 물거품으로 만들 것입니까? 아니면, 이제 곧, 갈릴리에서 보여 주었던 그 위대한 능력을 발휘하여 떨치고 일어나 상황을 역전시킬 것입니까?

 

도대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답이 나오지 않으니, 베드로도 어떤 태도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 생명을 걸만한 희미한 실마리라도 있으면 했습니다만,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되지 않는 질문들과 씨름하는 동안, 대제사장의 여종이 그를 알아보고 정체를 폭 로합니다. 입장이 정리되기 전에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으니, 당황스러웠습니다. 베드로는 엉겁결에 자신이 예수님의 일행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맙니다.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두 번이나 더, 자신의 정체를 부인합니다. 세 번째로 부인 했을 때, 문득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의 뇌리를 스칩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38). 아뿔싸! 그분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순간, 그는 법정 바깥으로 뛰쳐나와 어둠 속에서 목 놓아 웁니다.

 

5.

 

이것이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혈기 왕성하고, 고집 세고, 욕심 많고, 나서기 좋아하며, 누구에게도 뒤지기를 싫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혈기 왕성한 것을 그는 열정적이라고 미화했고, 제 고집을 주관이라고 이름 지었고, 욕심을 열심이라고 속였으며, 나서는 것을 헌신이라고 여겼고, 경쟁심을 충성심이라고 미화시켰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기 전의 그 모습 그대로 그분을 따라 다녔고, 그 이전에 품었던 욕망과 야심을 그대로 품고 그분을 섬겼습니다. 베드로는, 열심의 정도가 믿음의 정도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빗나간 종교적 열심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 모두가 아는 바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지금은 네가 나를 따라올 수 없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의 열심이 부족해서도 아니었고, 그의 용기가 부족해서도 아니었으며, 그에게 군사 훈련이 부족해서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베드로가 아직 완전히 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그는 예수님과 다 른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 군대를 몰아내고 이스라엘 왕국을 세운 다음 그 나라의 왕으로 올라서는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그 길로 가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랑하고 섬기시다가, 마지막 순간까지 섬기고 사랑하시다가 죽는 것을 영광이라고 여기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섬겨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의 길을 가는 것이 진정한 영광이라고 여기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경쟁에서 이기고, 많은 사람들 위에 올라서 섬김을 받는 것을 영광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그것을 수치로 여기셨습니다. 그분은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사용해 더 많은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정반대 편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열심이 강한들, 정반대로 걸어가는 사람을 어떻게 따라갈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베드로는 두 갈래 길 앞에 서서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길에서 그대로 앞으로 진행해 나가든지, 아니면 예수님이 서 계신 편으로 옮겨가 정반대로 방향을 바꾸든지,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가룟 유다도 이와 똑 같은 갈림길 앞에 서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유다는 자신의 길을 끝까지 고집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강골의 기질을 발휘하여 자결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그 의지와 결의는 대단합니다만, 잘못된 선택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음 이지 결코 용기가 아닙니다. 반면,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와 함께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고는, 바깥 어두운 곳으로 나가 통곡하며 깨졌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자존심마저도 이 때 다 깨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깨어졌을 때,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를 찾아 주셔서 당신이 선 곳으로 옮겨 주셨고, 그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셔서 그 길을 걸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중에는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나중은 바로 이 때를 두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야 비로소, 베드로는 예수님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품고, 예수님의 길을 자신의 길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영광을 누려 볼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그도 주님처럼,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을 섬기고 사랑하여 하나님에게 눈 뜨도록 돕는 것에 인생을 바쳤습니다. 그 선택으로 인해 베드로는 주님처럼 고난과 박해와 헐벗음과 투옥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영광이었습니다. 이 말이 황당하게 들려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 자신도,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실 때 황당하게 느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새계명을 따라, 다른 사람을 위해 낮아지고 섬기며 희생하는 길에 들어서서야 베드로는 참된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경험했고, 자신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계속 걸어 나갈 때, 영원한 생명에 이른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 대제사장의 법정 밖에서 비참하게 깨어졌던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요!

 

6.

 

이제, 우리 모두에게 질문 하나를 던지면서 베드로의 이야기를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어떻든 예수님을 따르려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니, 이 자리에 계시겠지요? 여러분의 믿음의 정도가 어떻든지 상관없이, 오늘, 저는 우리 각자, 자기 자신에게 진지하게 이 질문을 던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질문은 이겁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이 가신 길을 걸을 수 있으며, 그분이 계신 곳에 갈 수 있는가?"

 

오늘의 베드로의 이야기를 비추어 생각해 봅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만일 예수님을 따르는 중에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며 깨어져 본적이 없다면, 그 누구도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걸을 수도 없고, 그분이 계신 곳에 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은 잘 걷고 있는 것 같아 보여도, 그동안 붙들고 살아온 자신에 대한 헛된 믿음이 깨어지지 않으면, 머지않아 베드로처럼 그분을 부인하든지, 유다처럼 그분을 배반하든지, 다른 제자들처럼 그분을 떠나버릴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 앞에서 산산이 깨어져, 스스로에게 절망하고,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여, 그분의 은혜로써 회복된 사람만이 그분의 길을 갈 수 있고, 그분이 계신 곳에 이를 수 있습니다. ‘깨어짐의 은혜(grace of being broken)가 필요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고(walking on the way of Jesus) 예수님이 계신 곳에 이르는 것(reaching where Jesus IS)?그것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라면, 이 질문을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질문에 우리의 영원이 걸려 있다면, 이 질문에 우리 인생의 참된 성패가 걸려 있다면, 일생에 한 두 번은 이 질문을 부여잡고 밤을 새우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지금까지의 내가 완전히 해체되고, 성령의 은혜로 다시 회복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만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약해지는 것 같지만, 실은 진실로 강해지는 일입니다. 깨어지는 것이 자신을 잃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을 얻는 길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해 절망하는 것이 실은 자신에 대한 참된 희망을 얻는 길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뜨리시도록 두 손을 높이 들고 항복해 보심이 어떨지요? 이미 그렇게 깨어진 분이라 해도, 매일 다시금 두 손을 들고 주님의 깨뜨리시는 은총(grace of breaking)을 구하심이 어떨지요? 시큼털털한 포도 알갱이가 맛있는 포도주로 숙성되려면 먼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깨어지듯, 우리도 그렇게 깨어지고 또 깨어져, 하나님의 향기와 맛을 품은 참된 인간으로 숙성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것이 우리 인생의 참된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주님,

주님의 길을 가기 원합니다.

주님 계신 곳에 이르기 원합니다.

저희를 이끄소서.

저희를 깨뜨리시고 부숴 주소서.

주님 안에서 새로 지어지게 하셔서

주님이 걸으신 길을 걸어

주님 계신 곳에 이르게 하소서.

이곳에 사는 동안 영원의 맛과 향기를 풍기게 하시고

마침내 영원에 이르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