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3 주일 동안, 저는 섬기는 것, 봉사하는 것, 희생하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래, 이대로 있어서야 되나? 이제는 뭐라도 좀 하자"는 생각을 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반면에, 이 말씀을 듣고 마음에 부담을 가지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뭔가 해야 하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하지는 못하고, 그래서 일종의 죄책감(guilty feeling)마져 가지고 있는 분들도 계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예배를 마치고 나가시면서, "아무 것도 못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성도님도 계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제가 더 죄송했습니다. 제가 마치 여러분들에게 질 수 없는 짐, 지기 힘든 짐을 지워 드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대야와 수건을 꺼내어 이웃을 섬기라는 분부(command)은, 실은 저의 요청이 아니라 예수님의 요청입니다. 예수님의 이 요청이 질 수 없는 짐(unbearable burden), 지기 싫은 짐(unwanted burden)을 지우는 말씀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짓누르고 불행에 빠지게 하려고 이 명령을 주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짊어진 불필요한 짐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고, 참된 행복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번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 11:28-30)
이 말씀을 처음 들었던 유대인들은 율법의 짐(burden of laws) 아래에서 지쳐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만, 일점 일획도 빠짐 없이 다 지켜야만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는다는데,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편으로는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또 한 편으로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리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구원받을 수없다는 ‘절망감’이 그들의 영혼을 짓눌렀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같은 그들의 영적 피로감, 내면적 절망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내면은 과연 만족감과 기쁨과 생명력으로 충만합니까? 아니면, 무력감 (hopelessness)과 공허감(emptiness)과 무의미성(meaninglessness) 으로 인해 지쳐 있습니까? 과연 여러분은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는 초청에서 제외될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이 말씀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데?"라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 것 같습니다. 예컨대, 노후 연금(pension)도 매달 충분히 나오고, 자녀들이 모두 성공해서 잘 살고 있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상황에 대비해 ‘long-term care insurance’까지 든든하게 들어 놓아, 나중에 들어눕게 되어도 자식들 신세 지지 않을 만큼 되었고, 그래서 지금은 하고 싶은 일 다 해 가면서 복을 누리고 있는 분이라면, 예수님의 이 초청을 듣고, "어, 나는 아니네?"라고 생각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하십니까?
저는 성도님들로부터 "이건 아닌데!"라는 소리를 더 많이, 더 자주 듣습니다. 믿음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 분으로부터 저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높이 사회적으로 출세했고, 경제 사정도 그만하면 되었고, 가정도 원만하여, 생각할 때마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고 느끼는데, 그래도 문득문득 ‘이게 전부가 아닐텐데’라는 느낌이 엄습합니다"라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아무리 돌아 보아도 부족한 것이 없는데,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할 수 있는데, 남들 부러워 하는 것을 다 가졌는데, 가지고 싶은 것은 다 가지고 있고 또한 가질 수 있는데, 그래도 뭔가 비어 있다는 느낌이 드니, 이게 뭔가요?"라고 질문합니다.
하루 하루 생존하기조차 힘드신 분들은 이런 말에 위화감(sense that one does not belong)과 배신감(sense of betrayal)을 느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세월 좋은 소리를 하고 살다니, 복에 겨웠구나!" 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세상에 좋은 것은 다 들켜쥐고는, 그래도 뭘 더 가지려고 그러느냐?"며 화를 내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좌절감이 더 커질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 고백 속에 담겨 있는 신음 소리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 고백이 복에 겨워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참된 복을 얻지 못해서 내뱉는 신음 소리임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도, 지금 여러분에게도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동의하게 되실 것입니다. 복에 겨워 하는 말처럼 들리는 그들의 고백이 실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가리키고 있음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그렇게 깨닫고 나면, 여러분이 처해 있는 상황이 새롭게 보이고, 그것을 이길 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2.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좋고, 크고, 비싸고, 귀하고, 멋진 모든 것을 소유해도 만족되지 않는 것이 인간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그렇지 않다’ 고, 물질적인 만족으로 충분하다고, 끊임없이 우리를 세뇌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조금만 정직해져도 우리가 속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참된 해결책을 찾기 위해 두리번 거립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첫 걸음입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좋고, 크고, 비싸고, 귀하고, 멋진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장담합니다만, 그래 가지고는 결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 마음에는 하나님이 보일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여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오직, 이 세상에서 소유하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눈을 돌리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보입니다. 그런 만남만이 참된 신앙에 이르도록 합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만나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이웃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웃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섬김’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원래 ‘섬기다’(to serve, diakoneo in Greek)라는 말은 식탁에서 시중드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섬긴다’는 말은 이웃과 함께 있으면서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준다는 뜻입니다. 식탁에 앉은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시중드는 사람은 식탁에 앉은 사람이 원하는 것을 잘 알아서 채워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시중드는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많은 팁을 받기 위해서 그럽니까? 오늘날 식당에서는 당연히 그런 목적으로 섬기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부유한 가정에서 시중드는 노예를 생각하고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노예가 시중을 들면서 무슨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이처럼, 아무 대가 없이, 그져 상대방을 사랑하는 하나의 이유만으로, 그 사람 곁에 있어 주면서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섬김’입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만나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면 이웃이 새로 보이고 진실로 그 이웃을 위해 섬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자신을 가두고 있던 감옥에서 벗어나 이웃에게 손을 뻗치게 됩니다. 나와 내 가족만 있던 내 삶 속에 하나님과 이웃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나와 내 가족에게만 고정되어 있던 우리의 눈이 밖으로 향할 수 있게 됩니다. 안으로만 오그라들어 있던 손이 밖을 향해 펴지게 됩니다. 이렇게 변화할 때, 죽어있던 표정이 살아나고, 잃었던 미소가 되살아나고,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며, 생명력이 충만해집니다. 삶의 색깔이 바뀌고, 걸음 걸이가 달라지고, 목소리가 달라집니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뭐냐? 당신에게는 있는데 내게는 없는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3.
정신과 의사들이나 심리학자들이 쓴 글들을 읽어 보면, 현대인들이 겪는 정신 질환 중 많은 것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몰두’(obsession with self)에서 온다고 합니다. 어떤 정신과 의사는 "자살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해 있다는 증거다"라고 단언하기도 합니다. 현대인들의 자기 집착증(self-obsession), 자기 몰두증(self-indulgence), 자기 포로증(self-captivity)은 갈수록 더 심해져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울증이나 정서불안 같은 질병들이 점점 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정신 질환을 치료하는 약품의 소비가 기하급수적으로(geometrically) 늘어난다는 보고가 나와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우리 사회가,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행복한 것이라고, 어릴 적부터 사람들에게 주입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은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삶이 가장 위험하고 불행한 선택입니다.
저널리스트 앤나 퀸들런(Anna Qindlen)은 최근호의 '뉴스위크' 컬럼에서, 미국 사회의 병리 현상 중 하나가 지나친 자기 방어 본능 (self-defence mechanism)을 심어주는 일이라고 꼬집습니다. 예를 들면, 학교에 입학하여 여자 아이들이 처음으로 듣게 되는 강의 중 하나가 성폭행(sexual assault) 에 대한 예방 교육이라는 것입니다. 학교 어느 구석에서든 성폭행이 일어날 수 있고,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이면 누구든 성폭행범일 수 있음을 알고 조심하라고 교육합니다. 이 예방 교육을 통해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자기 방어 본능이며, 자기 보호 본능입니다. 이러한 교육은 어릴적부터 시작됩니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TV를 통해, 심지어 교회 학교를 통해서도 ‘자기 자신을 보호하라. 자신을 잃으면 다 잃는다’ 는 메시지가 지속적으로 주입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현대의 생활 환경은 점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게 만듭니다. 어릴 때부터 홀로 자라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둘 혹은 세 자녀를 둔 가정도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족은 다 각기 제 관심사에 따라 홀로 살아갑니다. 저녁을 먹기 바쁘게 모두 다 제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 앞에서 홀로만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도 없고, 다른 사람과 어울릴 줄도 모릅니다. 그것을 이익의 기회로 삼는 사업가들은 홀로 즐기는 일을 도와주는 각종 오락기를 만들어 내놓습니다. 며칠 전, 집 근처를 지나다 보니, 어떤 아이가 혼자 뒤뜰에서 축구 연습을 하는데, 축구 공에 긴 고무줄 같은 것이 붙어 있고, 그 줄을 허리에 묶고, 홀로 공차기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을 받아줄 사람도 필요 없고, 공을 주으러 갈 필요도 없으니, 참 편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이웃을 잃어가고 홀로 고립되어 살아 갑니다.
이같은 ‘나홀로 문화’(culture of self-entertainment)가 인간성을 향상시켜 주고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까? 대답은 NO!입니다. 오늘 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쌓아놓은 홀로만의 성 안에서 스스로를 즐겁게 하다가 시름시름 앓아 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율법의 짐에 눌려 신음하고 있었다면, 오늘 선진국에 사는 현대인들은 ‘자기 집착증’이라는 잘못된 가치관에 눌려 신음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줄 알고 선택한 자기 중심적인 생활 방식이 실은 가장 불행한 길로 인도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하고, 더 많은 것으로, 더 좋은 것으로, 더 비싼 것으로, 더 최신의 것으로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분투합니다.
4.
기독교 복음은 이같은 현대 상황에서 더욱 그 빛을 발합니다. 예수님 당시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예수님의 복음은 더 절실해졌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보다 현대인들이 자기의 감옥에 더 많이, 더 깊이, 더 철저하게 갇혀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이 가르치는 삶의 방식, 즉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사귀는 ‘영적 삶’과 이웃을 위해 섬기는 ‘봉사의 삶’ 은 우리를 이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 참된 행복과 만족과 기쁨으로 인도합니다.
1988년에 Psychology Today에 실린 앨런 룩스 (Allan Luks)의 글에는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 보도되어 있습니다. 앨런 룩스는 뉴욕에 본부를 둔 ‘Big Brothers Big Sisters’의 사무총장입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성인과 자라나는 청소년을 서로 맺어주어 멘토(mentor)의 역할을 하도록 돕는 기관이 Big Brothers Big Sisters입니다. 자라면서 롤 모델(role model)이 없었던 많은 청소년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하여 방향을 찾고 비전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 안에서 이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잘 성장하여 건강한 시민으로 일하고 있는 성인 2세와 자라나는 청소년을 일대일로 맺어 주어 멘토링(mentoring)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이 일로 한 번 섬겨볼 분이 있으면 나서 주시기 바랍니다. 아주 의미있는 사역이 될 것입니다.
앨런 룩스의 컬럼에 따르면, 어떤 기관에서, 정기적이고 지속적으로 봉사 활동을 하는 1,700명 이상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는데, 평균 78%의 응답자들이 봉사 활동을 하는 동안에 유사한 경험들을 했다고 응답했습니다. 그 ‘유사한 경험’이란 ‘마음이 평온해졌다’(calmness of mind),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었다’, ‘두통이나 다른 고통에서 놓임을 받았다’, ‘삶에 대한 의욕이 높아졌다’, ‘기분이 좋아지고 에너지가 강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과중한 업무에서 비롯된 목과 어깨의 긴장이 봉사 활동을 통해 사라졌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달리기 선수가 얼마 동안을 달린 후에 경험하게 되는 정신적인 고조 상태 즉 runner’s high와 유사하여, 앨런 룩스는 이 현상을 helper’s high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런 통계를 바탕으로 하여, 앨런 룩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봉사에 참여하도록 격려하고 유도하는 것은 헬스클럽 회원권을 선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선물이다."
혼동하지 마십시다. 분명히 하십시다. 봉사는, 사랑의 섬김은,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 나를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복에 감사하여 그 사랑을 나누려는 노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봉사로부터 혹은 섬김으로부터 아무런 대가도 바래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순수한 희생과 섬김의 삶 속에는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은 복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위에서 소개한 조사 연구를 통해 우리는, 우리 인간 존재가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도록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 이웃을 향해 손을 뻗치고 그들의 필요를 위해 귀 기우리고 섬기는 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 그러므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인간답고, 그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5.
오늘 읽어드린 요한복음 13장 34절에서 예수님은,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새 계명이 바로 새로운 멍에요 새로운 짐입니다. 그런데 그 멍에는 지고 다니기에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의 힘으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때때로 사랑하는 것이, 섬기는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그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일으켜 세워줍니다. 예수님의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벼운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사랑하도록, 섬기고 살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살 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짐은 짐인데 무겁지 않고, 멍에는 멍에인데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짐은 우리의 의지를 불러 일으켜 주고, 그 멍에는 우리의 몸에 힘을 불어줍니다.
첫 아이를 받아 안았을 때, 저는 제 어깨에 짐이 올려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짐은 저를 짓누르기보다는 신기한 힘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그래, 내가 네 아버지로 책임을 다해 보리라’는 결의가 생기더라는 말입니다. 군대에서 훈련 받을 때, 저는 완전 무장(fully armed)을 다 하고 연병장에 설 때마다, 제 어깨를 누르는 군장의 무게가 오히려 더 큰 힘을 제 몸에서 끌어올리는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2005년 6월, 와싱톤한인교회에 대한 파송이 확정된 후, 햄톤 콜로세움(Hampton Collosium)의 한 중간에 서서 기도할 때, 제 어깨를 누르는 짐을 느꼈습니다만, 그 짐은 저에게 새로운 용기와 힘을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어깨에 지워 주시는 짐과 멍에가 그렇습니다. 나의 대야와 수건을 꺼내어 다른 사람을 섬기라는 사랑의 계명은 결코 만만한 멍에가 아닙니다. 결코 만만히 볼 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멍에를 메고 그 짐을 멜 때, 우리 안에는 신비로운 의지와 힘이 솟아 오릅니다. 그것이 사랑의 기쁨이요, 섬기는 기쁨입니다. 바로 그것이,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helper’s high’의 원천입니다.
6.
마지막으로, 빌 하이벨즈(Bill Hybels) 목사님의 책에서 읽은 한 봉사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제 직업은 차입 거래를 통해 부도회사를 사고 파는 금융업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냉혈한 같은 모습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일요일이면 세 살배기 아이들로 가득찬 유아실에서 봉사를 합니다. 주일날 아이들을 가르치고, 가끔 똥오줌 묻은 기저귀를 가는 단순한 일을 하고 나면 주중에 수백만 달러가 오가는 아찔한 순간들을 다시 감당해 낼 수 있는 활력이 생깁니다. 아이들을 섬기면서 오히려 제 마음이 부드러워지기 때문이지요. ('섬김의 혁명', 75쪽)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왜, 삶이 이럴까? 뭐, 좀 신나는 것 없을까? 뭐, 좀 살 맛 나게 하는 것 없을까?’ 질문하며 찾고 계십니까? 해답은 여러분이 그동안 바라보며 추구하던 방향에 있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고개를 돌려서, 자랑할 만하지 않은 일, 돈 되지 않는 일, 자신의 체면에 손상될 것 같은 일들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나와 내 가족만을 보지 말고, 고개를 돌려 이웃을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대야와 수건을 꺼내어 봉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봉사하는 동안, 그 일의 거죽만 보지 말고, 그 일이 맺어줄 최종적인 열매를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어린 아이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그 작은 일이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귀한 열매로 자랄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초점을 잃지 않고 섬길 때, 우리는 전혀 상상하지도, 예상하지도 않은 곳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그대로 하면, 복이 있다"(요 13:17). 틀림없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13:35). 우리가 참으로 행복해지는 길, 우리가 다른 사람을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길, 그리고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께 속해 있음을 드러내는 길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복음을 제대로 사는 길이요, 복음을 가장 잘 전하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아,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께서 이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를 빕니다.
주님,
사랑의 비밀을,
섬김의 비밀을,
복된 삶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고
사모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진실로 복된 삶에 이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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