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대야와 수건"(2) (요한복음 13:12-17, 누가복음 10:38-42)

새벽지기1 2016. 7. 28. 07:49

 

1.

 

지난 주 중에 교회의 사무적인 일과 관계하여 어느 교우님과 전화 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지난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디 아프신 것 아닌가요? 주일에 뵙지 못했는데요. "하고 말씀 드렸더니, 그분이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제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주일 예배에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에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방문한 손님들 뒤치닥거리에 제 몸이 매우 피곤했는데, 또 주일 저녁에 저희 집에서 선교 후원회 모임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오면 그 모임을 위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았고, 저는 피곤하여 몸져 누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죄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이 예배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덧붙이시기를, "저는 늘 마리아의 몫을 택하고 싶은데, 지난 주말에는 어쩔 수 없이 마르다의 몫을 택하고 말았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의 몫’과 ‘마르다의 몫’이라? 이 표현은 성경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이 표현은 오늘 읽어드린 누가복음 10장38절로부터 42절에 이르는 이야기에서 나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분들에게는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 이야기의 내용은 잘 알고 있더라도, 그 의미에 대해서는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이야기를 성찰(reflect)하면서 ‘대야와 수건’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는 대야와 수건을 들고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2.

 

예수님과 그 일행이 하루는 베다니에 있는 친구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나사로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죽은지 나흘만에 예수님에 의해 살아난 바로 그 나사로입니다. 어떤 경위에서인지, 예수님과 나사로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고, 그 누이들 즉 마리아와 마르다도 역시 예수님과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마도 예수님과 이 남매들 사이에 우정이 시작되던 때에 일어난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옛날 우리 나라에서도 그랬지만,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손님을 환대하는 것(hospitality)을 가장 큰 덕목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명령을 따라서 손님을 극진히 환대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이 손님으로 가장하고(disguise) 자신들의 집을 방문할지도 모른다고 믿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낯선 나그네들을 극진히 대접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이 하나님의 천사였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같은 전통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예수님과 그 일행이 방문했을 때, 마르다가 분주히 움직이며 접대한 것은 그런 전통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집 한 편에서 무리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 마르다는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도와주어야 할 마리아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해서 찾아보니, 글쎄, 동생이 무리들 중에 끼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도 맨 앞 자리 앉아서! 마치, 예수님의 말씀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을 양으로 집중해서 듣고 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마르다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화도 났습니다. "아니, 이 많은 사람들을 대접하려면 얼마나 많은 손이 필요한지 모르나? 그런데 어떻게 그 일을 나에게만 맡겨두고, 자기 좋은 일에만 빠져 있단 말인가?"

 

동생에 대해 섭섭하고 화도 났지만, 또 마음 한 편에서는 홀로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마르다 자신에게도, 만사를 제쳐 두고 말씀의 감흥에 취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희생하고, 홀로 땀 흘려 봉사하고 있는 자신이 대견해 보였습니다. "이 일을 할 사람이 나 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은 한 편으로 분노를 일으켰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큰 자부심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래, 나 아니고는 너희들 모두 국물도 없다!"라는 생각이 마음에 들어찬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를 나타내고 싶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알아주시고 칭찬해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다가갔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한창 가르치는 일에 열중하고 계셨고, 무리들은 예수님의 입술에 붙들려 있습니다. 팽팽한 긴장감과 침묵이 좌중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르다가 사람들을 헤치고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갑작스러운 방해에 사람들이 모두 놀랍니다. 예수님도 하던 말씀을 멈추고, 무리들도 일제히 마르다를 쳐다봅니다. 그러자 이 때라는 듯, 마르다는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40절).

 

여러분, 이 상황에서 마르다가 꼭 이렇게 해야만 했을까요? 달리 할 방법은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살며시 마리아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찌르며, "얘, 나와서 나좀 도와줄래?"하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혹은, 멀리서 눈짓으로 불러내도 되었을 것입니다. 혹은, 쪽지를 써서 전달해도 되었을 것입니다. 정말 마르다가 마리아의 도움을 얻으려는 한 가지 목적으로 행동했다면, 이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 예수님을 직접 만나 요청합니다. 자신이 불러내도 되는 것을, 왜 굳이 예수님에게, "쟤 좀 보래요. 쟤 좀 혼내 주세요. "하는 식으로 일러바치느냐는 말입니다.

 

이 행동은 마르다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암시해 줍니다. 마르다는 지금 마리아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이 희생하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르다가 원했던 것은 도움의 손길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정이었고, 사람들의 칭찬이었습니다. 부엌에서 일하면서 잊혀지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제 곧 그들이 먹게 될 음식이 누구를 통해서 그리고 얼마나 큰 희생을 통해서 제공된 것인지를 알리고 싶어했습니다.

 

3.

 

그러자 예수님은 다정한 눈빛으로 마르다에게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41-42절).

 

"마르다야, 마르다야"하고 부른 것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마르다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셨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마르다를 혼내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움에서 바로잡아 주십니다. 무엇을 바로 잡아주십니까?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마리아가 택한 ‘좋은 몫’은 ‘말씀을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말씀을 듣지 않고 접대에 분주했던 마르다는 ‘좋지 않은 몫’을 택한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렇게 해석하고 보면,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 공부 반에 들어가고, 기도회에 참여하는 것은 ‘좋은 몫’이고, 주방에서 음식 준비하고, 주차장에서 주차 안내를 하고, 방송실에서 기계를 움직이는 것은 ‘좋지 않은 몫’이라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오해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바로 잡아 주시려는 것은 마르다의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며,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부엌 일을 중단하고 와서 말씀을 들으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한 가지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마르다가 잘못한 것은 말씀을 듣지 않고 음식 준비를 한 선택이 아닙니다. 만일 음식 준비를 하면서 전심을 다하고, 그 접대를 통해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에 만족하고, 물러서서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신 하나님께 감사했다면, 마르다는 예수님께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자신이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큰 일을 하고 있는지, 그것을 알리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이 분산되었습니다.

 

40절에 보면, 주목할만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분주하다’고 번역된 헬라 말은 ‘마음이 갈라졌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마음이 분산되었다는 뜻도 되지만, 마음의 동기에 있어서 분산되었다는 뜻도 됩니다. 즉, 손님 접대를 잘 해야 한다는 생각도 그 마음에 있었지만, 홀로 공을 세워 사람들로부터, 특히 예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고 싶은 생각도 그 마음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는 동생 마리아를 보았을 때, 자신의 공로를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그를 압도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앞뒤가리지 못하고 추태를 드러내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하고 싶었던 말씀은, "네가 무엇을 택하든지,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하나의 목적에만 몰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칭찬하신 이유는 그가 다른 것에 마음 팔리지 않고 오직 말씀을 배우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마르다가 부엌에서 오로지 손님들을 섬기는 그 목적만을 위해 전심으로 일하고 있었다고 칩시다. 반대로,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던 마리아가 언니를 생각하고는, 예수님께, "주님, 제가 이렇게 열심히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을 보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언니 마르다는 이 귀한 말씀을 듣지 않고 부엌에서 일만 하고 있습니다. 주님, 부엌 일은 나중에 하고 와서 말씀을 들으라고, 제 언니에게 말씀 좀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청했다고 칩시다. 그랬다면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했겠습니까? 아마도 마르다에게 했던 똑 같은 말씀을 마리아에게 하셨을 것입니다. "마리아야, 마리아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르다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전심을 다해 이웃을 섬기는 기쁨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거룩한 기쁨입니다. 전심을 다해 섬기는 한, 그 기쁨을 빼앗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4.

 

결국, 예수님이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지 전심을 다해 그 일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경계하고, 그 마음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예배는 좋은 몫이고, 주차 봉사는 덜 좋은 몫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좋은 몫이고, 주방에서 음식 준비하는 것은 덜 좋은 몫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은 좋은 몫이고, 청소하는 것은 나쁜 몫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서 전심으로 섬기는 한, 모두가 다 ‘좋은 몫’이 됩니다. 좋은 몫 즉 좋은 선택이란, 바울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고전 10:31)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 자기를 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분 좋아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전심으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지난 주일에,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대야와 수건이 무엇인지를 물었고, 그 대야와 수건을 꺼내어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참여하자고 호소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교사로 자원해 주신 분들이 계셨습니다. 통역이나 기타 다른 봉사 활동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모두 다 자신의 수건과 대야를 꺼내 들고 서로를 섬김으로, 우리 모두의 기쁨과 보람이 더 커지고 지속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교회에서 봉사하는 우리의 목적이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는 데 있다면, 우리는 실격입니다. 그런 목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상처를 받게 되어 있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태도로 봉사를 하면 결코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물론, 자신의 타락한 욕망과 허영심을 충족시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죄된 만족감은 더 깊은 갈증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갈수록 더 큰 인정과 찬사를 받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마르다처럼 어리석고 속 보이는 행동을 하게 되고, 부끄러운 속내를 내보이게 됩니다.


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전심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정반대의 결과를 얻습니다. 이렇게 섬기는 사람들은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언제든 기쁘게 물러날 수 있고, 또 언제든 기쁘게 나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고 칭찬하면 겸손하게 받아들이지만, 그것에 매이지 않습니다. 나의 봉사를 통해 오직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다른 사람들이 도움을 입었으면, 그것으로 충분히 기쁘고 행복합니다. 이 기쁨과 만족감은 더 이상의 갈증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망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 주고 기쁘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덕스럽고 아름답고 사랑할만한 봉사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게 성숙한 헌신자들이 우리 교회의 모든 사역에 가득 가득 들어찬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불행하게도,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우리를 이렇게 되도록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공명심과 자만심과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끊임없이 우리를 넘어뜨리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섬겼다는 사실 하나에 기뻐했다가도, 다음 날이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던진 말 한 마디를 생각하고 마음 상해합니다. 그것이 별 수 없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5.

 

그래서 우리에게는 예배가 필요하고, 성경 공부가 필요하며, 기도가 필요하고, 영적 교제가 필요합니다. 마리아가 택한 몫과 마르다가 택한 몫은 마치 ‘신앙 생활의 두 다리’ (two legs of spiritual life)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봉사하는 만큼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만큼 봉사해야 합니다. 예배를 사모하는 것 만큼,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는 일을 사모해야 합니다. 제대로 섬기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더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말씀을 배웠다면,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진실로 칭찬받으려면, 말씀을 다 듣고 난 후, 자신의 몫을 찾아 열심히 섬겨야 했습니다. 마르다가 진실로 칭찬받으려면, 전심을 다해 손님들을 대접하고 떠나 간 후, 홀로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는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도 마르다의 실수로부터 벗어날 방도가 없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의 올무(trap)에서 해방될 방법이 없습니다.

 

봉사만 하고 예배를 소홀히 하면 그 결과는 뻔합니다. 금세 탈진되고, 불평 불만이 쌓여갑니다. 많은 일을 하지만, 그 일들을 통해 좋은 열매가 맺어지지 않습니다. 예배만 좋아하고 봉사를 소홀히 하는 것도 불행한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 사람의 신앙은 마치 온실에서 자란 식물처럼 연약한 것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봉사하는 일에 겁을 냅니다. 그 이유를 물으면 "상처받을까 봐"라고 대답합니다. 그분들이 알지 못하는 사실은 이것입니다. "상처 없이 성장도 없다."는 진실!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는 건강한 영성을 원한다면, 온실에서 나와야 합니다. 받은 바 은혜를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를 사랑하십니까? 그와 동일한 정도로, 봉사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기를 즐기십니까? 그와 동일한 정도로, 형제 자매들의 필요를 위해 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봉사하는 일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성경 공부를 좋아하십니까? 그와 동일한 열심으로, 봉사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이 받은 바 은혜가 더욱 커질 것이며, 여러분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질 것입니다.

봉사를 사랑하십니까? 동일한 정도로, 예배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없는 봉사는 마음만 부풀게 할뿐입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열심이 있으십니까? 동일한 열심으로, 성경 공부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배우는 것이 없이 봉사만 하면, 마치 훈련 없이 메스를 든 의사와 같은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궂은 일을 찾아 섬기는 데서 기쁨을 느끼십니까? 동일한 열심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적인 시야(spiritual perspective)가 올바로 잡혀 있어야만 바르게 봉사할 수 있습니다. 바른 봉사만이 우리 자신을 성장하게 하고, 교회의 덕을 세웁니다.

 

6.

 

오늘 여러분은 가을철 성인 신앙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서를 받으셨습니다. 지난 여름 동안에 노력하여 우리 교회는 커리큘럼을 새로 정비했고, 성도들의 참여를 위해 주일에 별도의 장소를 빌려 성경공부를 개설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과목을 맡은 모든 강사들에게, 강의의 질(quality)에 ‘올 인’(all-in) 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자신의 대야와 수건을 꺼내어 봉사하기를 원하시는 분들께 그리고 이미 봉사하고 있는 분들께 권합니다. 교회 안에서 무슨 일로든 봉사하고 있는 분들은 개설되는 과목들 중 최소한 한 과목을 택하여 공부하시면 좋겠습니다. 법처럼 정하여 강요할 마음은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진심에 호소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신실하고 아름다운 ‘섬기미’(helper)이가 되고 싶으시다면, 교회에 와서 봉사하는 시간만큼 성경 공부에 참여하여 배우시기 바랍니다. 특히 지도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분들은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는 입장에 처하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기 바랍니다. 언제나 가르치는, 언제나 지도하는, 언제나 명령하는, 언제나 결단해야 하는 입장에 처하는 것보다 영적으로 더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누구나, ‘주일 예배 참여’와 ‘속회 참여’를 필수적으로 여기고, 그에 더하여, ‘한 과목 공부’와 ‘한 가지 봉사’ 를 필수로 여겼으면 좋겠습니다. 도대체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시겠습니까? 예, 정말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사는 것이 벅찬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문제는 마음이 없는 것이지, 시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호소하는 목적은 ‘교회 일만 아는 숨 막힐듯한 사람’을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기쁨과 행복과 생명력으로 충만한 삶이 우리 모두에게 실현되기를 원해서 그럽니다. 언제 어디를 가든, 그곳에서 천국을 살며 영원을 누리는 참된 영성의 사람으로 성숙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럽니다.

 

아, 우리 모두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전심으로 섬기고, 겸허히 물러나, "저는 오직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인들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하여 신령한 기쁨과 행복이 우리 모두에게서 넘쳐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의 죄된 지배욕과 허영심을 만족시키는 데서 오는 기쁨과 행복이 아니라, 우리 영혼 깊은 곳에 있는 거룩한 열망을 만족시키는 데서 오는 기쁨과 행복, 우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이웃을 위해 유익을 끼친 데서 오는 기쁨과 행복이 우리 삶에 넘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하여 이 땅에서의 우리의 하루 하루가 천국의 삶이 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아낄 것이 무엇이며, 주저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저에 대한 저 자신의 기도이며 소망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성도님들에 대한 저의 간절한 기도요 소망입니다. 주께서 이 소망을 이뤄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진실하신 주님,
저희를 진실하게 하소서.
순전하신 주님,
저희를 순전하게 하소서.
저희의 영적 시야를 늘 바로 잡아 주셔서
헛된 것에 이끌리지 않게 하소서.
주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일에
더 부지런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섬기는 저희의 마음이
갈라지지 않고
늘 온전하게 하소서.
저희의 섬김으로
저희는 낮아지고
주님만 높아지게 하소서.
아멘.