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교회 교우께서 쓰신 글 중에 교회에 관한 흥미로운 대목이 하나 있어서 여러분에게 읽어 드리려 합니다. 미국에는, 주말에만 열리는 Flea Market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옛날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장’ 같은 것입니다. 이 교우께서 Flea Market에 가셔서, 그곳에서 만난 어떤 한국분 주인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 들은 이야기를 적어 놓았습니다. 이 교우께서 그분에게, "주말에 일하시니 교회도 못나가시겠네요?"라고 물으셨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말씀 마세요. 교회는 당분간 안 나가기로 했습니다. 한 동안 물불 가리지 않고 열심히 다녔는데, 교회에서 싸움이 났지요. 싸움이 나면 나는 가만히 못 있는 성질이거든요. 말리려 뛰어든 것이 싸움에 휘말려 내가 싸우게 됐어요. 교회 사람들, 싸움 하니까, 사랑이고 용서고, 없어요. 보통 사람들보다 더 하다니까요. 결국은 마음에 상처만 입고, 내가 나쁜 놈이 되고 말았어요. 목사한테도 실망했고, 장로들은 어처구니 없고, 오래 믿었다는 사람들, 편견이 더 심해요. 교회가 뭐 별다른 곳인가요? Flea Market하고 비슷하지요. 주말만 문 열고 문전성시 이루는 것이 비슷하지요. 장로끼리 텃세하지요. 집안끼리 덤핑하지요. 안 가면 섭섭하고, 가면 실망하고. 어때요? 말이 좀 심했습니까? 그러고 보니, 나도 주말만 일하고 있으니, 목사 정도의 직업을 가진 사람 아닙니까?" (김응한, '하루를 이틀로 산다', 37쪽)
많은 이민교회의 실상을 해학적으로 꼬집은 말씀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그 해학에 무장 해제되어 ‘허, 허!’하고 웃고 말았지만, 마음 안에는 슬픔이 고였습니다. 어쩌다 교회가, 목회자가, 교회의 직분자가 이 지경으로 조롱을 당하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적(enemy)은 그리스도인 자신이며, 교회의 가장 큰 적은 교회 자신이라는 말은 실로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다움을 잃을 때, 그리스도인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교회가 교회 다움을 잃을 때, 교회는 스스로 붕괴되고 맙니다.
2.
오늘 우리 와싱톤한인교회는 55회 생일을 맞았습니다. 조국이 한국 전쟁으로 인해 위기에 처했을 때, 와싱톤 지역에 와 있던 유학생과 교민과 주재원들이 조국을 위해 함께 기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우리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1951년 10월 14일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와싱톤 부근에 약 100여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중 34명이 첫 예배에 참여했습니다. 그 이후, 교파를 초월하여, 이 지역에 있는 한인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력으로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화부한인교회’라고 했습니다.
처음 우리 교회의 이름이었던 ‘화부’라는 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와싱톤’을 한자로 ‘화성돈’(華盛頓)이라고 표기했는데, 여기서 첫 자를 따고, ‘부’(府)는 ‘도시’(city)를 뜻하는 한자입니다. 그러니 ‘화부한인교회’라는 말은 ‘ 와싱톤 시에 있는 한인교회’라는 뜻입니다. 그러다가 약 5년 후에 ‘와싱톤한인교회’로 이름을 바꿔서 오늘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 이름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아니, 와싱톤에 한인 교회가 너희 밖에 없냐? 와싱톤에 있는 한인교회는 다 너희 교회냐? 이름을 좀 바꿀 수 없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50년을 지켜온 우리 교회의 이름에는,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한인 이민자들을 위해 섬기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역사성이 담겨 있는 이름이라는 말씀입니다.
55세가 된 지금의 우리 교회는 Flea Market의 이미지를 말끔히 벗어났습니다. 가족끼리 덤핑하는 일도 볼 수 없고, 직분을 가졌다고 해서 세도를 부리는 일도 없습니다. 교회 직분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는 것’이라는 의식이 교우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습니다. 옷 자랑, 자동차 자랑, 자식 자랑, 돈 자랑하러 나오는 교인들도 없습니다. 그런 행동을 하다가는 멋적어서 꽁무니를 뺍니다. 바깥 사회에서는 아무리 대단하게 높임을 받더라도, 교회 안에서는 겸손히, 조용히, 이름 없는 소자로서 섬기는 풍토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 안에서도 과거에 Flea Market에서나 볼 수 있는, 볼꼴 사나운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했었습니다. 제가 그 현장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적인 증언을 할 수는 없지만, 교우들에게서 들은 ‘정사’와 ‘야사’를 종합해 보건대, 지금 다른 이민 교회들이 겪고 있는 내홍(inner conflicts)과 외홍(conflicts with outer parts)을 우리 교회도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 겪었음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그러한 내홍과 외홍을 겪으면서 공중분해 되거나 서서히 죽어간 교회도 많은데, 우리 교회는 그 모든 아픔과 고통을 양분으로 삼아 오늘의 모습을 이루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만, 그 과정에서 기도로, 시간으로, 물질로 헌신하며 교회를 지켜온 성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불행한 것은,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 교회가 얻은 몇 가지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바깥에서는 아직도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와싱톤한인교회는 배운 것이 많거나, 가진 것이 많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귀족 교회다"라는 소문이 그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다양한 성격의 교우들이 함께 어울려 섬기는 곳이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행동하는 것만으로 보아서는 그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그저 한 사람의 ‘성도’로서만 섬기는 풍토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와싱톤한인교회는 차가운 교회다"라는 소문도 지금까지 바깥에서 떠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소문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닙니다. 얼마 전, 새교우 환영 만찬을 했습니다. 순서 중, 새로 오신 분들이 소감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이, "따뜻하게 맞아준 것이 인상 깊었고, 교회 분위기가 매우 따뜻해서 좋았다"는 것이었습니다.
3.
이 모든 성장과 성숙과 변화는 자동적으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적지 않은 성도들이 자신의 대야와 수건을 꺼내어 기꺼이, 즐거이, 기쁨으로 헌신해 주신 까닭입니다. 저는 지난 다섯 주일 동안 이 문제에 대해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성경 전체 중에서 그토록 중요한 장입니다. ‘섬김의 삶’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인 됨에 있어서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섬기는 일이 없이는 교회가 교회다움을 이룰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관통하는 한 가지의 원리가 있었다면, 바로 섬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말씀들을 한 단어로 요약하라면, ‘섬김’이라는 단어가 제일 적당합니다. 교회가 문제를 겪고 있다면, 문제의 핵심은 바로 섬김의 문제일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하고 있다면, 그 회복의 중심에는 섬김의 회복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기독교는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말에서 보듯, 교회가 빈정거림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목회자가 하찮게 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장로니, 권사니, 집사니 하는 직분이 더 이상 이름값을 하지 못합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에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교회와 세상 사이에도 별로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반대로, 믿음 좋다는 신앙인이 더 이기적이고 고집 세고 악할 경우가 있고, 교회가 세상보다도 더 부조리할 경우도 있습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인다운 신자들도 많이 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그 빛이 가려집니다. 교회다운 교회가 참으로 많은데, 그렇지 않은 교회들 때문에 그 빛이 가려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목회자, 그리고 교회에 대한 기대와 믿음이 점점 낮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인들 자신입니다. 교회 자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회복하는 것, 교회가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것, 그것 밖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사귐’과 ‘섬김’에 있습니다.
‘사귐’과 ‘섬김’이 두 단어로 오늘까지의 여섯 번의 설교를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깊이 사귀는 삶, 그 영적 사귐을 통해 이웃과의 사귐을 넓혀가는 삶, 그리고 그 사귐 속에서 이웃의 필요를 위해 섬기는 삶?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바로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이 사귐과 섬김이 우리 각자의 삶에 그리고 우리 교회의 삶에 회복될 때, 교회가 당면한 위기는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우리의 삶에 진정한 보람과 기쁨이 들어찰 것이며,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왜 믿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며, 왜 교회가 필요한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변화가 없이 전도하는 것은 부질 없는 일입니다. 우리 속담에 "소문 듣고 왔다가 꼴 보고 도망간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 안에 사귐과 섬김을 회복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의 ‘꼴’을 보고 도망갈 것입니다. 교회의 꼴을 보고 등을 돌린 사람들을 다시 돌아서게 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 전도하기에 앞서 우리 자신의 꼴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우리를 보고서 믿고 싶어할 무엇이 우리 속에 있습니까?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서 나오고 싶게 할 무엇이 우리 안에 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을 심각히 해 보아야 합니다.
4.
설교자가 자신의 경험담을 나누는 것은 자칫하면 자랑이 되기 때문에 주저되는 일입니다만, 이와 관계된 제 경험이 있어서 나누려 합니다.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남동생 둘과 함께 대전에서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부엌이 딸린 방 하나를 얻어서 저와 고등학교 다니는 동생 그리고 중학교 다니는 동생이 함께 지냈습니다. 제가 엄마 노릇까지 하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한 번은, 한 울타리 안에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집에 방을 얻어 들어갔습니다. 보통 그런 집은 평안한 날이 별로 없습니다.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싸움이 일어납니다. 때로는 옆집이 서로 싸우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서 남학생 셋이 자취를 하러 들어갔습니다.
저희 형제는 어릴 적부터 우애가 좋았습니다. 때로 다투는 일이 없지는 않았지만, 큰 소리 내며 싸워 본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형은 형이어서 양보하고, 동생은 동생이어서 양보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우애 좋게 지내고 있습니다. 다 들 힘써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도 큰 이유였습니다.
그 집에 살 때, 바로 옆에 신혼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 놓고, 아침 늦게, 강의를 들으러 집을 나가는데, 옆집 색시가 따라 나오면서, "학생, 잠깐, 저 좀 보세요"라고 부릅니다. 돌아가서 "예, 무슨 일인가요?"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학생, 우리 남편 좀 전도해 줄 수 있겠어요?"라고 묻는 겁니다. 저는 놀라서 "아, 예, 왜 그러시지요?" 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니, 총각 셋이서 자취 생활을 하는데, 한 번도 소리 내어 싸우는 일도 없고, 일요일 아침마다 셋이서 즐겁게 대화하면서 교회에 가는 모습이 너무 부러워요. 저도 남편과 그렇게 싸우지 않고 살며, 남편과 함께 일요일 아침마다 즐겁게 교회에 다니면 참 좋겠어요. 나는 언제든 교회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으니, 우리 남편 좀 전도해 주세요."
당시, 저희 형제들의 신앙 수준이래야, 미천한 수준에 불과했습니다만, 우리의 우애와 생활 방식이 믿지 않는 이웃에게 이렇게 특별하게 보였다는 점에 기뻤고, 또 한 편으로는 겁도 났습니다. 안타깝게도, 저희가 그 집에서 이사 나올 때까지 그 남편을 교회까지 이끄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지금 돌아 보면, 제가 좀 더 적극적으로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나를 좀 전도해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을 전도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하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 저는 씨앗을 뿌린 것이고, 언젠가 다른 사람에 의해 수확되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어, 안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 새색씨가 저희 형제들을 보고 부러워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아주 초보적인 단계에 있었지만, 저희 형제들 사이에 있던 ‘사귐’과 ‘섬김’이었습니다. 신혼 부부였지만, 그들에게는 그런 사귐과 섬김이 없었습니다. 그 새색씨는 바로 그것을 경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남편과의 진정한 ‘사귐’ 그리고 그 사귐 속에서 나누는 진정한 ‘섬김’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새색씨는 교회 때문에, 저희의 믿음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분은 저희 형제를 보았지만, 저희를 통해 교회를 보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5.
저는 그 동안 주로 교회 안에서의 섬김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이로 인해 혹시, ‘교회 안에서만 봉사하면 다 되나?’라는 식으로 오해하실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가 말했듯,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사귐’과 ‘섬김’이 라이프 스타일(lifestyle)이 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즉, 교회 안에서만 봉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사회에서, 어느 때, 어느 곳에 있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목표입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함께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영성 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성 생활이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든지,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서 거하며, 그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웃을 섬기는 삶을 가리킵니다. ‘사귐’은 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source)이며, ‘섬김’은 그 삶의 목표이자 외적인 표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이 되어, 누구를 만나든,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거하며,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 생활입니다. 그것이 영성 생활의 본질이요 목표요 이상입니다.
바로 이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이 목표와 이상을 이루기 위해, 교회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와 성경 공부, 교회에서 나누는 사귐과 교회에서 행하는 봉사를 강조하는 이유는, 교회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아니고는 진정한 사귐과 섬김을 배우고 익힐만한 곳이 달리 없기 때문입니다. 실로, 이 세상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 깊은 영성의 뿌리에서 오는 거룩한 힘으로 이웃을 섬기기 위해 정성을 다하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원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이런 사람을 원하고 있으며, 직장마다 이런 사람들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모두 다 이익을 좇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소명을 따라, 정성을 다해 이웃을 섬기는 사람들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길러낼 수 있는 곳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희망이라는 겁니다.
저는 얼마 전 샘 해리스(Sam Harris)가 쓴 Letter to a Christian Nation이라는 책을 읽고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샘 해리스는 현대 세계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 종교에 있으며, 모든 종교를 없애는 것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해결책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기독교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점에 대해 딱히 반박할 말이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잘못된 종교는 차라리 없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 읽어드린 호세아서 8장의 말씀에서처럼, 타락한 제사장이 많아지면 세상은 더 악해지며, 타락한 교회가 많아지면 세상은 더욱 타락할 뿐 입니다. 결국, ‘종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아직도 세상의 희망입니다. 이 세상에서 간절히 보기를 원하는 참된 인간성을 회복시키고, 이 세상에서 절박하게 원하는 사귐과 섬김의 라이프 스타일을 가르치고 훈련시킬 수 있는 곳은 교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샘 해리스는 기독교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타락한 기독교가 문제입니다. 문제는 교회 자체가 아니라, 교회가 교회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해결책은 모든 교회를 이 땅에서 없애 버리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교회다워지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진정한 영적 사귐과 사랑의 사귐이 있는 교회, 진정으로 사랑의 종 노릇을 실천하는 교회,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르쳐 믿는 사람 하나 하나가 온전히 회복되도록 돕고, 그 회복된 힘으로 섬기는 법을 가르치는 교회, 그런 교회가 되는 것에 해결책이 있습니다.
6.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후, 남기신 마지막 말씀을 다시 한 번 들어 보십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35). 교회가 왜 필요합니까? 하나님과 사귀는 일이 없이는 우리의 인간성 회복은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과 사귀는 일이 없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이웃을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하나님과 사귀는 일이 없이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함께 모여 서로를 위해 ‘사랑의 종 노릇’을 연습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섬김을 라이프 스타일로 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없이는, 이 세상에 희망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교회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되지 않고는, 하나님이 우리 중에 살아 역사하고 계심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차릴 방법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진실이 이렇다면, 교회다운 교회를 일구는 일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요, 얼마나 약속 있는 일이요,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요! 진실이 이렇다면, 교회를 위한 우리의 헌신과 봉사가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요! 진실이 이러하다면, 와싱톤한인교회를 지금의 이 모습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리고 이 교회를 더욱 교회답게 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간절히 기대하고 계실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일을 위해 더 열심으로 헌신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더 많은 시간, 더 많은 노력, 더 많은 물질로 헌신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여러분의 그 헌신이 헛되지 않도록, 저도 다른 목회자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섬길 것입니다. 저는 기도할 때마다, "저의 분투가 의미 없는 몸부림이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는 청을 하나님께 반복합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헌신이 값진 것으로 남기를 원하실 줄 믿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함께 기도하며 함께 걸아 나가십시다.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셨습니다.
주님께서만 영광 받으소서.
찬양 받으소서.
주님께서 보기에 합당하도록
저희를 이끄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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